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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차별을 인정하라는 사회

by 별빛바람

별생각 없이 살았다 하더라도, 20대 시절 친구들이 들고 다니는 DSLR 카메라가 마냥 부러웠다. 사실 그 시절에 DSLR 아니 디지털카메라가 무엇인지 조차 모르던 시절이었으나, 한 친구는 참 신기한 디자인의 니콘 카메라를 들고 있었고, 한 친구는 지금 봐도 특이한 디자인의 소니 카메라를 들고 있었으니 그 시간이 벌써 20년 전이다. 그러다 한 친구가 캐논 DSLR 카메라를 들고 온다. 요리조리 카메라를 만지작 거리며 사진을 찍고, 깊게 숨을 호흡하며 사진을 찍는 모습이 참 특이했다. 자신은 사진을 찍을 때 필름으로 배웠기 때문에 사진 찍는 것을 침착하게 찍는다고 했다. 그 모습을 본 교수님은 그 친구가 전문가인 양 치켜세워줬으며, 학교 행사가 있을 때마다 그 친구의 카메라는 마치 행사의 도구인 양 쓰이곤 했다. 물론, 디지털카메라니 별도 필름 값이 들지 않고 - 단지 그 친구의 시간이 노력의 대가일 뿐이었으며 - 교수님 역시 그 노력의 대가를 자신의 손가락 몇 개로 (즉 학점으로 보상해 주는) 돌려주니 서로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을 거다. 그때 내 핸드폰에는 그 흔한 30만 화소 카메라도 없는 그냥 평범한 모노음의 흑백 단색 폰이었으니 어찌나 초라해 보였는지 모른다. 친구들과 셀카로 찰칵, 여행을 갔을 때 찍는 사진 한 장 찰칵. 가방 속에 들어가 있던 작은 카메라 혹은 커다란 카메라 가방에 에어 블로워, 렌즈 몇 개와 함께 들어가 있는 카메라 뭉치가 참 부럽기만 했다. 그때 집에 갔을 때 몇 년째 묶혀 있던 아버지의 카메라 구형 자동 필름 카메라 올림푸스 IZM - 300이 눈에 띄었다.


사진 1. 올림푸스 IZM-300. 자동 줌 기능이 있고, AF 기능이 있었지만, 현상할 때 사진은 언제나 흔들려 있었다.


아버지의 카메라는 장롱 속에 늘 묵혀있었다. 아주 어린 시절 아버지는 큰맘 먹고 수동 카메라가 어려웠던지 그 카메라를 넘기고 올림푸스 IZM-300으로 교환을 하셨다. 내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그 당시 아버지가 넘긴 카메라는 니콘 FM이 아니라면 미놀타 X-300이었을 것 같다. 물론 파편적인 기억이니 정확하진 않다. 은색 바디에 검은색 렌즈를 교체할 수 있었다는 단편적 기억이고, 조리개 값과 셔터 스피드, 초점을 다 직접 조정해야 하는 그 카메라가 사용하기 힘드니 아버지는 자동카메라로 바꾸셨단 기억 밖에 없다. 이 카메라는 언제나 우리 집의 영웅이었다. 여름휴가 때, 입학과 졸업식 때. 그리고 내가 중학생이 된 이후로는 소풍과 수학여행 때마다 항상 들고 다니던 카메라였으니 말이다. 당시 중학생도 사용하기 편한 카메라였으니 그때 찍은 사진은 수백 장이 넘을 것 같다. 친구들과의 추억,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의 귀여운 모습, 어머니와 아버지의 주무시던 모습 등등 재밌는 사진들을 많이 남기곤 했다. 물론, 아버지는 필름 값이 아깝다고 핀잔을 주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때만큼 사진에 열정이 있었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던가? 더 이상 필름 카메라에 대한 로망은 사라지고 자연스럽게 디지털카메라와 핸드폰에 달려있는 카메라가 카메라의 역할을 대신하게 된다. 당시 난 아버지의 카메라 한 대가 고작이었고, 최첨단 핸드폰에 뽀샤시한 사진이 안 돼 늘 마음에 걸렸다. 싸이월드에 올리던 흔한 사진 한 장 없었으니 말이다. 스캐너라도 있었으면 어땠을까? 그러나 그 당시의 스캐너는 100만 원이 넘는 고가였고, 디지털카메라도 100만 원 가까이 줘야 하는 돈이었으니 늘 마음속에 아쉬움을 달래며 넘어가야만 했다.

