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brunch.co.kr/@pilgrim6/160
오늘 종례는 평소보다 빨리 끝났다. 아마 곧 있으면 중간고사 기간이라 그런지 선생님은 밖에서 놀지 말고 시험공부 준비를 하라고 일러주었다. 어차피 시험기간이 다가오면 선생님들은 출제 예상 문제를 몇 십 문제 프린트해서 주실게 뻔했다. 그래서 아이들은 선생님 이야기를 무시하고 친구들과 놀러 가기 바빴다. 오락실로 가는 남자아이들도 있었고, 어쩔 수 없이 학원에 가야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여자아이들도 삼삼오오 모여 수다 떨러 가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학원에 가야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세희도 친구들과 모여 학원에 가야 했지만 오늘만큼은 두영이가 뭘 쓰는지 궁금했다. 방향이 다르지만 세희는 두영이가 가는 방향으로 쫓아갔다. 두영이는 역시나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이어폰을 끼고 터벅터벅 걸어갔다.
"야! 정두영!"
세희는 두영이를 향해 소리를 질러가며 불렀다. 하지만, 두영이는 이어폰의 음악소리가 너무 컸던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걸어갈 뿐이었다.
"야! 정두영! 내 목소리 안 들려?"
두영이는 설마 누가 자신을 부르는가 해서 무시하고 앞으로 걸어갔었다. 딱히 어울리는 친구도 없었기 때문에 하굣길에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친구도 없었다. 그래서 누가 자신의 이름을 부를 거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혹시나 해서 뒤를 돌아보니 뒤에는 세희가 있었다.
"야! 정두영! 내 목소리 안 들려? 사람이 부르면 대답을 해야지."
하굣길에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도 처음이었지만, 그것도 반에서 인기가 많은 세희가 내 이름을 부르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두영이는 가던 길을 멈추고 귀에 꽂아둔 이어폰을 빼며 대답을 한다.
"응. 세 희구나.. 혹시 할 이야기 있어?"
"야. 정두영. 넌 왜 바보같이 맨날 창희가 괴롭히는데 가만히 있어?"
두영이는 입을 우물쭈물하다 세희를 바라보며 어렵게 말을 건넨다.
"그냥.. 괜히 창희한테 대들었다가 싸워봐야 지기만 할 거고..."
세희는 두영이를 노려보며 재빠르게 이야기한다.
"야. 그러니까 걔네들이 널 항상 괴롭히는 거야. 사람이 그래도 대들고 그래야 안 괴롭히지. 네가 그냥 가만히 있으니까 친구들이 널 괴롭히는 거 아니겠어?"
"뭐... 그래도 괜찮아."
"뭐가 괜찮아? 걔네들이 니 노트 빼앗고, CD플레이어 뺏어도 괜찮아?"
"그건..."
두영이는 오늘 오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영화를 좋아했던 두영이는 항상 좋아하는 영화의 OST를 듣곤 했다. 좋아하는 영화를 여러 번 빌리기엔 용돈이 부족했기 때문에 OST를 들으며 영화 장면이나 대사를 상상하곤 했다. "인디펜던스 데이"는 SF이긴 했지만 우주에 대한 상상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종종 음악을 듣곤 했다. 머릿속으로 보았던 영화나 애니메이션, 게임들에 대해 상상을 하다 보니 두영이의 머릿속에는 자신만의 이야기가 생각나 언젠가부터 노트에 생각나는 이야기들을 끼적이기 시작했다. 아직은 남들에게 보여주기 부끄러운 글인데, 그 노트를 가져가서 봐 버린 거다. 화가 났지만 꾹 참았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근데 두영아. 너 무슨 글 쓰고 있었어?"
아마 세희도 두영이가 쓴 글을 읽는 창희의 목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앞으로 학교를 다닐 생각을 하니 많이 부끄러웠다. 아직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싫은 글이었는데, 그렇게 읽혔다는 게 화가 났다. 반장 세희도 그 글을 알았다는 게 부끄러웠다.
"아... 그게 말이야..."
"무슨 글인지 이야기해 주기 힘들어?"
