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 혹은 에릭 블레어가 내게 말했다 -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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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의 에릭 블레어의 삶은 처절함의 연속이다. 파리와 런던에서 노숙자 생활을 하였으며, 이후 위건 부두에서의 경험을 책으로 썼지만 작가로서 크게 성공하지 못한다. 이런 삶 때문이었을까? 그의 글에는 여전히 처절함이 보인다. 그나마, 그가 성공한 글은 "동물농장"이후였으니, 그 이전에는 오히려 버마의 식민지 경찰 생활을 하였을 때가 더 나았다고 한다.
사실, 이번 조지 오웰에 대한 글은 "조지 오웰"의 삶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지금의 상황 속에서 우리는 "조지 오웰"의 글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에 대해 고민을 해 보고자 글을 쓰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지 오웰의 작품 하면 떠 오르는 것은 "동물농장"과 "1984"일 것이다. 그나마 조금 더 나아간다 하면 르포르타주 단편선 정도일 것이고, 조금 더 읽어 보았다면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을 손에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작품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빈부 격차에 대해 알아봐야 한다.
당시 유럽의 빈부격차는 너무나 처참했다. 부자들이 겪는 사회적-문화적 경험과 더불어, 빈민층들이 겪는 사회적 처절함은 너무나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빈민들의 주거지는 너무나 처참하고 더러울 지경이었다. 조지 오웰의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의 한 장면을 읽어보자. 양배추 삶는 냄새가 진동하는 모습. 그 모습은 다시, 소설 "1984"에서 다시 한번 설명해준다. 중위층의 삶을 살아가는 것과는 반대로 상류층들은 우리가 느끼지 못했던 그 모든 것들을 경험한다.
빈민층이 거주하는 여인숙을 한 번 들여다보자. 동전 한 닢으로 잘 수 있는 곳은 줄에 매달려 잠드는 수밖에 없다. 장소 제공자는 시간이 되면 로프를 풀어서 내쫓아 버린다.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인 수면의 욕구마저 충족할 수 없는 현실이 그 시기에는 벌어졌다.
소설 "동물농장"에서는 여전히 핍박받고 고통받는 동물들의 모습을 투영하여 우리들에게 보여준다. 그 동물들은 종류들의 차이가 있을 뿐 고통받는 행위는 동일하다. 아마, 누군가 그러했던가? 마르크스의 이론 덕분에 노동자들의 삶은 해결이 될 것이다 생각을 하였지만, 그 현실은 보기 좋게 빚 나간다. 결국 소련을 지배하고 다시 노동자를 핍박한 존재는 다름 아닌 스탈린이었으니 말이다. 단지 보여주기 위한 현실이었지만, 공산주의의 본질은 사라지게 된 것이다.
우리가 진실을 알지 못한 채 읽어나가는 "동물농장"과 "1984"의 모습은 전체주의에 대한 경고로 보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수많은 영문학자들이 읽고 풀어나가는 "동물농장"에 대한 텍스트 분석은 단지 계층 간의 갈등으로만 그려지고 있었다. 그나마, 일부 계층은 스탈린을 빚대고, 소비에트 연방을 빚대어 만든 글이라 이야길 하지만, 현실은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우리는 계속 소리를 외치며 세뇌당하며 "우리는 행복하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모습은 무표정한 채 단 한 곳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 무표정함 속에서 진실을 찾는 눈이 필요하다.
더 긴글을 쓰며 이 곳에 마무리를 하고자 하였으나, 이전에 쓴 조지 오웰의 "1984"를 기준으로 한 사회 비평글을 대신하며 이 글을 마칠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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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 혹은 에릭 블레어가 내게 말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