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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그 들은 나에게 무릎 꿇길 강요했다.

1부

by 별빛바람

"오늘 두 시까지야. 남을지? 아니면 떠날지 결정해!"


찻 잔안에 담겨 있던 씁쓸한 차 한잔에는 여전히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지난 15년 동안 충성 했던 회사를 향해 최이사는 나에게 떠날 것을 강요했다. 만약 떠나지 않는다면, 어디로 가든 본인은 책임지지 않겠다 했다. 고작 두 달치 월급과 실업급여 정도를 가지고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갑자기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난 두 입 꾹 다물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조금만 더 여유를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갑자기 결정하라고 하는 건 저도 너무나 당황스럽습니다."


시계는 이제 막 아침 10시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초침은 아무리 붙잡으려 해도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으니, 그 끝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은 어떻게 붙잡을 수 없었다. 사정도 해 보고, 어떻게 할지 물어보기도 했지만, 여전히 묵묵부답이며 떠날 거냐? 남을 거냐? 에 대한 선택지 밖에 없었다. 그럼 이 사태를 만든 책임자는 왜 안 떠나는지? 그 큰 사고를 치고 3개월 정직 처분을 받았던 박 차장은 왜 안 떠나는지 이야길 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너나 잘하세요."였으니 난 할 말이 없었다.

박 차장은 참 여우 같았다. 그 큰 사고를 치고 3개월 넘게 무단결근을 했지만, 인사담당 유상무와 어떻게 이야기를 잘 풀었는지 3개월은 공가 처리 되었으며, 짧은 보고서 한 장으로 그 모든 기간이 "출장"으로 명시되며 종결되었다. 미래 트렌드를 밴치마킹 하기 위한 외부 업무라 했다.

그런 박 차장이 우리 팀으로 배치받은 건 두 달 전이었다. 얼마 전까지 전략 부서에 있던 박 차장은 언제나 성격이 다혈질이라 옆팀 이 과장과 서로 주먹다짐을 하는 게 수차례였고, 아랫사람 부리기를 노예 다루듯 하는 것도 예사였다. 당연히 박 차장이 사고를 친 건 누군가를 때려서 그런 게 아니었으니 더 이상 할 말은 없었다. 그에게 누군가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폭언을 퍼 붙는 건 일상이었으니 말이다. 단지 회사에서 소문은 업체에 뒷 돈을 받다 걸렸다 했다. 당연히 그 상황은 징계 위원회 회부 후 권고사직을 당해야 하지만, 그 권고사직은 엉뚱한 내가 받게 되었다. 박 차장은 우리 팀에 온 두 달 동은 열심히 최이사의 술 상무 노릇, 담배 친구 노릇을 하며 그의 마음을 쏙 빼앗았던 것이다. 그리고 항상 비굴하게 웃으며 늘 최이사 곁에 고개를 푹 숙이며 걸어가는 모습은 마치 황제 폐하 옆에 일거수일투족을 보필하는 내관과 같았으니 말이다.

박 차장이 아니라 내가 선택되었다는 것 자체가 나도 깜짝 놀랄 노릇이었다. 회사에 15년간 충성을 했고, 그만큼 업적도 있었으며, 한직을 마다하고 달려온 나에게 말이다. 그런 날 보고 당장 집에 가라 선택을 하라니. 도대체 날 보고 어떻게 하란 것인가?

조용히 밖으로 나와 눈을 감았다. 여전히 바람은 차고 매서웠지만, 봄바람은 내 코 끝을 간지럽혔다. 작년 이 맘 때만 하더라도 아이들과 신나게 뛰어놀곤 했는데, 이젠 그런 것도 사치일 것 같았다. 이제 뭘 해 먹고살아야 하는지? 담배 한 대도 사치고, 커피 한 잔도 사치다. 회사 구내식당 혹은 근처 식당의 순댓국집을 들르던 일상도 컵라면 하나로 때워야 하는 일상이 될 것만 같았다. 이젠 나에게 아무것도 안 남았다. 아니 모든 것을 다 놔두고 떠나라 한다. 그들은 나 보고 무릎 꿇고 자신들에게 항복하라 한다. 그리고 초침은 야속하게도 멈추지 않고 두 시를 향해 달려간다. 나에게 생각할 듬도, 고민할 틈도 주지 않은 채 말이다.

핸드폰을 열고 여기저기 전화번호를 눌러본다. 이 사람, 저 사람 다 찾아보고 전화를 눌러도 모두들 답이 같았다.


