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한 미래를 소망하고, 실현 가능한 현실을 외면한다

by 별빛바람

우리는 언제나 먼 미래를 상상한다. 로또가 당첨되길 원하고, 시험에 합격하길 원한다. 그리고 자격증을 취득하길 원하고, 좋은 대학에 입학하길 원한다. 하지만 그 소망의 정도는 아무것도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 혹은 실현이 불가능할 때 더더욱 간절해지니, 정작 우리는 언제나 불가능한 미래를 소망하고, 실현 가능한 현실을 외면한다. 하지만, 실현 가능한 현실의 정의는 무엇일까? 그 정의는 우리의 현 상황에 맞춘 최적의 방안이라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이미 누군가가 설정을 해 둔 그런 미래의 각자 역할이라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런 고민들이 머릿속에 잡아가고 있을 때 난 대학을 입학했다. 그래도 남 부럽지 않은 대학이라 생각했던지, 부모님도 기뻐했고, 친구들도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하지만 그런 현실의 미래는 입학을 하고 나서, 우리에게 낙인처럼 찍혀있던 "학번"이라는 굴레에서부터 큰 좌절을 경험하게 된다. 내가 입학할 당시의 학생들은 크게 4가지 부류가 존재했다. 그 학생에 대한 구분은 아래와 같았다. 물론 이 기준은 지금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20년 전 기준이라 생각해 주었으면 한다.


1. 수시 입학생

목표하는 대학을 위해 모든 스펙이 다 정해진 학생들이다. 이미 고등학교 1학년 입학을 할 때부터, 대학을 입학하기 위해 준비한 경시대회와 상장, 학생부에 대한 모든 기록들을 철저히 준비한다. 그런 준비를 바탕으로 하여 고등학교 3학년 1학기에 수시 응시를 진행하고, 1학기 말쯤 대학 입학이 정해진다. 그리고 그러한 학생들은 1학기 여름 방학을 기점으로 하여 사전 대학 교육이라는 명목아래 대학 교육을 사전에 받기 시작한다. 이 학생들은 학번에 "0"이라는 식별 번호를 준비해 둔다. 이미 고등학교 3학년 2학기는 그들에게 모든 미래가 결정된 순간이었으며, 단지 술과 담배만 하지 못할 뿐이지 대학생활의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2. 정시 입학생

그 당시 일반적인 학생들의 모습이다. 당연히 수능을 보고, 수능이 끝나고 나면 자신의 점수대에 맞춰 원하는 대학을 가군 / 나군 / 다군 / 라군에 맞춰 응시를 한다. 일부 학교에서는 논술이라는 평가를 보기도 하고, 각 전공과목에 맞춰 전공 실기 시험을 보기도 한다. 대략 1월 말쯤 합격이 정해지고, 1월 말부터 예비 대학생이란 신분으로 학교에 방문하고, 선배들과 소주 한잔을 마시며 - 2월에 있을 대학생 오리엔테이션 준비를 하며 정식 대학생의 모습을 가져가기 시작한다. 이 학생은 식별번호가 "1"이었다.


3. 추가 합격생

이미 순번에서 밀려났지만, 앞의 학생의 사정(등록금 납입 문제, 혹은 타 대학교 진학, 재수 등)으로 인해 목표를 수정한 경우 추가의 기회가 주어진다. 심하면 2월 말 / 혹은 3월 초에 추가 합격을 하기도 한다. 20년 전에는 3월 초 개강 뒤 합격하는 친구들도 있었으나, 그들에 대한 식별번호는 "2"번이었다.


4. 편입생

1 ~ 2학년 혹은 4학년까지 타 학교를 다닌 후, 다시 새로운 학교로 편입한 학생들이다. 이미 대학 생활을 경험한 경우가 있으나, 그들은 적자가 아니라 서자였으니 그들에 대한 식별번호는 "3"번이었다.


의미가 없는 번호라 할 수 있지만, 이미 모든 것은 식별번호로 존재했다. 난 다행히 정시 입학생이었으니 1번이라는 식별번호를 받아 들어왔지만,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이후 학교의 분위기는 미묘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이미 신입생들 사이에서는 수시 입학생이니, 정시 입학생이니 하는 부류들로 서로를 분류하기 시작했다. 수시 입학생은 부모의 이끌림으로 혹은 취업 컨설턴트의 권유로 인해 자신의 길이 정해진 단계였으니 왠지 모를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 유행하던 MSN메신저나 네이트온에서는 수시입학생들만 따로 만들어진 커뮤니티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식별하며, 자신들의 우월함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아무리 같은 학번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대학 생활을 6개월 먼저 했으니 우리는 너희 정시생이랑 달라."


