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이번 글은 사진이 적절치 않다 생각이 든다.
그 일이 있기 며칠 전. 야간 촬영 테스트차 퇴근길에 종로로 이동을 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알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그곳을 촬영하기 위해서였다. 광화문을 중심으로 하여, 그 들의 목소리를 찍고 싶었기 때문이다. 최대한 그들의 목소리에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선택한 Summilux 50/1.4 렌즈를 손에 들고 테스트 촬영을 하였고, 마침 맘에 드는 사진이 나와 촬영 준비가 마무리가 되었다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테스트 촬영을 하기 2시간 전에 회사 업무차 이태원에 잠시 들렸었다. 그리고 가을 햇살이 좋아 사진 몇 장을 찍고, 바이닐 앤 플라스틱에서 음악을 몇 곡 듣고 다시 사무실에 복귀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일은 광화문에 들렸다가, 저녁 늦게 이태원에서 촬영을 하고 집에 돌아가겠다고.
내 머릿속에 처음으로 기억나는 참사는 93년 아시아나 항공의 전남 추락이었다. 그 뒤 서해훼리호의 침몰. 당시 적정 탑승 인원을 초과하는 인원의 탑승과 날씨의 문제로 배가 심하게 흔들리다 침몰한 참사였다. 300명이 가까운 인원이 사망한 참사. 분명 위 두 참사는 적어도 내 기억 속에 TV에서 갑자기 나오던 "긴급속보"를 통해 알게 된 참사였다. 전 국민은 너와 나 할 것 없이 TV에 숨을 죽이며 왜 사고가 났는지? 그리고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길 바라며 응원을 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 이후에도 큰 참사는 많이 벌어졌다. 성수대교의 붕괴. 멀쩡한 다리가 출근길에 그렇게 허망하게 무너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부실공사로 출근을 하던 직장인과 학생들이 32명이나 사망한 참사. 내 기억 속에는 적어도 "성수대교"는 부실공사의 대명사였고, 지나가면 위험할 거라 생각이 되는 그런 다리로 기억에 남았다. 사실 부실공사라 하더라도, 혹은 안전불감증이라 하더라도 최소한 "원인"을 찾아야겠단 의지는 있었다.
그 이후 여러 참사를 지나 삼풍 백화점의 붕괴 참사는 허망했다. 내 기억으론 하교 후 석간신문을 통하 날아온 호외와 TV에서 나오던 참사에 대한 속보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분명 이 시절에는 아침 10시까지 오전 방송이 나오고, 그 후에 5시 반이 되어서야 오후 방송이 나오던 시절이었는데, 막 4시 넘은 시간에 "뉴스속보"라는 이름으로 참사에 대한 속보가 나왔을 때의 모습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분명 어렸을 때 몇 번은 지나갔을 그 백화점에서 사람들은 허망하게 죽어갔다. 그리고 곳곳에서는 악마의 목소리도 들리긴 하였지만, 그건 일부의 목소리였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원인을 밝히길 바랬고, 완벽히 해소가 되지 않더라도 그 의혹을 설명하고자 하는 모습으 보였다. 적어도 그때만큼은 모두가 애도를 했다.
그 이후 여러 참사가 더 있었고, 잠시 잊혔던 세월호 참사는 정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던 참사였다. 군 시절 몇 번이나 보았던 그 여객선. 그 당시에는 "오하마나"라 불리었던 그 세월호가 그렇게 허망하게 침몰하였다는 것. 아버지의 입장에서 내 아이들이 그렇게 허망하게 희생되었다는 것에 눈물이 났고 분노를 했다. 하지만, 이제 모습은 과거와 달랐다.
왜 정치적으로 이용을 하냐!라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세월호의 아픔을 이야기하면 좌파이며 빨갱이였다. 그걸 정치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협작꾼에 불과하다 했다. 그리고 세월호의 아픔에 대한 원인을 밝히고자 이야길 하면 비난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가방에 걸어놓은 노란 리본은 비난과 폭력의 대상이었다. 어린 학생들이 허망하게 희생된 참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분노하는 것이 분명 시민의 올바른 모습 일건대, 왜 우리는 그러한 모습을 숨죽여서 이야기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모 단체에서는 세월호를 추모하는 노란 리본을 달았다는 이유로 "지겹다"라고 이야기했다. 사람이 희생된 그 상황에서 "지겹다"라고 이야기하는 그런 사람들과 우리는 함께 살고 있었다.
위에서 이야기하였듯, 촬영을 하려 했으나 여러 여건상 광화문과 이태원을 방문하지 못했다. 저녁 일찍 맥주 한 캔을 하고 이른 잠에 들었다가 새벽에 받은 문자 한 통은 충격적이었다. 이태원 참사로 149명이 사망하였다고 했다. 내 머릿속에는 폭탄 테러인가 했다. 불과 몇 년 전. 인도네시아 출장 때 간발의 차이로 자카르타의 폭탄 테러가 있었다. 그리고 다시 자카르타를 방문했을 때 대형건물마다 엑스레이 투시기를 설치했었다. 분명 종교적 광신도들의 그릇된 신념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이 되었을 때, 세계는 하나가 되어 추모를 했다. 나 역시 인도네시아를 방문하며 첫마디가 추모의 인사였다.
