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할 수밖에 없던 이야기

by 별빛바람

그 시절은 원하는 만큼 다 할 수 있지는 않았다. 현재의 모니터 크기보다 작은 20인치 정도 되는 브라운관 텔레비전에 그나마 있으면 다행인 8Bit 혹은 16Bit 게임기가 전부였다. 텔레비전은 가족의 일상이었고, 삶의 일부분이었으니 서랍장 혹은 장롱 속에 고이 들어가 있던 게임기의 자리를 내어주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니 흔히 "게임"을 좋아한다 하는 친구들 조차 하루에 게임을 할 수 있는 시간은 많아야 1 ~ 2시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 게임기는 32Bit로 발전하고, 입으로 후후 불어서 끼워 넣던 게임팩이 CD로 바뀌게 되었지만, 가격은 100만 원 정도 하는 금액이었으니 평범한 집에서 쉽게 살 수 있는 물건은 아니었다. 물론, 그 게임기가 만들어진 일본에서는 30만 원 정도 하였던 것 같지만, 한국에선 유통과정의 마법 때문인지 용산 전자상가에서 100만 원이 넘는 금액으로 판매되었다. 그나마 그 돈이 있어도 없어서 못 파는 것들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끝없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러다 친한 친구 한 놈이 엄마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100만 원짜리 게임기를 선물 받았다고 전화가 왔었다. 새까만 CD가 트레이드 마크였던 그 게임기. 마침 전원을 켜니 새로운 차원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듯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난 게임기를 살 형편이 되질 못했다. 엄마에게 선뜻 이야길 하고 싶었지만 100만 원이란 큰돈은 우리 가족의 한 달 생활비였고, 그런 비싼 게임기는 사치라 생각될 정도로 비싼 게임기였다. 그래도 목표를 가지고 살아야겠다는 마음 가짐으로 국민학교 6학년이었던 나는 신문배달을 하면 1년 정도 후엔 나도 살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신문 보급소로 간다. 대부분 중학생이었지만, 나 혼자 초등학생이었기에 고작 100부 정도만 나에게 짊어줬다. 그 정도면 한 달에 6만 원 정도 주고, 앞으로 잘하면 10만 원까지 줄 수 있다는 지국장의 말에 너무나 설렐 수밖에 없었다. 이제 나도 내년 겨울즈음 되면 조금씩 용돈과 함께 모으면 최신 게임기를 가질 수 있다는 희망. 아침 일찍 일어나 자전거를 타고 열심히 신문을 던지는 길은 행복하기만 했다.

초등학생이 들기엔 신문 100부는 무겁기만 했다. 그래도 그 무게가 점점 가벼워질수록 오늘 할 일은 끝나게 되고, 그 무게가 조금씩 쌓이게 되면 내 희망은 조금씩 쌓여만 간다. 그렇지만 그 꿈은 며칠 안 돼 사라지게 된다. 며칠이 지난 시점. 엄마는 신문 보급소에 화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고, "왜?" 공부는 안 하고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는지에 대해 장장 몇 시간 동안 열변을 토한다. 그리고 그나마 한 달에 5천 원씩 받는 용돈도 빼앗기게 된다. 희망은 산산조각 난 순간이었다. 한 반에 10명 정도는 가지고 있던 최신식 게임기. 50명 정도 되는 반에 절반은 여자애들이었으니 최소 절반은 가지고 있던 게임기였는데, 그 나머지 친구들도 최신 32Bit 게임기는 아니더라도 16Bit 게임기를 가지고 있었으니, 게임기가 집에 없던 아이는 나 밖에 없었을 거다. 그 흔한 비디오도 없었다. 그러니 다른 친구들이 자주 보던 WWF 프로레슬링이나 후뢰시맨, 마스크맨 따위의 비디오 테이프. 최신 영화였던 터미네이터 2 뿐만 아니라, 남자아이들의 상상 속에만 존재하던 빨간 비디오테이프조차 볼 수 없었으니 집에서 보내는 시간은 심심할 따름이었다.