"에이. 설마?"


"잘 될 거야. 최이사한테 잘 이야기해봐."


혹은, 자기 어렵다고 푸념이나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작년엔 실적을 최대치로 달성을 했는데, 올해는 간신히 목표치 달성하는 것으로 마무리할 것 같다는 이야기는 그나마 애교였다. 연애가 잘 안 된다느니, 새로 생긴 애인이랑 잘 안 맞는 다느니 하는 이야기들. 이미 그 친구들은 다 결혼하고 와이프가 있고, 아이가 있는 친구들인데, 편안하게 회사에서 따박따박 월급 받고 살다 보니, 몰래 인센티브와 상여금, 연장근무 수당 같은 건 다른 통장에 넣어두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물론, 와이프와 회사 동료들에겐 아무리 인센티브와 상여금을 많이 받아도 여전히 힘들고 어려운 상황일 뿐이었다.

그러니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들을 생각도 없었다. 그러니 다른 팀에 내 몸을 의지할 상황도 되지 못했다. 나의 권고사직은 너무나 조용했고, 은밀했으며, 귓속말로 소곤거리듯 이야기가 진행되었을 뿐이다. 단지 내가 목소리를 크게 외치더라도 그 목소리는 여전히 저 하늘 혹은 땅 속을 향해 울려 퍼질 뿐, 그 누구도 내 목소리를 듣지도 들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막상 닥쳐오면 이 일이 나에게서만 끝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뻔히 알 텐데 말이다.

두 달도 전인가? 박 차장이 내가 있는 기획 1팀에 오기 전에 타 부서의 구조조정에 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공채 출신들을 칠 것인가 했지만, 그 팀의 담당은 공채 출신들을 제일 먼저 공격했다. 그리고, 가장 오래된 충성파 직원들을 먼저 공격했다. 이 친구들이 그만두는데, 너희들은 무사할 것 같으냐? 그러니 누구라도 빨리 먼저 나가는 게 승자라는 식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사팀 성과장과 최대리는 저승사자와 같았다. 눈에만 띄면 칼 춤을 추니 그는 우리에게 망나니였고, 저승사자였으며, 사탄이었다. 성과장은 이미 사내 커플로 결혼까지 했지만, 이제 막 20대 후반의 최대리와 마치 애인 사이인 듯 꼭 붙어 다니고 있으니, 마음속으론 저 둘이 불륜이 아닌가 소문내고 싶을 정도였다. 당연히 저승사자는 혼자 다니는 게 아니니, 2인 1조로 다녀야 하니 둘이 꼭 붙어 있는 건 당연한 모습이겠지만, 그래도 참 부러웠다. 우리는 죽을 맛이고, 천국과 지옥을 매일 오고 가는데, 저 둘은 뭐가 그리 행복하고 즐거운지 아침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쪽쪽 마시며 행복하게 오가고 있으니, 우리와는 다른 세상에 살아가는 듯했다.

이제 막 2시가 되었다. 최 사는 다시 나를 부르고 여전히 보챈다. 어떻게 할 것이냐? 그리고 마치 선심 쓰듯, 지방 서무직으로 잠시 피해 있으라 한다. 자존심 따위, 직급 따위는 벗어버리고, 돈 몇 푼 적게 받는다고 죽지 않으니, 애들 학교는 안 보내면 그만이란다. 그러니 그 회사를 선택하라고 선심 쓰듯 이야길 한다. 당연히 최이사는 자신이 생각하는 그림상 최대한 배려를 해 주었음에도 내가 거절했다는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일 거다. 당연히 그 자리는 내가 해 보지도 못했으며, 전해 생각도 못했던 자리다. 지방이라서가 아니라, 아무런 지식도 없는 그 자리를 나보고 가라는 건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그 자리는 싫습니다."


최이사는 쓴 침을 삼키며 잔에 따러진 시원한 물을 마시며 얼굴을 쳐다본다,.


"나 참... 답답하네. 이 사람. 거기서 좀 혼자 살면 어때서 그래? 어차피 둘이 맡벌이라면서? 아니면 그냥 그만둘 거야? 그만 두면 조간은 이미 들었지?"