마찬가지로, 폭탄테러인가 하고 네이버 뉴스를 검색해 보니 허망한 죽음에 대한 참사라는 이야기를 보게 되었을 때. 그리고, 그 밑에 달려있는 댓글들을 보았을 때. 과연 사람이 사람으로서 고통과 아픔을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된 이유가 무엇인지가 궁금할 따름이었다. 단지 그 시간에 이태원에 갔다는 이유로, "놀다가 죽은"것을 추모할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 그 상황을 즐기듯 열심히 댓글을 써 내려가는 사람들. TV 뉴스 속보에서는 끝까지 "마약"과 관련성을 이야기하던 모 기자의 발언. 유튜브를 통해 수십 번을 보았지만, 그 기자는 정말 150여 명의 사람들이 이유 없이 희생된 것에 대해 "아픔"을 공감하고 있었는지부터가 궁금했다.
그 이후 수많은 게시판과 인터넷 포털을 통해 올라오는 그들의 죽음에 대한 희화화. 적어도 한 명의 사람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었다. 모 정치 평론가는 적어도 "참사"가 아니며 "사고"이고, "희생자"가 아니라 "사망자"라 이야기해야 한다 했다. 어떤 인터넷의 무속 전문가는 그들의 희생이 보람되게 해야 한다 했다. 과연 이게 인간으로서 할 이야기인 듯싶었다. 그리고 이 사고에 대한 원인에 대해서 밝히기보다, 애도가 필요하다 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에 대한 비난, 전 정권에 대한 비난, 경찰에 대한 비난으로 끊임없는 비난의 대상을 찾아 떠나는 하이에나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나도 그 현장에 있을 뻔했다. 어쩌면 그 참사의 희생자가 되었을 수 있고, 아니면 그 참사의 현장을 직접 스케치하였을 수 있다. 그건 모를 일이다.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에 난 그 참사의 현장에 잠시 피해 있었을 뿐이다. 분명 그 자리는 누구라도 갈 수 있었던 곳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 순간 적어도 많은 사람들은 그 참사의 희생에 공감하는 모습보다는 희화화하고 자신의 삶에 대해 웃으며 떠드는 사람들뿐이었다. 그런 모습 속에서 난, 도저히 글을 쓸 수 없었다. 그동안 찍었단 사진들을 잠시 멈춰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누구보다 원인에 대한 진상규명이 되길 원하였지만, "애도"를 하며 잠시 마음을 추슬렀다. 하지만 현실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잠시 시청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추모의 현장인데 영정 하나, 위패 하나 없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허망한 죽음에 이름 없는 영혼이 된다는 게 말이 되는 일인가? 아무것도 없이 국화꽃들만 놓여있는 그곳에 한 사람이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세월호처럼 이태원으로 정치 팔이 할 거냐는 말이었다. 그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추모의 현장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로 큰 목소리를 외치던 그 사람의 모습은 몇 년 전 아버지를 병원에 모시기 위해 서울대학 병원을 갔을 때 말도 안 되는 시위를 하던 그 모습과 오버랩되었다.
"백남기 농민의 정확한 사인을 위해 부검을 요청한다."
과연 사람으로서 할 이야기인가 싶었다. 적어도, 사람이라는 존재가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이해하고, 공감하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적어도 그 사람의 행보는 공감이 아니었다. 오히려 희생자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고, 대못을 박는 행위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카톡으로 글을 나르기 시작했다. 왜 그날 찾아와서 괜히 나라 어수선하게 하냐는 내용이었다. 결국 모든 비난의 화살은 다시 희생자에게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럼 도대체 잘못이 누구란 소린가? 그날의 행정관, 모든 참사와 재난을 컨트롤하는 컨트롤 타워의 역할은 없는 것인가?
당연히 20대로서 놀고 싶은 건 비난할 수 없다. 1년에 단 하루, 기쁜 마음으로 그리고 안전하게 놀도록 기회를 만들어주지 못한 기성세대의 잘못을 비난하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없었다. 2002년 전국의 수많은 인파가 붉은색 티셔츠를 입고 모도과 열정적으로 소리를 외치던 그때. 촛불을 들고 행진하던 그때. 그 누구도 다친 사람들이 없었다. 적어도 대한민국의 시민은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던 그런 곳이었다. 하물며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하던 그때를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더 이전에 요한 바오로 2세가 방문하였던 그때. 수 백만의 인파가 있었지만, 이런 허망한 참사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 들은 잘못이 없다. 어느 누구라도, 분명 그 자리에 있었다면 발생했을 사고였다. 하지만, 왜 그들을 비난하려 드는가? 왜 우리의 잘못은 인정하지 못하고, 적어도 컨트롤 타워의 잘못이 있다는 것을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이 없단 말인가? 지난 5일간 많은 생각을 해 보았다. 그리고, 잠시 동안 글 쓰는 걸 멈추고 곰곰이 생각해봤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고, 그 어느 누구도 비난을 받을 이유는 없었다. 적어도 말이다. 그 자리에 있었다고 비난받을 일은 없었다. 애매한 토끼 머리띠 남자가, 혹은 토끼 머리띠 여자가 범인이라서 조사를 한다는 말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다시 약물이 포함된 사탕을 나눠주다 보니 그런 일이 발생했다 한다. 그건 본질이 아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턴가 뉴스의 한 꼭지가 올라오기 시작한다. 나는 굳게 진실이라 믿긴 하지만, 잠시 동안 말을 아낄까 한다. 적어도, 그런 허망한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했다면, 그들의 넋도 허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허망한 이유 때문이라면 말이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 대해서 당신들의 잘못이 아니라 말하고 싶다.
적어도 그들이 안전하지 못한 사회를 만든 나를 포함한 기성세대의 잘못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잘못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