세희는 두영이의 글이 궁금했다. 아니, 어찌 보면 혼자 조용히 있으면서 글을 쓰는 모습이 참 신기해 보였다. 일기를 쓰는가라고 생각을 해 보았고, 아니면 낙서를 하는가 생각을 해 보기도 했다. 공부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가끔 책상 너머로 흘깃 쳐다보면 무언가 빽빽하게 글을 쓰는 듯 보였다. 혼자 골똘히 생각하다가 쓰는 글을 보니 궁금해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항상 두영이는 혼자 있곤 하다 보니 먼저 말을 걸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 마침 창희가 두영이를 괴롭히다 보니 어떤 글을 썼는지 알게 되었다. 같은 또래 친구가 왠지 소설을 쓴다고 하니 신기해 보였다.
"내가 보니까 너 소설 쓰는 거 같은데, 혹시 반지전쟁 같은 판타지 소설이야?"
두영이는 세희의 말에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판타지는 아니고... 그냥 이것저것 쓰고 있었어."
"어떤 내용인데?"
세희는 두영이가 쓴 글이 더욱 궁금해졌다. 분명 내용은 판타지 같았다. TV에서 종종 나오는 애니메이션 "아벨탐험대"와 같은 내용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가끔 친구들이 TV에 나오는 애니메이션 내용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학원에서는 볼 수 없어 많이 궁금했다. 그나마 밤늦은 시간 드라마나 "엑스파일"같은걸 좀 볼 수 있었으나, 보통은 피곤해서 일찍 잘 때가 많았다. 가끔 책을 읽을 때도 있었지만, 자주 보질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무래도 학원을 가야 하고, 외고를 가야 한다는 목표 때문이었을까? 항상 뒤처지는 게 부담스러웠다.
그에 반해 두영이는 항상 혼자 있으며 생각을 하는 시간이 많았다. 꿈속에서도 자신이 상상하는 세계를 꿈꿔보곤 했다. 때론 액션영화처럼, 때론 SF영화와 같이 광활한 우주를 누비는 전사의 모습이었다. "스타워즈"는 한 권의 바이블이었고, 게임 "윙커맨더"는 우주를 누비는 낭만적인 파일럿의 모습이었다. 그러다 때론 판타지 세상의 용사가 되어 세상을 구하는 상상도 해보곤 했다. 그 모든 것이 집에서 혹은 학교에서, 등하교시간에 상상하던 것들이었다.
"응.. 별 내용은 아니고, 그냥 머릿속에서 생각나는 걸 조금씩 적어봤어. 그냥 혼자 있을 때 상상하던 내용들이야."
"혹시 읽어봐도 돼?"
세희는 두영이가 쓴 글이 궁금했다. 항상 시험 성적만 생각하던 세희의 머릿속에는 성적과 공부가 아닌 다른 부분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는 두영이의 모습이 신기했다. 일부 친구들은 운동에 관심을 가지기도 하고, 아이돌 가수들의 모습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여자애들은 HOT와 젝스키스 중 누가 더 뛰어난지 이야기하곤 했다. 세희도 가끔 두 그룹의 음악을 들어본 적은 있지만, 즐겨 듣진 않았다. 평소에는 카세트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리스닝 교제의 녹음소리가 더 익숙할 뿐이었다. 엄마는 지금부터라도 수능 준비를 해야 한다고 했다. 고등학교를 가서 하면 뒤쳐진다고 했다. 딱히 뭘 해야겠단 생각을 해 보진 않았지만, 대학을 가고, 좋은 회사에 취업을 하려면 지금부터라도 준비해야 한다는 말이 항상 머릿속에 맴돌았다.
두영이는 세희를 보더니 머뭇거리다 노트를 꺼내 보여주었다.
"별 내용은 아니야. 그냥 한 명의 용사가 있었는데 자기가 용사인 줄 몰랐어."
두영이는 세희를 보며 더듬거리며 노트에 적은 내용을 이야기해 주었다.
평화로운 세상에 용사는 아버지가 실종된 이후 어머니와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다시 마왕의 부대가 쳐들어오게 되고 주인공이 살던 마을은 마왕의 손에 의해 파괴가 된다. 어머니도 살해가 되자, 어머니를 죽인 마왕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게 된다. 작은 단도 한 자루만을 들고 떠나던 중 친구들을 만나게 되고, 마왕이 있다는 화산에 까지 다다르게 된다. 그러던 중 엄청 강한 전사가 있어 힘겹게 싸웠는데,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주인공의 아버지였다. 주인공은 그 전사가 아버지인 것을 알아차렸는데, 어린 시절 자신에게 나무로 만든 장난감을 만들어 주다 칼에 손이 다치게 되어 흉터가 남았는데, 그 흉터를 보게 된 것이다.