그러다 내 힘으로 처음 카메라를 산 건 오랜 장교 생활 후 퇴직금 모은 돈을 털어 산 Leica X1이었다. 라이카라는 브랜드가 뭔지? 그리고 라이카 총판 대리점인 반도카메라가 뭔지도 모르고 인터넷을 뒤져 딱 맞는 돈을 챙겨서 구입을 하였으니 세상 다 얻은 기분이었다. 항상 카메라를 들고 다녔으니 그 마음은 한 없이 행복했다. 그러다 인터넷에 라이카 동호회를 가입했으나 바디 가격이 천만 원이 훌쩍 넘고, 렌즈도 가장 저렴한 게 200 ~ 300만 원 수준이니 이건 도저히 내가 살 카메라가 아니라 생각하고 마음을 접기도 했다. 사실 그땐 그랬다. 그리고 지금의 와이프를 만나 데이트 때, 여행 때 열심히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다소 불편하긴 했지만 그래도 우리 부부의 연애시절 추억을 남긴 카메라니 더없이 소중했다. 기념일마다 그동안 찍은 사진들을 모아 사진첩을 만들기도 했으니 다시 돌아보면 참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사진 2. Leica X1 현재는 큰 딸아이 장난감과 같은 카메라가 되었다.



그 뒤 결혼을 하며 잠시 캐논의 EOS 60D과 EOS 200D 카메라를 사용하긴 하였지만, 내 손에서 카메라가 항상 떠나진 않았다. 나와 와이프의 행복한 결혼식, 부모님의 환갑잔치, 첫 째 아이의 태어난 순간 등등 그간 찍은 사진이 벌써 4 테라를 육박할 정도로 많은 사진을 찍었다. 심지어 캐논 카메라를 찍을 땐 Raw 파일을 사용하지도 않았으니 그간 찍은 사진은 어마어마했다. 특히 EOS 60D 같은 경우는 셔터 박스를 두 번이나 날려 먹었기 때문에 세 번째 셔터 박스로 교환을 하는 것보다 새거 사는 게 더 싸 부득이 EOS 200D으로 바꾸었으니 정말 카메라를 가지고 우리 가족의 모든 일상이 사진으로 남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도 마음 한편에는 라이카 카메라가 떠나질 않았다. 언젠간 성공하면 꼭 사야겠다고 생각한 라이카 M시리즈. 그간 열심히 살아온 삶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듯, 와이프는 나의 카메라에 대한 열정을 높이 인정해 주고 Leica M-E(typ240)을 사도록 허락해 준다. 24개월 무이자 할부 / 새 렌즈까지 사기엔 돈이 너무 부담되어 렌즈는 인터넷을 뒤져 중고로 Summicron-M 50/2.0 렌즈를 구입했다. 인터넷 배송으로 온 Leica M-E를 손에 쥔 순간은 어떘을까? 사실 잠도 못 잤다. 밤새도록 내 방에서 카메라를 만지작 거리며, 전원을 켜 보며 배터리를 넣어보며, 정성스럽게 보호 필름을 붙여가며 평생 함께 해야겠단 생각을 하니 정말 설레었다. 아니 그다음 날 잠을 못 잤어도 피곤하지 않았다. 항상 가방 한편에는 라이카 카메라가 있었다. 사진을 찍지 않더라도 행복했다. 길을 걷다가 사진을 찍어도 행복했다. 길가에 놓여있는 버려진 캔 하나, 소화기 하나 찍는데도 행복했다. 할부를 계속 갚아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지만 그 보다 마음이 행복해지니 참 좋았다.

그러다 몇 십 년 만에 다시 반도카메라를 방문한다. 점점 카메라에 대한 열정이 생기니 필름 사진도 다시 찍어보고 싶단 생각이 들어서다. 반도 카메라의 실장과 통화를 하고, 상담 날짜를 잡고 나의 카메라 스타일과 사진 스타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최신 디지털 바디가 아닌, 필름 바디를 산다고 하니 참 이상하게 볼 수 있겠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나 만의 필름 사진을 찍는 것도 하나의 행복이었으니 말이다. 마침 그땐 필름 바디를 주문하면 최소 3 ~ 6개월의 시간이 걸리던 시점이었으니, 그 시간이 얼마나 행복했을까? 카메라를 수령하러 가는 날 딸아이와 함께 충무로 반도 카메라를 찾아갔을 때의 기억은 지금도 잊히질 않는다.


사진 3. Leica MP, 지금 찍는 사진들 - 그리고 브런치에 올라오는 사진들이 모두 이 카메라를 사용한다.



라이카 카메라는 사실 명품이다. 판매 시스템 - 방식 / 고객 관리부터 시작하여 매장의 배치까지 전부 명품의 방식을 따른다. 카메라를 보여줄 때, 고객에게 물건을 팔 때도 매장 딜러(그들은 매니저 혹은 실장이라 부른다.) 들은 흰색 면장갑을 끼고 제품을 전달한다. 생수 한 병조차 에비앙 생수를 전달해 주는 시스템. 일반 카메라 매장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니, 그 시스템이 마음에 들어 고객들도 - 혹은 고객이 아닌 사람들도 한 번씩 방문을 하곤 한다. 당연히 그 시스템은 한국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 공통이니 큰 차이는 없다.