그 시절의 친구들은 그랬다. 오락실에서 하던 게임에 대한 이야기. 프로레슬링에 대한 이야기. 아니면 후뢰시맨 13편에서는 어떻게 악당을 물리쳤는지? 마스크맨의 새로운 비행기가 23편에 나오는지에 대한 이야기 등등 끊임없는 주제에 나는 낄 수가 없었다. 당연히 어느 날 갑자기 웅성 되며 누구네 집 삼촌이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비디오 테이프를 몇 개 가지고 있는데 마침 걔네 집에는 아무도 없으니 모여서 함께 가자는 이야기에도 낄 수 없었다. 그러니 내 머릿속에는 늘 상상 속의 세상이 펼쳐질 수밖에 없었다.

이 글은 게임기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어린 시절 게임의 제목은 많이 보긴 하였지만 실제 그 게임이 어떤 내용이고 어떻게 플레이를 하는지도 몰랐다. 단지 내 상상 속에 있을 뿐이었다. 그 상상 속에서 한 번쯤 이런 상상을 해 보기도 했다.


주인공은 평범한 중학교 남자아이다.

그 남자아이는 게임 속에서 이것저것 다 할 수 있다.

친구를 만날 수도 있고, 함께 놀 수도 있다.

학교에서 수업도 들을 수 있다.

심지어 동네 오락실에 가면 게임도 할 수 있다.

실행이 가능한 게임 중에는 "스트리트 파이터 2"도 있고, "파이널 파이터"도 있었다.

아니... 오락실에 있는 모든 게임을 다 할 수 있었다.

이게 하나의 게임에서 실행되는 이야기였다.


요즘은 그 방식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너무나 허황된 상상이며 꿈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오락실에서는 100 mega(byte가 아닌 bit의 게임)가 넘는 게임이라고 전원을 켰을 때 열심히 로고를 돌리던 시절이었으니, 이러한 어마어마 한 게임을 만들기 위해서는 1 Giga(이건 byte다) 이상의 용량이 필요했으니 정말 상상 속의 세상이었고, 꿈속에서만 펼쳐질 세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헌책방에 들른다. 전과나 문제집을 새 책으로 사줄 형편이 안되니 어머니는 내 손을 붙잡고 문제집이나 전과가 필요하면 헌책방에 들러 사주시곤 했다. 어차피 한 학기만 볼 책이고, 한 번만 풀면 끝날 책인데 그걸 굳이 비싼 돈 주고 살 필요 없다 생각하셨던 엄마의 알뜰함 때문이었을까? 내가 보던 전과나 문제집은 늘 답이 적혀있었고, 밑줄이 그어져 있었으며, 채점이 되어 있었다. 당연히 내 실력이 아닌 다른 이의 결과물을 가지고 나는 평가를 받았고 그걸로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지만, 마침 그날은 너무나 행복한 하루 중 하나였다. 마침 헌책방 한편에 "게임챔프"라는 잡지가 한 권 있었다. 이미 몇 년 전 잡지였고 누군가 헌 책방에 팔았을 잡지. 난 엄마를 졸라 500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그 잡지를 사서 집에 갔다. 마침 그날 산 전과나 문제집은 뒷전이었고 게임챔프를 읽기 위해 마음 졸여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마침 그날 눈앞에 펼쳐진 광고 그림 하나. 빨간 머리의 기사가 칼을 들고 서 있는 그 그림에 푹 빠질 수밖에 없었다. "환상의 사운드"와 "아름다운 그래픽"이라 강조하며, "감동의 스토리"라 강조하던 그 게임에 대한 내용은 고작 3줄의 줄거리가 전부 다였지만, 내 머릿속에는 이미 어떤 음악이 나올까? 어떤 적이 나올까? 혹시 어떤 마법을 쓰게 될 것인가?라는 상상이 머릿속을 막 채우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 게임을 하기 위해서는 게임기를 사야 하고, 게임팩을 사야 했다. 게임팩도 10만 원이 넘는 금액이었으니 내 용돈으로는 절대 살 수 없는 그 게임을 바라보며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생각들로 게임의 내용을 채우기 시작했다. 게임의 버튼은 몇 개이고, 어떻게 누르면 어떤 기술이 사용되는지? 마법은 어떻게 써야 하는지, 마지막 마왕은 어떤 이유로 세상을 지배하려 했는지 달력 뒷 면에서 시작한 내용은 다 쓴 스케치북으로, 그리고 종이 박스로... 그리고 마지막은 노트 뒤편으로 까지 이동해 가며 그 내용을 채우기 시작했다. 숲과 들판을 지나고 커다란 성을 지나게 될 거야. 그리고 마왕성을 가기 전에 수많은 괴물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때 음악은 어떤 음악일까? 락 사운드처럼 빠른 템포가 펼쳐지겠지만, 주인공은 분명 그 싸움에서 지게 될 거고 힘들게 그곳을 빠져나가게 될 거야......

