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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빛바람 Oct 26. 2022

그 누가 비난할 것인가?

벌써 15년도 더 지난 시각. 사회의 한 구성원을 취재하기 위해 서울의 한 지역을 방문했다. 일반적인 주점과 큰 차이는 없었으나, 그곳은 자신이 가진 정체성을 부정하며 새롭게 태어나길 원하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성소수자들 중 MTF 트랜스젠더들이었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린 결론은 "단지 다를 뿐이지, 틀린 것은 하나도 없었다."였다. 그 나름의 고민과 커뮤니티의 삶이 있었고, 생활이 있었으며 자신이 꿈꾸어 오던 생활에 대한 목표가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들의 존재 자체를 비난했고, 그들은 점점 음지로 숨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당시, 그들에 대한 자료를 조사하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TV에 부쩍 등장하게 된 성소수자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관심은 단지 "정상"이라 자부하는 사람들의 "시각"에서만 그러했을 뿐이지, 그들 나름으로 자신들의 삶은 평범함의 연속이었다. 당연하지만, 그들도 친구들과 모여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라면 한 개를 나눠 끓여먹었으며, 삼겹살을 구워 먹고 남은 기름에 김치를 썰어 넣어 볶음밥을 해 먹는 우리와 비슷한 삶을 살아왔다. 단지, 추구하는 목표가 다를 뿐이었다.

그 당시 다양한 측면에서 조사를 위해 FTM 트랜스젠더를 소개받아 그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건 소주 한 잔 기울이며, 그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들어주는 것이었다만, MTF보다 더 소수자였던 FTM의 삶은 무관심과 폭력으로 일관될 뿐이었다. 정확하게는 FTM이 존재하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MTF는 비난의 시선이라도 바라보는 시선이라도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여성스러울 수 있는지? 혹은 어떻게 수술을 받았는지? 혹은 성적인 질문들도 마다하지 않고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만, FTM은 그냥 없는 존재였다. 즉, 그 사회에서도 관심과 무관심의 경계 속에 비난의 화살이 발생하고 있었다.

그 당시 한 명의 소수자와 커피를 마시며 그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때였다. 마침 우연찮게, 그들을 지원해주는 센터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함께 방문하기로 했다. 그곳은 모 단체가 운영하는 곳이었고, 우리가 이름만 들으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사람이 센터장이었던 곳이었다. 나와 그는 함께 방문을 하기 전, 현재 운영을 하는지 먼저 전화를 걸었다. 나는 인터뷰 대상을 좀 더 확보하기 위해서였고, 그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선행자의 입장에서 도와주며 -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단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그곳 역시 편견의 시선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전화의 첫 한 마디는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를 충분히 숙지한 뒤 공부하고 방문을 하라는 것이었다. 성소수자로서 몇 년을 살아왔던 그의 표정은 침울해져 갔다. 자신들을 지원해주겠단 단체에서 마저 자신들의 삶을 하나의 "이상하다."는 관점에서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 시선은 자신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시선이다 보니 점점 음지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 후 한 두 차례 인터뷰를 더 가진 뒤,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기게 되었다. 사실, 나 자신조차 그들에 대한 깊은 관심은 없었다. 단지 "호기심"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우리와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존재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르게 살아간다 하더라도 틀리지는 않았다. 당연히, 그들에 대한 관심은 우리가 바라보는 일반적인 주위 사람들의 관심과 동일해야 했다.


그 뒤 십몇 년의 시간이 흐른 뒤, 현업에 치이고, 또 다른 관심사를 바라보다 보니 또 다른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당연하게도, 우리가 바라보는 그 시선은 항상 우리의 관점에서만 생각하고 있었다. 당연히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남들과 다르면" 안되고, 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각인하고 있었다. 물론, 다른 사람이 불쾌하고 - 고통스럽게 하는 자신의 취향에 대해서는 교정을 받아야 하지만, 그 외의 상황에 대해서는 "다름"을 인정할 줄 아는 사회의 분위기가 형성되지 못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개성을 숨 죽이며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평범함"을 추구하는 존재가 되어갔다.

십몇 년 전 취재를 통해 듣게 된 한 인물은 우리가 보기엔 평범한 존재였다. 한 명의 아버지로, 남편으로, 가장으로서 삶을 살아가고 있었으며, 번듯한 직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름 돈을 많이 모았는지 서울 모 지역에 대형 주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낯과 자신의 집에서는 평범한 가장으로서 삶을 살아갔지만, 저녁이 되면 XX 마담 혹은 XX 언니가 되어 성소수자를 착취하는 존재로 변신했었다. 그는 평소의 일상에서는 평범한 존재였을지 모르더라도, 밤이 되면 하이드가 되어 자신이 감추어왔던 내면을 마음껏 분출했었다. 당연히 그의 삶은 비난받아 마땅하다만, 그의 행동에 대해 인지조차 못하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사실 비난의 화살은 분명 한 인물에게 해야 할 수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 소수의 시각에 대해서만 침을 뱉었을 뿐이다. "평범함"이라는 가면을 쓴 존재와, 자신의 존재를 찾아 탐구하기 위해 "평범함"을 거부한 존재 중 과연 누가 비난을 받아야 하는지는 우리가 반드시 생각해야 할 과제이지만, 이 글을 쓰는 나조차 잊어버리고 망각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연히, 세상의 다양한 시선과 생각 속에 우리가 단지 생각만 하더라도 불편한 존재는 어디에서든 있었다. 단지 우리의 시각이 그곳을 미처 바라보지 못했을 뿐이다.

그 당시 그 들의 삶과 생각에 대해 짤막한 글을 썼으나, 당연하게도 어느 누구도 읽어주질 않았다. 짧게나마 연재를 생각해 보았지만, 연재를 받아주지도 않았다. 자극적이지도 않았고, 그냥 그들의 생각만을 담았을 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 그들의 삶과 생각에 대해 언급이 된 내용들은 전부 가십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 소재는 분명 "비난"과 "역겨움"을 유발하는 소재였을 뿐이고, 단지 사람으로서 함께 생각하기 위한 과제에 대한 탐구는 어느 누구도 생각해 보질 못했던 일이었다. 나조차 더 실현하지 못하고 중간에 멈춰버린 아쉬움이 남는다.

당연히 비난의 존재가 아닌 사람들이다만, 우리의 시선은 여전히 비난의 눈길만 던질 뿐이었다. 단지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받아야 할 시선의 대가는 그리 아름 답지 많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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