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3학년 시절 선생님은 나의 진로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던 거 같다. 그래서, 너는 "해커" 같은 놈이 될 거니 상고(그 당시 정보산업 고등학교로 개편됨)에나 가라고 했다. 그 시절은 그랬다. 고등학교 입학시험이 폐지가 되고, 많은 학생들이 인문계 고등학교로 몰리던 시기였다. 그리고 상고나 공고와 같은 실업계 고등학교에 대한 선호도가 많이 사라지던 시절이었다. 중학교 3학년 중간고사가 끝난 시점부터, 나름 고등학교 선배라는 분들이 반을 찾아와서 자신의 학교에 대해 홍보를 하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홍보를 하던 선배들은 기운이 빠진 모습이었다. 마치 억지로 끌려 나온 듯.
"우리 학교는 말이지..."
라고 이야기 했을 때 혹했던 친구들도 몇몇 있었다. 한 친구는 무난히 인문계에 갈 수 있었으나, 선생님은 "너네 학원 보낼 돈도 없고, 등록금 낼 돈도 없으니 차라리 상고에 가서 장학금이나 받고 다녀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그 말에 감동을 받았다. 누나 한 명과 단 둘이 살던 친구였다. 부모님은 진작에 저 먼 곳으로 가신 터였고, 누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조무사 공부를 해서 간호조무사로 병원에 일한 지 몇 년이 된 터였다. 누나 혼자 버는 작은 돈으로는 남동생의 등록금과 학원비 보태기도 빠듯했지만, 그래도 누나는 동생이 좋은 학교를 가고, 좋은 대학을 가길 기대했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네가 누나 등골이나 뽑아 먹을래?"라는 말을 하며, 친구를 설득했다. 고양이란 별명을 가진 친구는 그렇게 살쾡이가 되어갔다.
또 한 친구는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던 친구였으나, 선생님이 "거기 가면 공부 안 해도 돼. 그냥 놀아도 반에서 중간이상은 갈 거야."라는 말에 감동을 받아 상고에 진학한다. 마치 선생님은 자신의 할당을 채워야 하는 듯, 목표치를 채워야지만 앞으로 나아갈 자신의 방향성을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 열심히 설득하기 바빴다. 하지만, 몇몇 친구들은 이미 선생님의 지도아래 진학 결정이 마무리된 후였다.
"그래... 반장. 이왕이면 외고에 갈 때 독일어를 배워보는 게 어떨까?"
"부반장 너는 일본 만화를 좋아하니까 일본어를 공부해 보렴."
"너는 과학고가 괜찮을 거 같아."
마치 미래를 보는 눈을 가진 것처럼 선생님은 그 친구의 미래를 결정해 주었고, 그 미래는 마치 선생님의 미래인 듯. 미래는 이미 정해진 듯 나와 내 친구들 혹은 다른 친구들의 길은 정해진 상태였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났을까? 그 선생님은 자신의 적성을 찾았는지 20여 년간의 과목 담당 선생님에서 진학 진로 담당 선생님으로 바꾸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이미 그 당시부터 적성을 찾아갔던 모양이다. 그리고 사람의 미래는 결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미래"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선생님의 잦은 권유에도 불구하고 난 인문계로 진학을 했다. 선생님의 격노한 표정을 바라보곤 했지만, 그게 다였다.
"선생님. 어차피 상고를 가나, 인문계를 가나 대학 못 가는 게 똑같다면, 그냥 인문계 가겠습니다."
난 대학을 목표로 살고 싶진 않았다. 그냥 조용히 글을 쓸 수 있는 학교에 다니고 싶었다. 조용히 구석에 앉아서 보이는 듯, 안 보이는 듯 글을 쓰고 - 이야기를 쓰는 그런 학교를 다니고 싶었다. 그러기에는 실업계 학교보다는 인문계 학교가 맞을 듯했다. 야간 자율학습 시간 조용히 노트에 끄적이다 보면 공부하는 듯 보일 것 같았다. 그게 다였다. 내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내 세상에서 나의 친구들과 내가 갖고 싶었던 게임기를 마음껏 가지고 놀고 싶었다. 그리고 영웅이 되고 싶었다. 마왕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세상을 구하고 싶었다. 멋진 전투기를 타고 우주로 날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조용히 구석에 숨어 나의 노트와 연필, 샤프, 볼펜 몇 자루만 있으면 될 뿐이었다.