인터넷에서 주문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물건 하나를 포장할 때도 나름의 규칙과 방식에 의거해서 꼼꼼하게 포장하며, 마치 선물을 받는 느낌으로 택배를 받게 해 준다. 상품을 뜯을 때의 느낌은 어떤가? 라이카 특유 포장 방식은 박스를 열었을 때 선물이 펼쳐지는 느낌, 마치 종이 박스가 보석함을 담은 그 느낌. 그건 어떻게 설명할 수 없다. 그들은 뭔가 특별했다. 카메라 하나를 가지고도 이렇게 사람을 설레게 하고 - 행복하게 하는 느낌. 다소 불편한 카메라고, 다양한 기법을 연출할 수는 없지만, 카메라 하나를 가지고 행복함과 함께 사진과 함께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만들어주는 카메라니 정말 "카메라의 본질"에 충실하지 않을까?

벌써 10년도 더 된 이야기였지만, 내가 반도카메라에서 Lieca X1을 구입하러 갔을 땐 카메라가 뭔지 - 렌즈가 뭔지도 모르는 때였다. 당연히 화질과 조리개 값의 의미도 몰랐으니 어떤 카메라가 좋은지도 몰랐다. DSLR 카메라는 어느 종류가 있는지도 몰랐다. 그냥 무작정 충무로 반도카메라에 방문을 하였는데, 검은색 정장에 하얀 면 장갑을 낀 실장들의 모습. 어느 노 신사가 자신의 카메라를 보여주며 카메라에 대한 철학을 이야기했다. 그때 내 나이 30대였다. 이제 막 군대를 전역하고, 취업에 대한 고민이 있었을 때 무언가 내 머리를 치는 느낌이었다. 나도 60대가 넘었을 때 저렇게 여유를 가지며 행복하게 살 수 있으면 어떨까? 그 노 신사의 온화한 미소가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분명 그 노신사는 삶의 막바지에 자신이 늘 행복하게 간직했던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세상을 거닐고 다닐지도 모른다.

그때부터 마음 한편에 라이카가 자리했는지도 모른다. 이제 나도 라이카를 가져야겠단 생각. 취업 후 10년이 넘은 시점에 실현이 되었으니, 그 꿈은 실현되었고 늘 가방 속에는 라이카 카메라가 들어있었다. 이 카메라 덕분에 긍정적인 점도 있었다. 언제나 지하철 한 ~ 두 정거장 전에 내려 세상의 모든 것들을 유심히 관찰하는 재미. 그리고 그 모습들을 사진으로 찍어가는 재미. 그 재미가 삶의 활력소가 되었다. 당연히 고가 카메라에 렌즈를 들고 다니니 회사에서 습관적으로 마시던 술도 자제 하게 된다. 카메라 때문이라면 핑계일까?


사진 4. 이젠 화려한 사진보다는 이런 일상의 모습들을 찍는 게 행복하기만 하다.



유명한 작가 중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이란 작가가 있다. 그는 늘 Leica M3와 검은색으로 도색을 한 침동 Summicron 50/2 렌즈로 결정적 순간을 찍었다. 너무 오래된 렌즈라 지금과 같은 기교를 뽐낼 수는 없지만, 카메라와 렌즈만으로 브레송은 참으로 재미있는 사진들을 만들어냈다. 그러니 Summicron 50/2는 사진을 모르고 - 카메라를 모르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인터넷을 통해 자주 보곤 하였을 것이다. 참으로 특이한 렌즈. 최소 거리가 3.5m 정도라 가까이서 찍을 수도 없으니, 멀리서 관망해야지만 나오는 결정적 순간. 요즘 렌즈가 정말 좋아져서 최소거리 20cm까지도 찍을 수 있다고 하지만, 이 렌즈는 도무지 접사라는 의미의 사진을 찍을 수 없는 그런 렌즈였다.

그리고 50mm라는 화각의 한계는 우리 눈이 볼 수 있는 딱 그 정도의 시야각만을 표현할 수 있으니, 더 많은 정보와 내용을 담을 수도 없다. 단지, 우리 눈이 익숙하게 보이는 그 모습만을 사진으로 담을 수 있는 렌즈라니. 이미 렌즈가 나온 지 60년도 더 된 렌즈라 상태 좋은 렌즈가 있을 리 만무하며, 그 렌즈를 통해 사진을 찍었을 때 오래된 느낌이 팍팍 나지만, 난 그 사진이 좋았다. 그리고 그 사진을 만들기 위해 그 렌즈를 써보고 싶었다. 하지만 쉽사리 구할 수 있는 렌즈도 아니었다. 이미 오래된 렌즈이니 멀쩡한 렌즈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없었으며, 가격 또한 천차만별이었다. 그러다 반도 카메라에 중고 매물이 잇는 것을 발견하였다.


