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장의 티켓

by 별빛바람

처음으로 내 의지를 이야기해 보았다. 결국 이 많은 행위들이 "대학"이라는 목표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면, 나도 "대학"이라는 곳에 가 보겠다고 이야기했다. 항상 머릿속은 내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생각들과 친구들, 그 세상 속의 모든 것들과 함께 이야기하며 고민하는 것이 행복하다고 생각했지만, 남들이 원하는 것을 나도 한 번 가져보겠다는 의지를 이야기해 보았을 때 선생님은 "미친 새끼."라고 이야기했다. 그렇다. 내 성적은 서울에 있는 대학은커녕 지방 대학도 진학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선생님이 언제나 이야기하듯 적당한 전문대에 입학을 해서 빨리 기술을 배워 취업하는 게 나 같은 사람들이 해야 할 사회에 대한 도리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하지만 난 그 사회에 대한 도리를 다 하지 않을 것이라 선언한 것과 같았다.

선생님은 "네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사회가 그만큼 너를 위한 배려를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네가 그 사회에 대한 배려를 저 버린다면 넌 평생 백수로 살 수밖에 없을 거다."라는 이야기를 해 주었지만, 크게 와닿지는 않았다. 아직 수능까지는 2달 남짓 시간이 있었다. 그 기간 동안 열심히 하다 보면 뭔가 기대 이상의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어차피 내가 언제나 노트 뒤에 끄적이던 상상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와 큰 차이는 없었다. 성적은 최하위에서 조금 더 높은 수준이었고, 모의고사를 보더라도 상위 30 ~ 40% 수준에서 왔다 갔다 하는 수준이었으니 서울에 있는 대학은 고사하고, 4년제 대학을 진학하기도 쉽지는 않았다.

그땐 수능이 너무나 쉬웠다. 수리영역 문제를 암산만으로 풀어내는 친구들이 있을 정도였다. 모의고사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언어영역 지문은 어떤 소설이 나올지? 어떤 시가 나올지 다 예측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사회탐구나 과학탐구영역도 마찬가지였다. 공식 몇 개 외워두고, 중요한 역사적 연대 몇 개 외워두면 충분히 만점을 맞을 수 있는 시절이었다. 외국어영역도 마치 수학공식에 대입해 풀어내는 것처럼 아무 생각 없이 풀어도 최소 70점 이상은 나오는 그런 시절이었다.

반에서 공부를 좀 잘하는 친구들은 모의고사 성적이 370점(400점 만점)이 나오는 시절이었고, 서울대를 목표로 하는 친구들은 한 두 문제 틀리면 학교 레벨이 달라지던 시절이었다. 나와 비슷한 수준의 친구들도 최소 300 이상의 점수가 나오던 시절이었으니, 그 점수를 가지고 대학 진학표에 대입해 보면 4년제 대학도 꿈꾸기 힘들 그런 점수였다. 난 간신히 300점대에서 왔다 갔다 할 뿐이었으니 어느 학교를 선택하더라도 응시료 수입만 올려주는 지원자일 뿐이었다.

그런 내가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니겠다는 이야기를 하니 선생님은 기가 찰 노릇이지 않았을까? 그러나 지방에 있는 대학을 진학한다 하더라도 자취를 해야 하는 부담감 - 즉 대학 등록금 이상으로 더 많은 돈을 지출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지방의 대학을 선택하겠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리기도 쉽지는 않았다. 그래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전문적인 직업 기술을 배워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드리고, 하루라도 빨리 취업하고, 결혼하여 이쁜 손주를 안겨 드리는 것이 효도이자 내가 해야 할 도리이지 않았나 싶었다. 그러나 난 꿈을 꿨다. 한 번 반항을 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넘어지고 무너지더라도 한 번 도전해보고 싶었다.

물론 그 기대는 쉽게 무너졌다. 2달간의 시간 동안 성적이 다이내믹하게 올라갈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나와 비슷한 성적의 친구들보다 더 낮은 점수를 받았다. 전교 1등인 친구는 1문제를 틀렸다고 했다. 나와 비슷한 성적의 친구는 330 ~ 360점 정도 점수를 받았다. 하지만, 난 고작 300점 정도 받았다. 당연히 수학 공식이 어떻게 되는지도 몰랐고, 영어 단어도 제대로 외우지 않았으니 더 높은 점수가 나올 리 없었다. 그나마 친구들은 남은 2달 동안 학원에서 집중적으로 공부를 하고 훈련을 받아 점수가 잘 나왔다고 했다. 그 시절 수능 만점자가 40여 명이나 나오던 시절이었다. 360점의 성적으로도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간신히 추가합격으로 들어갈 수준이었다. 겨우 10% 정도만 오답을 보인 점수였지만, 그 점수는 이미 인생의 출발선에서 낙오가 된 점수로서 의미를 가졌다.