이제 최이사는 나에게 싸인을 강요한다. 어서 떠나란 소리다. 난 싫다고 할지? 알았다고 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이미 며칠이나 이렇게 시달렸으니 말이다. 이미 회사에선 답이 정해져 있는데,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지 결론은 결정되었으니 중간 과정은 어찌 되든 똑같았다. 난 회사를 떠나야 한다. 50살에 떠나든, 60살에 떠나든. 결국 난 떠나게 되어있다. 동기들보다 무려 20년 일찍 떠날 뿐이었다. 그러니 내 선택은 어찌 되든 결과는 같았다.

최이사는 여전히 자신 이야길 한다. 아무리 그래도 가라는데 가라. 아니면 그만둘 수밖에 없다. 그리고 고작 팀장이니, 부장이니 직급은 다 소용없다. 그냥 회사에 오래 다니면 장땡이다. 그러니 지방에서라도 몇 달 잠시 쉬고 있으면 내가 일 시작할 때 다시 부를 테니 기다리고 있어라. 당연히 꿈만 같은 이야기다. 내가 이곳을 떠나는 순간. 그들의 머릿속에선 나라는 존재 자체를 잊어버렸을 테니 말이다.


"이사님. 그럼 제가 그곳으로 간다면 그때까지 저를 기억해 주실 건가요?"


최이사의 핸드폰에 저장된 4천 명의 사람들 중 난 고작 혼자일 뿐이니, 그 사람이 기억해야 할 4천 명의 사람 중 난 순번으로 따지면 4천 번째에 지나지 않으니... 4천 명에 대한 생각을 다 하고 나면 나를 생각해 줄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당연히 최 이사가 이야기하는 건 4천 번의 순서가 지나고 난 뒤에 챙겨주겠단 이야기가 된다. 물론, 새로운 사람이 생기게 되면 내 순번은 4천1번, 4천2번으로 점점 뒤로 밀려날 수 있다. 마치 박 차장과 같이 말이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런 파렴치한이 없다고 열변을 토하던 최이사는 어느 순간부터 우리 회사의 미래 주역인 박 차장이 없으면 회사의 미래는 없다는 식으로 이야길 했다. 당연히 그 둘은 저녁마다 얼큰하게 소주 한잔을 하며 시간을 보냈을 뿐이다. 내가 그 시간 동안 열심히 컴퓨터의 문서들을 정리하며 회사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동안, 최이사와 박 차장은 회사의 미래에 대해 온몸으로 고민하고 있었다.


"이사님. 그럼, 왜 박 차장은 살려주시는 거죠? 불과 얼마 전까진 회사의 재산을 훔친 횡령범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무단결근까지 했으니 회사의 규정을 위반한 사람이 되겠지요."


하지만 여전히 최이사는 나를 바라보며 눈가에 주름을 찡그리며 이야길 한다.


"그거랑 이거랑 뭔 상관이 있는데? 넌 너 앞가름이나 잘해. 괜히 애매하게 박 차장 이야기 하지 말고. 나중에 인사랑 이야기 할 때 박 차장 이야기를 하던가."


잠시 고민에 잠겼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니, 난 어찌해야 할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실내 금연이지만 어찌 되든 되겠지 싶단 생각으로 주머니에서 꺼낸 담배에 불을 붙이며 가슴속 깊이 쌓여 있는 한 숨을 크게 내쉬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크게 한 숨을 내 쉴 수 있을까? 그리고 한두 모금을 피운 뒤, 회사 카펫에 담배꽁초를 던지고 신발로 짓이겨 밟았다. 아마 카펫이 담뱃재로 살짝 그을렸던 거 탔을지 모른다. 내 알바 아니지만, 난 담배꽁초를 끄며 말한다.


"그럼 상싱적으로 똑바로 잘하는 애들을 남겨야지요. 저런 비열한 인간은 왜 남기는데요?"


그때 최이사도 마찬가지로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며 입을 열었다. 그는 비열한 웃음을 짓는다.


"그래도 박 차장은 무릎이라도 꿇었거든."


그 순간, 회사는 나에게 굴복하길 원하는 듯했다. 난 쓴웃음을 지으며 마저 이야기한다.


"그럼 권고사직으로 하지요. 대신, 위로금은 최소 3년 치 연봉과 6개월치 추가 급여 아니면 사인하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최이사는 날 보며 다시 말한다.


"자네 회사 사정 어려운 거 알면서 그래?"


"그 어려운 건 이사님 사정이죠. 전 그 정도는 받아야겠습니다.“


그 순간 최이사의 표정은 일그러지기 시작했지만, 다시 호탕하게 소리를 쳤다. 뭔가 재밌다는 듯이.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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