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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빛바람 Jul 17. 2022

거리 사진 3 - 잊히길 원하는 거리

(이문 4 재개발 구역 거리 읽기)

그곳은 언뜻 보기에는 우리가 지내왔던 그런 거리의 모습이었다. 붉은 벽돌의 양옥 건물은 누군가의 꿈과 희망이 담겨 있었다고 믿고 싶다. 작은 땅에 동네 건축 설계사에 의뢰하여 지은 양옥집은 마치 찍어놓은 듯 똑같은 벽돌을 사용하였지만, 각 집마다 개성을 담고 있었다. 이제 이 거리는 조만간 사라질지 모른다. 아니, 사라지길 바라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좁은 골목 굽이굽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거리들 속에서 우리는 필자는 여러 번 방문을 하였고, 여러 차례 사진을 찍었다. 때론 필름으로, 때론 디지털로 사진을 남겼지만 늘 변함없는 거리의 모습이었다. 대통령 후보들의 유세가 한창이던 지난 22년 3월 초. 필름 카메라 하나만 들고 방문을 하였을 때다. 아직 3월이라 그런지 날은 좀 쌀쌀하였지만, 오히려 빛이 적당하여 원하는 사진들이 잘 왔다고 믿고 싶다. 


일방통행 (Leica MP, Summicron DR 50/2, Ilford XP2 400)

그 거리의 입구는 커다랗게 "일방통행"이라 적혀있었다. 차 한 대 겨우 빠져나가기 힘든 거리에 한쪽 측면에는 주차가 되어있고, 또 한쪽 측면에는 일요일 오후라 그런지 재활용 쓰레기와 종량제 쓰레기봉투가 널브러져 나와있었다. 우리가 살던 거리의 모습은 이렇게 좁은 골목 길안에 퍼져 있었다. 어린 시절 이 골목길에서 제기차기나 땅따먹기를 하던 그 시절은 차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들의 놀이터이자 아지트였다. 하지만, 이제는 차가 사람보다 더 많은 골목길이 되었고, 그 차가 쉬어야 하는 주차장으로 자리를 내어주게 되어 어린 시절의 추억의 골목길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더 이상 아이들의 시끄러운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단지, 차를 위한 통행 위치만 표시될 뿐이다.

이곳에 있는 집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집이다. "양옥"이라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 "한옥"과 반대말일 것이다. 기와집에 대청마루가 있는 집은 아니다. 붉은 벽돌과 콘크리트 혹은 시멘트가 섞여 있으며, 양변기가 있는 집이다. 물론, 더 오래전에 지은 양옥은 양변기가 아닌 변기가 있을 수 있고, 때론 재래식 변기가 자리를 차지했을 수 있다. 우리가 늘 이야기하는 "양옥"은 붉은 벽돌과 콘크리트 혹은 시멘트가 조화를 이룬 집이다. 그리고 가끔 어르신들 중에는 빌라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빌라와는 좀 다른 모습이지만, 이 건물에 2 세대 혹은 3 세대가 어우러져 살기 때문에 빌라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집주인 한 세대와 세입자들의 구성. 때론 세입자들과 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정답게 지내기도 하고, 때론 서로 얼굴도 마주치지 않는 그런 집이었다.

이런 양옥의 주된 특징 중 하나는 옥상이 어우러져 있다는 거다. 흔히 이야기하는 옥탑방이 있는 집이다.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그곳. 대부분의 옥탑방은 정식 건축 허가를 받은 건물이 아니었다. 준공이 마무리된 뒤, 급하게 합판을 붙여 만든 집이 될 수도 있고, 벽돌을 쌓아서 지었을 수도 있다. 때론 창고로 허가를 받은 뒤 세입자를 받았을 수 있다. 그 옥탑방은 항상 곰팡이가 있었고, 장판은 축축했다. 그래도 그곳마저 안락한 공간이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었을 거다. 그 거리의 옥탑방은 분명 존재했다.