뉴스는 연신 40여 명의 만점자에 대한 이야기만 할 뿐이었다. 그 40여 명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짊어질 차세대 일꾼의 표본이었다. 그리고 만점을 받은 40여 명 중 일부는 소신 있게 서울대 지원을 포기했다고 했다. 우리 미래의 모범이란다. Y대를 갈 수 있었지만 전문대에 지원한 친구는 미래의 안경 전문가가 될 거라고 뉴스에 전신사진까지 촬영을 하며 대서특필 했다. 그 시절은 그랬다. 누구나 1등이 되어야 하고, 그 1등이 된 사람 중 소신 있게 자신의 자리를 포기하고 - 양보하게 되면 오히려 미덕이라 이야기했던 시절. 하지만 반대로 나 같이 등수를 말하기 조차 부끄러운 사람들은 당연히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만 했던 시절. 그게 그 시절의 낭만이었으니, 난 그 낭만을 전면으로 거부했다.

좋은 점수가 나오지 않았지만, 4번의 지원 기회를 전부 다 서울권 대학으로 지원했다. 그마저도 내 실력을 믿은 나머지 문예창작과라는 전공으로 전부 지원을 했다. 물론, 그 결과는 뻔했다. 단 한 곳도 붙지 못했다. 실기평가 때 나의 부족한 글 쓰기 실력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애초에 수능 성적 자체가 지원 자격조차 없었기 때문인지? 예비 후보라고 언급조차 못할 순위로 올랐고 나의 첫 입시는 이렇게 보기 좋게 보여주었다.

선생님은 그런 나의 결과를 보며 "미친 새끼"라고 다시 한번 이야기했다. 다시 한번 니 분수를 알라고 했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생각 있으면 대학에 지원을 할 수 있다고 했다. 그 시절은 그랬다. 일부 대학은 입시가 다 종료되었음에도 선생님들을 통해 알음알음으로 지원하고, 있는 듯 없는 듯 합벽을 하고 학교를 다니던 시절이었다. 선생님은 그 학교라도 다니며 빨리 군대를 전역하고, 빨리 취직해서 밥벌이라도 하라고 했지만 난 싫다고 했다. 그냥 싫었다. 그런 삶이 싫었다. 의미 없는 삶을 살아가기가 싫었으니 난 그냥 재수나 하겠다 그러고 학교를 나와버렸다. 그날은 1월 말이었고, 반 친구들보다 좀 이른 학창 생활을 마무리했다.

졸업식 날 서로에게 밀가루를 뿌리고, 교복을 찢으며 추억을 만들어갔지만 내 머릿속에는 그 졸업식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졸업식날도 학교를 가지 않았으니 그날은 친구들이 어떤 추억을 만들었는지 조차 모르는 하루였다. 아니 그날은 재수를 하기로 결심한 날이었다. 그리고 남들은 졸업의 추억을 만들어 나갈 때, 난 재수학원상담을 받으러 갔다.

지하철 고가 철교가 바로 옆에 있어 3분마다 지하철 지나가는 소리가 마치 타악기 소리와 같이 진동을 하던 그 학원. 하지만 그 동네에서 만큼은 높은 입시 성공률을 보여주었으며, 그 학원을 다니는 것만으로도 이미 대학 입시에 성공했다고 하던 그런 학원. 8시 등원 시간에 맞추어 학원 관리인은 학원의 문을 굵은 쇠사슬과 커다란 자물쇠로 잠가버리던 그 학원. 난 그 학원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 학원을 선택한 이유는 별 이유 없었다. 우연히 신문의 간지 전단지로 왔던 학원 광고 하나 때문이었다. 단 한 번도 학원을 다녀본 적 없으니, 어느 학원이 좋은지 알지도 못하고 어떠한 선입견 없이 선택을 했으니 오히려 현명한 선택이라 생각을 했다.

학원 상담을 받으러 간 날. 상담 실장은 조용히 모의고사 문제지를 꺼냈다. 학원에 입학하려면 직전 수능성적뿐만 아니라, 현재 수준을 테스트하여 수학이 가능한지 판단해야 한다 했다. 약 2시간에 걸쳐 문제를 풀었다. 국사나 국어는 손쉽게 풀었지만, 수학은 한 문제도 풀지 못했다. 사회탐구는 그래도 무난히 풀었고, 과학탐구는 아는 것들 몇 개는 풀어볼 수준이었다. 외국어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런대로 푼 것 같았다. 그리고 약 20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상담 실장은 조용히 말을 꺼냈다.