선생님은 나의 목표에 화답을 하는 듯, 있는 힘껏 따귀를 때렸다. 40을 넘긴 여 선생님은 육아에 지쳤는지, 6살 딸아이를 돌보느라 밤을 새웠는지, 지난번보다는 힘이 빠진 듯했다. 그리고 출석부로 내 머리를 몇 번 때린다. 그리고 선생님은 나의 고집에 포기하는 듯 내 목표를 지지해 주기로 마음먹었나 보다.
"너 같은 새끼는 평생 편의점 알바라도 하면 다행이라 생각해라. 공사장 막노동이나 할 새끼니까 네 마음대로 해라."
선생님의 격렬한 지지에 난 무난히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문계 고등학교는 내가 생각하던 것과 달랐다. 교문 앞에 선생님은 복장 불량, 두발 불량 등등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이 발견되면 엎드리게 하고 커다란 하키채로 엉덩이를 두들겨주곤 했다. 아니, 그전에 선배들은 이쁜 후배들이 오길 기다렸다가 주머니에 들어있는 동전이며 지폐며 식권이며 필요한 물건들을 "빌려줘라."라고 했다. 어쩔 땐 마음에 드는 가방이나 있을 땐 가방을 대신 들어주겠다고 했다. 사이즈가 맞는 교복이라면 교복도 바꿔주곤 했다. 운동화는 덤이었다. 육교 앞에서 선배들은 부가가치가 있는 활동을 했고, 나도 종종 그 선배들에게 동전이나 지폐, 가방 속에 있는 책들을 빌려주곤 했다.
하지만, 그 선배들은 자신이 몇 반이고 이름이 누구인지 이야기해 주질 않았다. 철저히 신용에 의해 물건을 빌려달라 이야기했지만, 그 신용을 증명할 행위를 이행하지 않았으니 철저한 무기명 신용거래에 의한 만남이었다. 다행히 그 선배들은 거래 장소를 변경하지 않았으니, 난 몇 번 선배들과 무기명 신용거래를 체결한 이후 미리 한 두 정거장 전에 내려 학교까지 10분을 더 걸어가곤 했다. 몇 분 더 걸어가야 했지만 다행히 얻을 수 있는 것은 많았다. 걸어가는 그곳에는 엄마와 종종 들르던 헌책방이 있었다. 그 헌책방 사장님은 묘한 취미가 있었는지 눈에 잘 띄는 곳에 빨간 책들을 걸어두곤 했다. 뜨거운 혈기를 가진 중학생 친구들이나 고등학생 친구들은 곁눈질로 그곳을 둘러보곤 했다. 가슴을 환히 드러내고 잘록한 허리에 배꼽을 드러낸 금발의 누님들 사진을 보기 위해 친구들은 한 번씩 눈을 돌리곤 했다. 나도 그랬다. 학교로 향하는 10분의 걸음걸이가 있는 동안 조금씩 조금씩 눈을 힐끔거리며 누님들의 사진을 바라보곤 했다. 그래도 7시 30분까지 학교에 등교를 해야 했으니 오랫동안 감상할 수는 없었다. 7시 25분부터 선생님은 하키채를 들고 있는 수문장 한 명이 아닌 당구채를 들고 있는 또 한 명의 선생님으로 충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지각을 하면 선생님은 엎드린 상태에서 엉덩이만 어루만져 주지 않았다. 쪼그리고 앉아 두 손은 귀를 잡은 상태에서 우리는 오리가 되어 운동장을 여러 번 돈 후에 화장실 청소라는 특혜를 받으며 교실로 향하곤 했다. 오리가 되면 귀엽게 보일 수 있겠지만, 하루종일 저리는 다리과 후들거림 때문에 하루가 졸리곤 했다. 그러면 하루종일 글을 쓸 수 없었다. 아니, 내가 만든 세계로 떠날 수 없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7시 20분 전에는 교실에 착석해야 했다.