이 이야기는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였고, 게임이었다. 그 게임은 나 혼자만 깰 수 있는 게임이었지만, 반대로 나 혼자밖에 못하는 게임이었다. 어떠한 게임기로도 실행할 수 없지만, 분명 언젠가는 어떠한 게임기로도 실행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단지 500원짜리 헌 잡지에서 시작된 내용이었지만, 그 내용은 조금씩 넓어져 그림에서 시작된 내용이 이젠 조금씩 글이 되고, 대화가 되며 이야기가 이어져만 갔다. 그리고 그 글이 나의 첫 번째 글이 되었다. 그러니 부족하게 시작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난 그 게임을 해본 적도 없고, 스토리도 고작 광고로 몇 줄 읽은 게 다였으니 어떤 내용이 펼쳐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한참 글을 쓰다 친한 친구에게 그 내용을 보여준다. 그 친구는 100만 원짜리 32Bit 게임기뿐만 아니라 16Bit 게임기도 몇 개를 가지고 있었으니 게임에 대한 내용이라면 누구보다 잘 아는 친구였으니 분명 읽어주면서 그 내용에 대해 알려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친구는 내용을 한 번 읽고 나더니 "야! 소설 쓰냐?"라는 말만 할 뿐이다. 당연히 그 게임을 해본 적도 없고, 어떤 내용인지 모르니 게임과는 다른 내용과 다른 등장인물이 나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제목은 정말 유명한 게임의 제목이었으니 기대할 수 있는 내용에서 벗어났을 때의 허탈함과 비웃음은 말할 필요도 없는 내용일 것이다. 그 시절은 그랬다. 무언가 좀 더 많이 아는 것이 힘이었고, 한 번 해보았다는 경험, 보았다는 경험 자체가 권력이었던 시절이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그 분야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고, 그 분야에 대한 고민과 정보가 필요하지만 요즘은 손쉽게 인터넷 몇 번 뒤지고 - 유튜브 동영상 몇 개 보면 대략적인 내용은 파악할 수 있으니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게임의 줄거리가 필요하다면 검색 몇 번만 하면 10분 정도로 내용이 요약되어 있으니 굳이 게임을 하려고 50 ~ 60시간을 투자할 필요도 없었다. 단지 검색만 잘하면 될 뿐이다. 하지만, 그 시절은 그걸 해 보았다는 것 - 그 내용을 안다는 것 자체가 힘이 될 수밖에 없는 시절이었다. 그러니 그 어떤 문화 채널보다 많은 돈이 필요한 "게임"에 대한 동경은... 아니 "게임기"에 대한 동경은 그 시절 남자아이들에게서는 누구나 경험했을 추억이었고, 하나의 에피소드였을 것이다.

분명 반 친구 누군가는 게임기를 가지고 있었고, 또 반 친구 누군가는 최신 게임기를 가지고 있었던 시절이었으며, 또 다른 반 친구 누군가는 게임 잡지를 수집하며 정보를 정확하게 파악하던 그 시절. 낙서를 한 줄 하는 내용도, 끄적이던 글의 내용조차도 다 정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그 당시의 정보는 다 돈이었다. 헌책을 사던, 중고 게임기를 사던, 중고 게임팩을 빌려서 해 보던 돈이 있어야지만 가능했던 시절이었으니 늘 돈이 부족했던 나의 정보는 "내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것들이고, 그 내용을 듣는 그 순간 "재밌는 이야기를 만드는" 이야기꾼이 아니라 "거짓말쟁이"라는 타이틀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 당연히 정확한 정보가 아닌 부족한 그림 한 장. 줄거리 3 ~ 4줄에 의존했던 결과가 아닌가 싶다.