"학생은... 우리 학원에서 상위권이나 중위권 반은 갈 수 없고, 그나마 갈 수 있는 건 중하위권 반입니다. 학원비는 상위권 학생은 무료, 중위권 학생은 월 35만 원, 중하위권이나 하위권 학생은 월 40만 원입니다."


상위권 학생들은 학원비를 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 합격한 학교 하나로 학원은 플래카드를 걸 수 있었고, 서울대 몇 명, 연세대 몇 명이라는 최대 합격자 배출이라는 명예의 훈장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니 그 학생들, 이미 목표가 정해진 학생들을 위해서 학원은 최대한 많은 투자를 할 수밖에 없었다. 점심은 특식으로 제공한다. 그리고, 상위권 학생들은 10명 정도의 소수 정예반으로 교실을 구성해 준다. 자율학습 역시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은은한 클래식 음악과 양팔을 벌려도 손이 닿지 않을 정도로 넓은 책상을 지원해 줬다.

그렇다면 그 학원은 상위권 학생들을 위해 헌신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었나 하면 그건 아니었다. 당연히 학원은 운영되어야 하고, 그 지역에서 제일 잘 나가며, 제일 큰 학원이었으니 학원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돈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돈은 나와 같은 중위권이나 중하위권, 하위권 학생들에게 차등 지급을 통해 학원을 운영해 왔다. 중하위권이나 하위권 학생들에게 좀 더 많은 돈을 지급하도록 결정한 것은 일종의 헌신과 사회적 책임의 목적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당연히 미래가 결정된 상위권 학생들과 같은 학원을 다니는 것만으로도 중하위권이나 하위권 학생들에게는 영광순간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고, 혹시라도 학원의 시스템을 잘 따르게 되어 상위권 대학에 진학을 하게 된다면 그건 자신의 위치를 뛰어넘을 수 있도록 도와준 학원의 배려였으니 그만큼의 책임이 따라야 한다는 결정이었다. 당연히 학원은 늘 이야기하는 대로 "우리가 만들어낸 시스템"을 잘 따르면 충분히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광고를 하였다. 단지 원하는 학교에 진학을 못하는 건 학생의 나태함과 끈기 부족일 뿐이었다. 상위권 학생들은 하루에 12시간 이상 자리에 앉아 공부를 할 뿐이었지만, 중하위권 학생들은 놀기 바쁘고, 연예하기 바빴으니 안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게 당연하다 했다. 그건 학생의 착임이지 학원의 책임이 아니라 이야기했다. 그래서 난 상위권 학생의 학원비도 부담해 줘 가며 재수 생활을 시작했다.

담임 선생님은 서울대 출신 수학 과목 담당이었다. 우락부락한 얼굴에 덩치 큰 선생님이었으니, 자신의 별명이 "도시락"이라 불러달라 했다. 성이 도가였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친구들이 부르는 별명이었다 했다. 그리고 재수 생활에 대해 짧게 이야기 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너희들은 외고나 과학고를 나온 애들이 아니기 때문에 상위권 대학은 불가능하다. 1년 동안 우리를 잘 따라오면 서울의 하위권 대학까진 가능하다. 그 이상 욕심을 부리고 진학한 경우는 우리 학원이 오픈하고 딱 한번 있었지만, 그 이후로는 한 번도 없었다. 너희들도 분수를 알고, 지방대를 갈지? 서울의 하위권 대학이라도 갈지는 너희들의 선택이다. 우리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잘 따르면 그 결과를 얻을 수 있으니 충실히 따르길 바란다."


그때 난 처음으로 손을 들었다.


"선생님. 제 목표는 연세대입니다. 이왕이면 국문과에 가서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제가 그 학교를 진학할 수 없습니까?"


선생님은 웃으며 이야기했지만, 마치 내가 다른 세상에 살 고 있다고 생각한 듯 이야길 이어갔다.


"자네는 여기 오기 전에 어느 학교를 썼지?"


"네. 저는 서울에 있는 대학 문예창작과를 썼습니다."