사진 5.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 그가 찍는 사진은 결정적 순간에만 나온다.



금요일 오전. 몇 달간 고민을 하다 큰맘 먹고 주문을 했다. 반도 카메라의 공식 중고 제품이니 제품에 대한 보증도 확실하고, 검수도 철저하게 한 렌즈라 다소 비쌀지라도 충분히 구입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다소 불편한 렌즈고 오래된 렌즈이지만 분명 멋진 사진이 나오리라 생각했다. 마침 내일은 토요일이니 오전에 일을 마무리하고 렌즈를 마운트 하여 사진을 들고 갈 생각을 하니 설레었다.

토요일 오전이 지난 시각. 받아 든 렌즈를 보니 깜짝 놀랐다. 이건 오픈 마켓에서 보낸 것인가? 아니면 당근에서 보낸 중고 렌즈인가 싶었다. 렌즈를 싼 파우치는 얼룩이 묻었으며 악취가 났으며, 박스는 어디 쓰레기통에서 주워온 그런 박스였다. 명품을 팔며, 자신들의 이름을 걸고 판매를 하는 "반도카메라"가 이런 식으로 물건을 보내왔다.



잠시 생각을 하다, 난 반도카메라에 전화를 했다. 내가 주문한 침동 렌즈의 상태가 이렇다고 하니, 전화를 받은 여성 매니저는 귀찮은 듯, 그게 무슨 문제냐는 식으로 이야길 한다. 당연히 내가 구입을 한 곳은 명품 매장이며, 비록 중고 렌즈라 할지라도(이미 단종된 지 50년은 더 된 렌즈라 새 제품을 구할 수도 없다.) 라이카의 이름을 걸고 판 렌즈인데 이딴 식으로 판매를 하는 게 말이 되냐고 했다.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처사다.

몇 년 전부터 그들의 판매 시스템은 바뀌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들은 카메라를 팔기보다 사람을 팔았다. 정을 팔았고, "라이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참새 방앗간과 같은 공간을 팔았다. 함께 카메라를 이야기하고, 필름의 종류에 대한 느낌을 나누며, 렌즈의 효과를 설명하며 - 어떤 렌즈가 좋은지 자신의 느낌을 이야기하는 그런 공간을 팔았다. 당연히, 그 고객은 언젠가 자신이 마음에 드는 모델이 나오면 구입을 하고, 그 느낌이 쌓여 그의 아들과 딸이 고객이 되는 그런 시스템을 팔아왔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몇 년 다루지 않았지만, 내가 만지고 행복해했던 라이카를 내 와이프에게 알려주었으며, 내 딸에게 알려주었다. 그래서 와이프를 위한 라이카 카메라 Leica TL2를 선물해 주었고, 딸에게는 나의 첫 라이카인 Leica X1을 물려주었다. 둘째 딸아이는 비록 라이카는 아니지만 Sony NEX-3을 쥐어주었으니, 우리 가족들은 여행을 갈 때마다 전부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행복한 가족이 되었다.

당연히 반도 카메라를 방문할 때마다 딸아이를 데려갔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조금씩 달라지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카메라를 보며 신기해하고, 자신의 눈높이에서 사진을 찍던 딸아이의 모습을 귀찮아하며 - 무슨 일로 왔냐고 되묻는 실장의 대답은 다소 불편하기도 했다. 언제나 그곳에서 정모를 하며, 참새 방앗간과 같았던 반도 카메라는 이제 벽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 같은 캐주얼 고객은 눈에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들은 해비 유저들만 챙기는 곳이 된다. 최신 기종을 사고, 언제나 몇 억 원어치의 렌즈를 사는 사람들에게 선뜻 선물로 자신들의 셔터 버튼을 선물해 주고, 여러 사은품은 그들의 몫이 된다. 나도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구매하는 고객이지만 그런 걸 바라지는 않지만 자신들의 중고를 구입했는데도 이런 말도 안 되는 대처를 받으니 할 말을 잃었다. 그래서 난 그들에게 따졌다. 엄연한 고객이고, 달라고 구걸하지도 - 깎아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이런 처사가 무엇이냐?


그들은 아무 생각 없이 이야기한다.


"마케팅이니까요."


그렇다. 그들의 마케팅은 나와 같이 추억을 만들고 - 행복을 만들며, 가족들과 함께 하고 싶은 가족사진작가들 보다는 자신들에게 몇 역씩 팔아주는 그런 고객이 더욱 소중하다 생각한 모양이다. 당연하게도 나에게 물건을 줄 때도 제대로 줄리 없으니 말이다. 참 씁쓸한 하루다. 이젠 반도 카메라가 아니라, 중고 렌즈는 개인 거래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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