"우와. 두영아 대단하다. 그 뒤에 내용은 어떻게 돼?"
두영이는 노트를 몇 페이지를 넘겨 세희에게 보여주었다. 등장인물에 대한 성격, 주인공이 여행하게 될 마을과 지역들의 이름. 여러 악당들의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조그맣게 적혀 있었다. "이 내용은 게임 드래건 퀘스트에서 참고함."
"사실은... 내가 혼자서 생각한 내용은 아니야. 그냥, 내가 보던 드라마나, 게임들 속에서 알게 된 내용들을 조금씩 상상하면서 써 본 거야. 그래서 친구들에게 보여주기 부끄러웠어."
두영이는 혼자 있을 때마다 보았던 비디오테이프나 게임들 속에서 보았던 내용들을 조금씩 머릿속에 담아 두었다가 그 내용을 조금씩 섞어가면서 글을 써 왔었다. 어쩔 땐 게임의 내용을, 어쩔 땐 미지의 유적을 탐험하는 고고학자의 모습으로. 때론 숨겨진 대륙 아틀란티스를 찾기 위한 다양한 퍼즐과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탐험가의 이야기를 써 보기도 했다. 그 모든 것들은 두영이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지만, 두영이가 읽고 보았던 내용들 속에서 나왔던 것들이다. 그래서, 완전한 두영이 자신의 작품이 아니었기 때문에 혼자만 노트에 끼적이는 걸로 만족했다.
"아마도 그냥 머릿속에서 잊어버리기 싫다 보니까 썼던 내용들인 거 같아. 그냥 혼자 읽으면서 이렇게 만들면 재밌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써 봤던 거야."
그다음 페이지에는 또 다른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아차산 정상의 온달바위의 공깃돌 밑에 지도가 있었는데, 그 지도는 고구려가 전성기이던 시절 무림의 비법을 담은 책을 숨겨놓은 곳이었다. 고구려의 뛰어난 기백은 그 무림의 비법으로...
"이 내용도 아마 무협지를 보며 쓴 건데, 다시 생각해 보니 그 시절엔 종이가 없었어. 그러니 이건 완전 판타지가 되는 거야."
그다음 페이지에는 한 명의 고고학자의 이야기가, 그다음 페이지에는 목성의 위성 유로파에서의 추격전이 그려져 있었다. 두영이의 노트는 전 세계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내용들로 펼쳐져 있었다.
"그냥 혼자 끼적이던 내용들이야. 아마, 누군가에게 보여주면 어디서 본 듯한 내용이거나 논리적으로 앞뒤가 안 맞는 내용이라 할 거야. 표절이라 하겠지."
세희는 두영이를 바라보며 노트를 자세히 뚫어지게 쳐다본다. 항상 남이 정해준 미래만을 생각했던 세희와는 다르게, 두영이의 머릿속에는 새로운 세상과 공간들이 펼쳐져 있었다. 그런 두영이가 부러웠다. 세희는 앞으로도 그런 글을 써 보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자 두영이를 바라보며 이야길 했다.
"그래도 두영아. 대단하다. 혹시, 아까 그 이야기 마지막 장면을 이야기해 주지 않을래? 그래서 그 내용을 우리 학교 문집에 담아보는 건 어떨까?"
"그러기엔 너무 부끄러운 내용이야."
세희는 두영이에게 노트를 돌려주며 이야길 한다.
"응. 부끄러울 수 있어. 근데, 넌 부끄럽더라도, 다른 친구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시작해 보았잖아. 언젠가는 분명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거야. 그런 네가 부러워."
두영이는 급하게 노트를 넣으며 세희를 바라본다. 그리고 마무리하지 못한 이야기를 어떻게 끝맺을까 고민해 본다. 하지만 아직은 부끄러운 지 세희의 눈길을 애써 피하며 이야기한다.
"한번 해볼게. 근데... 아마 어디서 봤던 내용일 거야. 아직 내 이야기를 써 보기가 쉽지는 않더라고..."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지만, 어쩌면 그 이야기가 끝맺을 것 같은 하루가 될 것만 같았다.
-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