"그렇다면 J대, S대, M대 이런 곳을 썼겠구먼. 그래서 거기 붙었나? 너한테는 그 학교도 과분해. 그 학교가 아닌 더 낮은 학교를 썼으면 붙었을지 모르지만 아마 떨어졌을걸? 그나마 우리 학원에 와서 잘 다니면 그 정도까진 붙을 수 있을 거다. 내가 장담한다. 넌 앞으로 수능 점수 잘 나와야 330 ~ 360점 정도일 거다. 만약 네가 상위권 대학을 가게 되면 이 선생님이 너한테 맛있는 거 사준다. 술이라도 사줄게. 그런데 그 키텟은 단 한장밖에 없어. 내가 재수학원 강사를 20년 했지만, 이 반에서 연세대를 간 건 딱 한번이었다. 대부분 서울 중하위권 대학을 가면 다행이었지. 그게 딱 너의 위치야. 헛 된 생각하지 말고 그냥 공부나 해라. 그 것 조차도 못 들어갈 수 있으니."


그리고 선생님은 수학의 제일 첫 단원인 집합에 대해 강의를 시작했다. 고등학생 시절 단 한번도 수업을 들어본 적 없으니 마치 처음 듣는 기분이었다. 그러니 난 수업에 집중 할 수 밖에 없었다. 다른 친구들은 이미 들은 내용이라서, 너무 쉬운 내용이라서 집중하지 않았던 것에 반해 난 처음부터 다시 듣는다는 기분으로 들었다. 이게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국어도 그랬고, 수학도 그러했고, 사회, 과학, 영어도 그렇게 했다. 그렇게 해야 내가 대학을 갈 것만 같았다.

처음으로 글을 쓰기 위해서가 아닌 공부를 하기 위해 노트를 샀고, 연필을 샀다. 그리고 샤프와 볼펜을 샀다. 지하철을 타며 보기 위한 자료를 위해 색색 볼펜을 사용해 그동안 배우고 공부한 내용을 적었다. 그리고 그 적은 내용을 다시 A4 용지를 4등분 해 적은 뒤 티셔츠 앞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이건 화장실 갈 때, 잠시 쉴 때, 담배 한 대 필 때 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연필은 내가 쓴 내용을 다시 외워보고자 그대로 적는 용도로 썼다. 이제는 내 손의 굳은 살이 나만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닌 다른 목적으로 생겨난 것들이었다.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는 밤 11시 까지, 토요일과 일요일은 그래도 좀 늦은 여유를 가져보고자 아침 10시에서 저녁 7시까지 공부했다.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쓰고 싶은 글을 못 쓸 것 같았다.

그렇게 약 1달 정도 공부 한 뒤 첫 모의고사가 이는 날이었다. 내 점수는 290 다른 친구들은 360점대 점수를 받았으니 난 중하위권 반에서 최하의 점수를 가지게 되었다. 그 중 370점대 점수를 가진 친구들은 중하위권에서 중위권 반으로 올라 갈 수 있도록 전반을 허락했다. 학원비의 할인이라는 커다란 혜택과 함께 좀 더 넓은 자율학습실에서 공부를 할 수 있게 해준다는 기회를 만들어주었지만, 정든 친구들을 떠날 수 없다는 낭만적인 이야기로 자신의 반에 남아있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실제 이유는 남녀가 함께 공부하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사랑이라는 감정이 싹틀 수 밖에 없었고, 정든 친구는 사실 사랑하는 연인이었으니 연인과의 이별을 너무 일찍 경험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난 그나마 하위권으로 이동을 해야 하지만 선생님은 중하위권 반에 잔류하는 것으로 허락했다. 첫 모의고사였지만 나에게는 한 가지 희망이 보였다. 분명 상위권 점수까지 오르게 되면 상위권 수업을 들을 수 있을 것이고, 학원비도 공짜로 다닐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공부를 했다. 문구사에서 코팅기를 샀고, 내가 그동안 적어두었던공부내용을 하나씩 코팅해 두었다. 한 뼘 크기의 노트에서 A4사이즈까지 일요일에 잠시 여유있는 시간 동안 하나씩 코팅을 해 두었고 그 역시 셔츠 앞주머니에 들어가게 되었다.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지하철에 앉아 이동하는 1시간 동안 그 노트를 읽었다. 하루에 한 번, 두 번, 세 번, 아니 몇 번을 읽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읽었다. 그리고 수업시간을 제외하고는 하루에 3번 허락한 흡연시간과 점심, 저녁 시간 외에는 열심히 적었다. 손가락에 생긴 굳은살이 마치 훈장인 것 같았다. 너무 행복했고, 그 굳은 살이 조금씩 더 커질때마다 더 많은 볼펜과 연필, 샤프를 사용했다.