고등학교 1학년의 삶은 선배와의 만남이 연속이었다. 점심시간 때마다 "서클"가입을 권유하는 선배들과 아무 생각 없이 "서클"에 가입을 하고 나니 엎드려 뻗쳐와 구타가 연속이었다. 이름은 중요하지 않았다. "과학반", "문예창작반", "풍물패", "밴드" 등등 이름은 단지 모임을 만들기 위한 구실이었다. 우락부락한 선배가 "문예창작반"에 대해 한참 설명하고 있을 때, 난 그곳에서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란 희망으로 들어갔으나, 그 선배는 올해가 97년이니 운동장을 97바퀴를 돌아야 한다 이야길 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1학년인 친구들에게 종이컵에 소주를 따라 마시게 했으니 그게 입단식이라 했다.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던 선배들. 옆에서 새우깡에 앳되보이는 옆 학교 여상 "미술" 서클 친구들과 함께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그 순간. 그날이 "대면식"이라는 행사였다 했다. 뚱하고, 마침 그때 함께 이야기하던 여상 친구들은 열심히 "파이팅"을 외친다. 97바퀴를 돌다 지쳐 구토를 하는 친구들을 향해 응원의 메시지를 이야기한다. 간신히 97바퀴를 돌고 나니 마음에 드는 친구에게 담배 한 대를 권하는 모습이 참 아름다워 보이곤 했다. 하지만 난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하기 싫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보단 나 만의 세계가 좋았던 그때였다. 물론, 쉽게 떠나진 못했다. 나가려면 엎드려 뻗친 상태에서 97대를 맞아야 한다는 법칙이 있었기 때문에 쉽게 나가질 못했다.
서클 생활은 학교 수업이 종료된 뒤 서클실 청소라는 업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중학생 시절 화장실 청소와 교실청소로 단련이 되었기 때문에 그다지 힘들진 않았지만, 서클실 청소는 마치 1학년의 의무이자 책임이라는 듯 힘들게 시작된 업무의 시작이기도 했다. 그리고 선배들의 격려와 조언이라는 구타가 있었고, "문예창작"과 거리가 먼 이야기를 들은 뒤 집으로 귀가를 하는 게 일상이었다. 난 글이 쓰고 싶었지만, "문예창작"서클에서 많은 것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2학년 선배에게 용기를 내어 이야길 했다.
"선배님. 저 글 쓰고 싶습니다."
서클의 이름은 단지 구실이었다. 문예창작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문예지에 글을 내 본 적이 없었다. 문예창작과였지만, 문예지를 만들지도 않았고, 옆에 있는 여학교에 글을 찬조해주지도 않았다. 그냥 문예창작이라는 이름은 구실이었다. 축제 때 그나마 하는 일은 도화지에 유명한 시인의 시를 매직으로 써서 베낄 뿐이었다. 서클의 이름은 단지 구실이었다는 것을 선배는 알고 있었다. 단지 선후배 관계라는 모임의 명분이 필요했고, 문예창작 서클을 담당하는 선생님은 막상 문예창작에 관심이 없는 국어 선생님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저 모임의 구실일 뿐이었고, 그 모임은 어느 모임이나 마찬가지로 선후배의 끈끈한 관계를 만들기 위한 구실이며 명분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난 별종이었다. 그런 문예창작 서클에서 유일하게 글을 쓰고 싶은 놈이었다.
선배는 내 모습을 바라보며 짧은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유일하게 네가 이 서클이 생긴 이후 처음으로 글 쓰고 싶다고 한 놈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선배는 서클을 떠나라 했다. 정말 글을 쓰고 싶으면 떠나라 했다. 그 뒤 난 "별종"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서클이 뭔지도 모르고, 유일하게 글을 쓰고 싶었던 놈. 글 쓰는 게 행복하다 했던 놈. 그게 나의 모습이었다.
글을 쓰기 위해 서클에 들어가고, 글을 쓸 수 없어 서클에 나갔던 놈. 조금만 더 버티고 선배들과의 네트워크를 잘 만들어갔다면 편한 학교생활을 할 수 있었겠지만 그것을 포기 한 놈. 아마 그 순간부터 학교에선 나 혼자만의 세상이 펼쳐질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별 다른 생각은 없었다. 나 혼자 이것저것 생각해 보고, 글을 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이미 친구들은 많이 있었다. 같이 여행을 떠나고 저 먼 우주를 함께 항해할 수 있는 동료가 있었으니 외롭지 않았다.