그러니 나의 첫 글은 성공을 할 수 없는 글이었다. 순전히 내 머릿속의 상상 속에 의존하는 내용이었고, 친구들의 머릿속에는 이미 정해진 내용이 펼쳐지길 바랐으니 독자의 니즈를 충족할 수 없는 글이 완성될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멈추지 않고 글을 썼다. 이야기꾼이 아닌 거짓말쟁이가 된다 하더라도 크게 중요하진 않았다. 단지 내가 상상하던 이야기들을 연필로 꾹꾹 눌러가며 쓰는 그 행동 자체가 나에게는 게임을 한 판 했을 때의 상황과 같았고, 재미있는 비디오를 보았을 때의 상황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 내용이 워낙 뒤직박 죽이고 혼란스러웠던 내용들이니 난 그 내용을 보여주기가 너무 부끄러워 단지 "내 노트" 뒤편에 조심이 숨어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 글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순간은 너무나 순식간이었고 다시 어둠 속에 숨은 순간도 순식간이었다. 쉬는 시간에 열심히 연필로 끄적이던 내 모습을 바라보던 부반장이 궁금해서 읽게 되어 그 순간이 시작이 되었고, 마찬가지로 쉬는 시간에 연필로 끄적이던 내 모습을 바라보더니 이 세상 밖으로 사라지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선생님은 정말 글자 한 글자도 이어 붙이지 못하도록 3번... 4번... 5번... 아니 그 이상 찍어버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쓸데없는 짓만 한다." "공부도 못하는 게 이런 것들만 쓴다."라는 말을 함께 했을 뿐이다. 이 세상의 내용이 아닌 마법을 쓰는 기사가 세상을 구하는 이야기라는 것 자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랬던 것인지 모를 뿐이다. 그 선생님은 늘 내가 읽는 책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라는 책을 보며 입 꼬리를 들며 "네가 그러면 그렇지."라는 말로 대신했고, "오즈의 마법사"라는 책을 보는 순간 내 책을 갈기갈기 찢으려 했으나 도서관의 책인지라 모서리로 두 세대 때리고 말았을 뿐이다. 서울대 출신의 국어 선생님이시라 그랬던 건지? 아직 결혼을 하지 못한 이제 막 40을 갓넘긴 노처녀 선생님의 섬세함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내가 쓴 글이 너무 허황된 내용이라 그랬는지 알 길은 없다. 분명 그 이야기는 부족한 이야기였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가 아닌 "블레이드 러너"라는 영화를 보고 썼어야 했고, "오즈의 마법사"라는 책이 아닌 이제 막 천연색을 보여주던 멋진 영화의 "Over the Rainbow"의 한 장면을 넣어주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나의 작품은 쓰레기들이나 보는 하찮은 책이 될 수밖에 없었고, 또 하나의 작품은 "명작"의 반열에 오를 그런 책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집에 VTR이 없으니 그 영화의 장면을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글 쓰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 단지 내가 글을 쓰는 소재는 도서관에 있었고, 도서 대여점에 있었다. 단돈 200원이면 만화책을 빌려볼 수 있었고, 단돈 500원이면 소설책을 빌려볼 수 있었다. "퇴마록"이란 소설은 내가 써보고 싶었던 내용이었고 "드래건라자"는 내가 상상조차 하지 못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쥐라기 공원"의 빽빽한 글자는 한 번 읽으면 빠져들 수밖에 없었고, "돌연변이"도 재미나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물론, 그 책을 빌리고 읽을 수 있는 시간은 고작 3박 4일이었으니 내용을 끝까지 읽을 수도 없었고, 여러 권의 책을 빌려가며 읽을 수도 없어 고작 한 두 권의 내용을 가지고 뒤의 내용을 상상하는 게 일상이었다. 그리고 그 상상은 조금씩 조금씩 확장해 가며 글을 쓰는 기회가 되었고, 그 글이 나의 친구였으며, 나의 선생님이 되었다.


그러다... 우연히 누군가 버린 책을 줍게 된다. GW-BASIC 1.0이라 적힌 검은색 책. 집에 컴퓨터가 없었지만 참 신기한 책이라 집어 들고 집에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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