옥상으로 가는 길(Leica MP, Summicron DR 50/2, Ilford XP2 400)
저 하늘을 향해(Leica MP, Summicron DR 50/2, Ilford XP2 400)

하지만 이곳은 언제나 골목이 있는 곳이다. 골목길을 향해 뻗어있는 집들을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눌러보면 비슷한 듯 비슷하지 않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집들 사이로 담을 못 넘어가게 어떤 집은 철조망으로, 어떤 집은 깨진 유리병으로 보안 장치를 해 놓는다. 사실 어린 시절 열쇠를 놔두고 가면 자주 담을 넘던 그 시절을 생각해 보면, 그때의 집은 너무나 담이 낮았다. 그래서 나도 자주 넘던 담이었지만, 남들도 자주 넘을 수 있는 담이었다. 어린 시절 엄마는 목에 열쇠 목걸이를 걸어주셨다. 학교 끝나면 집으로 곧장 돌아가 라면 하나 끓여먹고 밖으로 나가던 시절. 당연히 지금처럼 TV가 24시간 나오지 않던 시절이니,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비디오를 빌리거나 유선 텔레비전에 설치된 친구 집에 놀러 가는 게 일상이었다. 아니면 오락실에서 전자오락을 하던 추억. 그것도 아니면 속셈학원에서 공부를 하러 가기도 했다. 그 골목은 우리의 거리였다. 

가끔 친구들 중에는 우체통 혹은 대문 아래에 열쇠를 놔두고 가곤 하였다. 그런 집은 우리들의 아지트가 되곤 하였다. 친구들보다 먼저 방문하던 그 집. 그리고 친구가 오면 어리둥절하기보다, 가방 던져놓고 열심히 뛰어놀던 그때의 모습. 그곳이 바로 우리의 골목이다. 하지만, 이젠 그런 친구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비밀번호를 누르는 잠금장치는 인간적이다고 생각된다. 심한 경우에는 지문인식으로 집을 꽁꽁 잠가두기도 한다. 각자 개인의 공간이긴 하지만, 이젠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그런 곳이 되어가는 듯하다.


무너져가는 담벼락(Leica MP, Summicron DR 50/2, Ilford XP2 400)
요새(Leica MP, Summicron DR 50/2, Ilford XP2 400)

하지만 어느 한 편으론 정겨운 것들이 남아 있기도 하다. 담벼락의 벗겨진 칠 사이로 빼꼼히 올라오는 꽃들의 모습. 그리고 그 앞에 놔둔 장독대의 모습. 모두가 다 비슷하게 보이는 집이었지만, 그 집을 조금이라도 꾸미는 데는 꽃이 한 몫하곤 했다. 아버지는 우리 집에 장미를 심으셨다. 비고 오면 장미잎과 꽃잎이 떨어져 다소 지저분하긴 하였지만, 저 멀리서 보이는 만개한 붉은색 장미는 정말 아름답게 보였다고 한다. 가끔 지나가다 장미 한 송이 따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던 아버지의 모습. 다른 골목길도 동일하게 꽃과 장독대를 놔두며 우리 집 이렇게 이쁘다고 뽐내는 모습이 참 정겹기만 하다.

빼꼼(Leica MP, Summicron DR 50/2, Ilford XP2 400)
삼 형제(Leica MP, Summicron DR 50/2, Ilford XP2 400)

하지만 이제 이곳은 재개발이 들어갈 곳이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몇 배의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곳이다. 이미 진작부터 외부인들은 이곳을 구매하였고, 이제 막 아파트 입주권과 바뀌어져 프리미엄이 조금씩 붙어가고 있는 곳이다. 그러다 보니 깨진 유리창과 무너진 담벼락을 고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돈이 들기 때문이다. 몇 년 안에 밀어버릴 그런 집이다 보니, 간단한 수선만으로 집을 고치고 지내고자 한다. 그리고 얼마 전 총회를 통해 시공사까지 선정되었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이주할 것이고, 이곳은 다시 휘경 3구역처럼 쓰레기들이 넘쳐나다가 철거가 될 그런 곳이 된다.

하지만 아직 이곳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다. 우리가 어린 시절 지내왔던 그런 골목들이 아직 있는 곳이다. 어떤 골목은 차 한 대 지나가기 힘들 정도로 좁은 골목이지만, 거의 대부분의 골목이 차들이 꽉 막혀 생활하는 그런 골목이 되어가고 있었다. 조만간 사라질 골목길의 모습은 이제 필자가 남기는 사진들로 남게 될 것이다. 

다행히 다양한 카메라와 필름, 렌즈로 이곳의 풍경을 많이 찍어두었다. 앞으로 본 메거진을 통해 자주 이야기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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