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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빛바람 May 29. 2023

실직에 대처하는 우리 모두들의 자세 - 12부

12부. 명함

아침에 눈을 뜨는 게 쉽지 않다. 평소와 같은 일상에서 조금씩 멀어지는 느낌 때문이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나는 이 회사를 떠나야 한다. 그리고 "나"라는 존재는 조금씩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그 순간이 시간이 정해진 것은 아니다. 정말 내가 생각하지 못한 그 순간에 갑자기 모든 것들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친했던 동료들, 함께 소주를 나눠 마시던 동기들과의 추억도 이젠 내려놓아야 한다. 많은 것들을 "추억"이라는 이름아래 많은 것들을 내려놓아야 한다. 이젠 마음 편하게 마시던 소주 한 잔이,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마시는 걸로 바뀌었다.


명함.


나를 만드는 것은 "명함"이었다. 마치 내가 놓치고 잊어버렸던 그 모든 것들. 나 자신이라 생각했던 그것들이 사실은 나에게 주어졌던 "명함" 덕분에 이루어졌던 것들이다. 사람들과의 관계. 사람들이 나를 평가하는 기준 자체가 "명함"때문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나는 착각했다. 내 직함과, 내가 다니는 회사는 단지 "명함"이 빌려주었을 뿐이지, 나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었다. 대기업에 다니는 직함은 단지 내가 그 조직에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 빌려준 것이지, 그 이상 -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난 착각을 했다. 그 모든 것들이 나를 만드는 것이라 생각했다. 협력사 직원들이 나에게 인사하는 것은 단지 내 "명함"때문이었고, 동문회에서 나를 초대해 주는 것도 내 "명함" 때문이었다. 그 이상 -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그 조직을 떠나는 그 순간, 내 "명함"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 "명함"은 단지 종이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 "명함"이 만들어낸 직함은 이제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며, 다른 사람이 그 "명함"을 다시 받아, 내가 누리던 권리를 물려받으며 자신이 수행해야 할 의무를 짊어지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내 삶은 결국 "명함"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입사 첫날. 동기들은 홈페이지에 들어가 자신의 명함을 어떻게 꾸밀지 고민했다. 사실, 회사에서 만들어준 디자인은 몇 개 안 되었지만, 그 안에서 어떤 디자인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게 일상이었다. 부지런한 동기는 그 명함을 전부 만들어 명함 케이스에 넣어두었다. 동기들과 명함을 나누며, 사원에서 대리, 대리에서 과장, 과장에서 차장으로 올라갈 때마다 서로 명함을 교환하자 했다. 그때 받아두었던 명함집에 동기들의 명함을 간직해 두었지만, 그 동기들 중 연락하는 동기는 거의 없었다. 거의 대부분이 이직으로, 혹은 회사에 실망하여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한 동기는 입사 후 6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그리고, 몇 달 안 되어 보험 영업사원이 되어 돌아왔다. 나에게 연금보험과 변액보험을 설명했고, 나는 못 이기는 척 보험을 몇 개 가입해 주었다. 그 동기의 명함에는 "재무설계사"라는 직함이 적혀 있었다. 몇 년이 지난 뒤, 그 동기는 보험 일을 그만두고 다른 중견기업으로 이직을 했다고 했다.  명함의 매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사실 나도 그랬다.  명함이 나 자신이라 생각했으니, 그와 일치된 삶이 쭉 이어질 거라 생각했다.  하지민 떠나는 그 순간 모든 것들이 사라진다.  단지 명함에 적혀있는 내 이름과 직함은 잠깐의 순간에 주어진 자리였을 뿐 영원한 순간이 아니었다.  그 모든 순간이 사라지니, 명함이 약속했던 그 모든 것들은 연기와 같이 사라진다.

난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단지 떠날 날만을 기다리는 존재일 뿐이다.  그러던 그 순간 내 핸드폰이 짤게 울린다.  


“어디야?”


입사 동기들이 술이 거하게 취해 나에게 전화를 한다.  그 들은 아직 내 소식을 모르나 보다.  집에 있다고 하니, 잠시만 기다리라 하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시간 갈 줄 모른다.  난 언제쯤 올 거냐 전화를 하니 곧 온다 한다.  술이

거하게 취했는지, 핸드폰 밖으로는 노랫소리가 들어온다.  칠갑산이 흘러나오고 탬버린 소리가 들린다.  이제 끝날 모양이다.  그리고 한 시간 뒤 다시 연락 온다.  해장국 한 그릇이나 하자 한다.  주머니에 돈 5만 원을 챙긴다. 아무리 그만두더라도 술 얻어먹을 자존심은 없다.  

술 취한 동기들은 회사 손익이 어쩌고 하며 이야길 한다.  본부장이 어쩌고,  옆 팀장은 어쩌고 하며 내 근황은 물어보지 않는다.  그러다 팀장을 먼저 단 동기가 날 쳐다보더니 술잔을 던진다.


“형은 왜 이럴 때 무릎 한 번 꿇지 않아? 인생이 그리 만만해? “


위로의 자리도 아니고, 기회의 자리도 아니다.  내 구겨진 명함을 다시 한번 확인하러  온 자리였다.  난 웃으며 이야길 했지만, 내 멱살을 잡는 걸로 답을 한다.


“그래서? 웃음이 나와? “


왜? 내가 무릎을 꿇어야 속이 시원한가? 도대체 어떤 이야길 하고 싶었길래 날 찾아온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만, 이미 취한 동기들은 몇 시간 동안 내가 챙긴 5만원를 한 참 넘기며 술을 부어라 마신다.  답이 없다.  단지 그들은 나의 비굴한 모습, 내 명함이 구겨진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게 다였다.


무슨 일인지? 


힘들지 않은지? 


확인조차 없다.  


단지 그게 다였다.  


그 이후로 어떠한 연락도 없었다.  


그냥 나의 비참한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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