"야! 별종"
교실 뒤 편에서 음악을 듣다 글을 쓰는 모습을 보면 한 번씩 들리는 소리였다. 언제나 내 귀에는 파나소닉의 CD플레이어와 주황색 이어폰이 끼워져 있었다. 때론 영화 OST일 때도 있었고, Michael Learns To Rock의 음악이 흘러나올 때도 있었다. 마냥 그게 좋았다. 체육시간도 억지로 뛰어다니기보단, 선생님께 이야기해서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구석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언제나 흘러나오는 음악과 노트 한 권, 샤프 한 자루, 볼펜 한 자루만 있으면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친구들이 있었던지, 별종이라 부르며 못마땅해하는 친구들은 내 노트를 뺏어가 보기도 하고 CD플레이어를 뺏어가기도 했다.
그래도 엄마가 없는 돈 모아 사준 거라 달라고 이야길 하면, "새끼야. 치사하고 더러워서 안 가져가."라 하는 게 일상이었다. 그랬다. 다른 건 빼앗겨도 상관없었으나, CD플레이어와 노트만큼은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너무나 소중한 것들이었다. 때론 내 노트가 구겨지기도 하고, 누군가 찢어버리기도 했지만, 난 그 노트를 다시 잘 챙겨두었다. 그리고 나의 소중한 노트들이라 생각하고 챙겨두곤 했다.
그 외 시간에는 책을 읽는 것이 나의 일상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내가 읽는 책들을 그다지 반기지 않는 눈치였다. 명문 S대를 나온 노처녀 국어 선생님은 내가 읽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라는 책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너 같은 놈이 그러면 그렇지."라는 말로 대신하곤 했다. 사실 나도 휴고상이 어떤 권위가 있는지는 몰랐다. 워낙 유명한 책이었고, 이 책을 기반으로 만든 영화 "블레이드러너"가 워낙 유명했기 때문에 읽어보던 참이었다. 우연찮게 헌책방에 눈에 띄어 천 원이란 거금을 들여 산 책이었다. 쉬운 책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어 읽어보니 재미가 없진 않았던 책이었다. 하지만 노처녀 국어 선생님은 이런 모습이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별종이었던 난 무난히 고1 / 고2 생활을 보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그것들이 재밌는 나의 삶이었다. 이땐 집에 486DX 컴퓨터가 한 대 있었고, 두루넷이라는 인터넷도 설치가 되어 종종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데 재미를 들이던 참이었다. 그러니 딱히 학교 생활에서 무슨 재미가 있었는지는 기억에 나질 않는다. 그냥저냥 지냈을 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고3이 되었을 때였다.
대학 입학을 위해 "논술" 시험 준비가 필요했기에, 학교에서는 형식적이지만 국어과목의 세부 과목이었던 "작문"과목을 활용하여 논술 수업을 진행하고자 했다. 다른 친구들은 재미없어했지만, 유일하게 글 쓰는 수업이라 그런지 너무 행복했다. 뻔한 논술 주제에 대한 글을 쓰는 거였지만 그것만으로도 행복한 하루가 아닌가 싶었다. 물론, 수업자체가 인기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선생님은 남학생들의 우상이었다. 30대 초반 여선생님의 미모 덕분이었을까? 결혼 한지 몇 년 된 선생님이었지만, 항상 짙은 화장에 화려한 옷, 마치 미스코리아와 같았던 머리 스타일을 하고 있으니 반 친구들 사이에서는 상상 속의 연인이었고,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마치 그 선생님의 남편이 경쟁상대인양 욕을 하던 친구들도 있었다. 그러니 어떤 친구들에게서는 선생님이 좋아 그 수업을 기다리곤 했고, 어떤 친구들에게선 글이 좋아 그 수업을 기다리곤 했으니 모두에게 공평한 수업이었다. 마침 다른 반 작문 선생님은 50대 골초 아저씨가 수업을 하시니 나름 우리 반을 부러워하는 친구들도 많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작문 선생님은 나를 조용히 불렀다. 별 다른 내용은 아니고, 내가 써서 낸 논술 내용이 마음에 든다는 이야기였다.
"혹시 학원 다니니?"
성적도 중하위권이라 대학을 준비할 마음 자체를 갖지 않았던 터라 논술 학원 자체는 나에게 무의미하다고 이야길 했다. 그저 야간자율학습시간에 뒤서 조용히 글 쓰는 게 행복하다고 했다. 그 이야길 듣는 순간, 작문 선생님은 "아... 네가 그 유명한 친구구나."라고 이야길 했다. 그랬다. 학교 생활이 편해질 수 있는 서클을 마다하고, 고등학교 시절 내내 별종이라 불렀던 친구. 선생님들은 이미 내 존재를 알았지만, 크게 사고를 치는 것도 아니고 학교 수업에 방해되는 것도 아니며, 어차피 적당한 대학에 들어간 뒤 적당히 살 것 같은 미래가 보이는 친구였으니 큰 관심을 쏟을 필요도 없었던 적당한 학생 중 하나였던지라 이렇게 교무실에서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 자체가 너무나 행복할 뿐이었다.