그리고 두 번째 모의고사 날 나는 340점이라는 점수를 받았고, 다시 한번 더 불 태우고자 마음먹었다. 주머니에 있는 담배 한갑, 그리고 그동안 적어둔 노트들 담배를 한 대 태우면서도 늘 손에서 놓치지 않았으니 내 주위엔 사랑하는 연인도, 함께 담배 한대 태울 친구도, 소주 한 잔 같이 마실 친구도 없었다. 그저 담배와 연필, 주머니에 넣어둔 노트가 전부였다. 그나마 연필과 노트는 어린시절부터 나의 친구였으니 정말 내 마음을 잘 알아주고, 이해해 주는 친구였으며, 나의 연인이었고, 나의 놀이터였으며, 나의 삶이었다.

하지만 세 번째 모의고사는 다시 290이란 점수를 받게 되었고, 선생님은 마치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듯 나를 쏘아붙이며 이야기 했다.


"니가 그럼 그렇지. 니 점수는 290이다. 지방대라도 가면 감사하게 생각해라. 지금이라도 하위권 반으로 옮겨야 하겠지만, 인생이 불쌍해서 여기 남기니 니 분수에 맞게감사히 생각해라. 그리고 니가 삼수를 한다 하면 우리 학원은 감사하게 여길테니 지금 놀아도 상관없다."


어차피 난 놀고 있었다. 내 노트속에서 난 마치 공부를 하는 한 명의 청년 과학자가 된 것 처럼, 이상한 공식과 역사적 사실을 분석하는 학자가 된 것 처럼 난 놀고 있었다. 그러니 선새임의 이야기가 틀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노는 목표는 정해져 있었다.


단 한장의 티켓.


난 그것 하나면 충분했다. 그 티켓 한 장만 받으면 아무리 화를 내도, 욕을 해도 상관 없었다. 그리고 그 한 장의 티켓을 받기 위한 상위권 반으로 옮겨야 했다. 조금이라도 학원비를 아끼기 위해서도 있었지만, 한 번이라도 위로 올라가보고 싶었다. 더 높이 날아가고 싶었다. 단 한 번이라도 인정받고 싶었다. 학원장이 한 번씩 상위권 학생들에게 사주는 돈까스 도시락을 먹고 싶었다. 그리고 상위권 학부모들이 챙겨주는 햄버거를 먹어보고 싶었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선생님과 상위권 학생들이 함께 모여 식사와 소주를 함께 하는 시간. 물론, 그 돈은 상위권 학부모들이 십시일반 모아서 부담했지만 그 자리에서 함께 소주 한 잔 마시고 싶었다. 그리고 난 다시 한 번 더 공부를 했다.

하루에 피던 담배 3대에서 2대로 줄였다. 등원 전 한대. 그리고 하원 후 지하철에 내려 집까지 걸어가는 동안 한 대.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리고 주말에 휴식하는 단 하루 시간에 슈퍼에서 산 참이슬 한 병에 라면 한 봉지가 일주일의 외로움을 견뎌내는 치료제였다. 친구? 모임? 아니 재수학원 반 모임이 있는지 조차 몰랐다. 친구들과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으니 금요일마다 소주 한잔 하는 자리에 나를 부를리 없었다. 그래도 그 다음 모의고사에서 내가 원하는 목표를 얻었다. 379점. 겨우 몇 문제 안 틀린 것 같았다. 4개월 안 된 시간이었으니 난 당당하게 도시락 선생님을 찾았다.


"선생님. 제 점수도 이제 상위 5%안에 들어가니 상위권 반으로 전반 시켜주십시요."


선생님은 나를 바라보더니, 그동안 함께 어울린 친구들을 떠나고 싶냐고 이야기 했다. 함께 어울린 친구들과 인연이 있으니 함께 어울리며 공부해서 원하는 대학을 가라고 이야기 했다. 하지만 난 고집을 부리며 상위권으로 전반시켜 달라 이야기 했다. 그러나 선생님은 역시나 반대를 햇따.


단 한장의 티켓.


그 티켓은 너를 위한 티켓이 아니다. 그리고, 니 주제에 서울대? 연고대? 상위권 대학을 갈 수 있을거라 생각하냐고 설득했다. 그러니 분수에 맞춰 서울의 하위권 대학에 맞춰 살라고 했다. 그리고 난 이야기 했다.


"선생님. 전 그 단 한장의 티켓을 제가 갖지 못한다면 찢어버리겠습니다."


그리고 난 당당하게 학원을 그만뒀다. 그 날은 수능이 4개월 정도 남은 7월의 아느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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