글 쓰는 걸 좋아하지만, 딱히 배워본 적은 없던지라 선생님은 나에게 "책"을 많이 읽어볼 것을 권유했다. 그리고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 소설책도 읽고, 동화책도 읽고, 과학책도 읽었다. 내가 좋아하는 우주와 관련된 별자리 이야기도 읽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포함되었던 "어린 왕자"를 처음 읽는 순간 머리를 세게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난 그 내용을 중심으로 글로 쓰기 시작했다. 논술 주제와는 상관없이, 마침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대나무가 우거졌던 전라도 담양을 상상하며 글을 써 갔다.
마침 어린 왕자는 다시 별을 잡아 타고 여행을 하던 중 우연히 들르게 된 담양의 대나무 숲에서 조용히 글을 쓰고 있던 나를 만나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그 순간. 내가 생각했던 글은 작은 상자의 토실토실한 양보다 더 많은 것들을 만들어 줄 수 있다고 어린 왕자에게 이야기했다. 대나무가 우거진 이 숲에서 대나무는 가랑비가 되기도 하고, 계단이 되기도 하며, 그 계단을 올라타고 하늘 저 높이 오를 수 있다고 이야길 했다. 그리고 난 그 글을 그날 작문 과제로 제출했다.
내 글을 읽어본 첫 번째 독자였던 작문 선생님은 글이 너무 마음에 든다고 했다. 한번 워드 파일로 다시 쳐서 가져올 생각이 없는지 이야기했다. 난 너무 기뻤다. 동네 문방구에서 3.5인치 플로피 디스켓을 사서 집에서 다시 쳤다. 그리고 조금씩 다듬어가며, 나 만의 글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다음 날 다시 선생님을 찾아가 부끄러워하며 3.5인치 플로피 디스켓을 드렸다.
"그래. 고마워. 아마 이번 여름학교 문집에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선생님은 본인뿐만 아니라 더 많은 친구들에게 글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리고 내 글은 문집에 실렸다. 아무도 읽는 친구들은 없었지만, 그래도 처음으로 인쇄가 된 글이 만들어졌다는데 너무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그리고 그 글은 몇 달 후 내 이름이 아닌 다른 이의 이름이 되어 실렸다. 약간 내용이 바뀌긴 했지만 그랬다. 그리고 그 친구는 무슨 무슨 상을 받았고, 상금도 50만 원이나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걸로 대학교 수시입학에 쓰게 될 거라 했다. 그 친구는 국어 선생님이 되기 위해 국문과를 갈 예정이라 했다. 작문 시간에 논술 쓰기를 제일 싫어하고, 언제나 축구공을 차던 친구였다.
그날 이후 그 선생님은 나를 찾지 않았다. 나 역시 그 선생님을 바라볼 마음이 없었다. 50만 원이었으면 내가 사고 싶었던 게임기도 살 수 있었고, 최신 CD플레이어도 한 대 살 수 있었을 텐데 그 기회를 놓치게 되니 아쉬울 뿐이었다. 그래도 선생님이 나한테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 주었다면 좋았겠지만 선생님은 그날 이후로 나와 이야기를 하지 않는 걸 택했다. 나도 선생님이 이야기했던 따뜻한 조언을 잊어버리기로 했다. 책을 그만 읽었고, 음악도 그만 들었다. 그리고 그동안 썼던 글들을 다 버려버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깟 외고가 무슨 소용이고, 그깟 대학이 무슨 대수라고 내가 채웠던 것들을 빼앗아 가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 차라리 내가 빼앗길 거면, 빼앗기지 않게 내가 가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난 당당하게 선생님에게 이야기했다.
"선생님. 전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갈 겁니다."
담임 선생님은 그 이냐를 듣더니 "미친 새끼."라는 답을 해주었다. 그리고 난 마음을 정했다고 이야기했다. 그 말을 듣던 담임 선생님은 대학 못 갈 놈 한 명 늘었다며 혀만 찰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