본인들은 자신의 가치와 부모의 재력과 선견지명이 자신들의 가치라고 생각하는 양 우쭐거리곤 했다. 물론, 그들은 일부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일부는 자신들의 미래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니 동아리도 이미 정해져 있었고, 학회 활동도 정해져 있었으며, 2학년 때 결정할 전공을 어떻게 정해야 할지도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리고 남학우들은 몇 학년 때 군대에 입대를 해야 하며, 어떤 과목이 수업을 듣는데 수월한지 미리 "족보"라 불리는 레퍼런스 자료들을 참고하며 조심스레 자신의 미래를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난 그 모든 것을 거부했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누군가 나에게 조언을 해줄 정도로 대학 생활을 경험해 본 형님들도 없기도 했지만, 주위에 내가 어울리는 선배들은 0번이 아닌, 2번이나 3번의 식별 번호를 가진 선배들이다 보니 인생의 의미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나눴을 뿐이다. 그렇다. 난 불가능한 미래를 소망하고, 실현 가능한 현실을 외면하면서 살아왔다. 그래서 문학도로서 대학생활을 했고, 경제학 지표나 경영학 주요 공식을 외우기보다는 시 한 편 더 읽어보고, 소설 한 권 더 읽어보는 것이 삶의 의미라 생각하며 지내왔던 것 같다. 그리고 글 한 편 쓰는 것이 대학. 생활의 의미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 모든 것들이 현실과 불가능한 미래를 꿈꾸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대학원에 진학을 한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이유 몇 가지로 대학원을 중도 포기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내가 꿈꾸던 미래들이 불가능한 미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상은 그리 낭만적이지 않았으며,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학문으로 엮어진 끈끈한 정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교수님의 유치원생 자녀의 유치원 통학을 책임져줘야 했으며, 연구실로 배달온 택배를 교수님의 댁까지 배달해줘야 했다. 저녁에 교수님이 술자리가 있다면, 대리운전기사가 되어야 했으며, 매일 아침 교수님 연구실의 청소를 책임져야 했다. 내 역할은 학생이 아니었고, 보모였으며, 택배기사였고, 대리운전기사였으며, 청소부였다. 그렇게 2년을 버티고, 한 차례 석사 논문 통과가 보류가 되어 좀 더 헌신적으로 교수님을 보필하게 되면 석사 논문은 통과가 되고, 자연스럽게 교수님의 추천장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었다.

이 역시 나에게는 실현가능한 미래였지만, 난 그 미래를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몇 가지 계기가 겹쳐지며, 난 조심스럽게 교수님과의 인연을 끊겠다고 이야기하며 미련 없이 대학원을 떠났다. 6년간 공부한 것이 아까웠지만 더 이상 실현가능한 미래에 매달리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실현 불가능한 미래를 향해 달려 나가는 내 모습이 다시 기대되기 시작했다.


그때 나이 26살. 난 아직 군 입대도 하지 않은, 철부지 백수에 지나지 않았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그나마 새벽에 잠드는 게 쉬웠던 모양인지라, 아침 늦게 일어나 라면 한 개 끓여 먹으며 하루를 버티는 게 그나마 나에게는 위로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많은 친구들이 군대를 전역하고, 회사에 취업했지만, 난 아직 군 복무도 마치지 않은 백수였으니 내 미래는 상상하기 어려운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다 잠시 정신을 차리고, 다시 한번 실현 가능한 미래에 대해 고민을 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 첫 번째는 "군 복무"였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당연한 의무라 할 수 있는 군복무를 마쳐야 했다. 하지만 일반 사병으로 가는 것보다는 무언가 의미 있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에 장교로 복무를 하는 것을 선택했고, 이왕이면 강한 부대에 입대하는 것이 맞겠다 생각하여 해병대 장교로 복무를 하기로 결정했다.

두 번째는 군 전역 후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다양한 고민이 있었지만, 여기서 난 현실과 이상이 서로 분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현실의 나는 군 전역 후, 회사에 입사를 해 정년 혹은 정년 이전에 회사를 떠나는 것으로 결정할 것이란 미래가 그려졌다. 하지만 이상의 나는 우연한 계기에 사건을 경험하게 되어, 그 사건을 해결하게 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까 상상해 보았다.




현실의 나는 특별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 물론, 그 이후의 삶은 그다지 밝지만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이미 세상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식별번호라는 굴레 속에 갇혀 있었다. 회사 역시 학연과 지연이 서로 엮여 있었으며, 그 틈바구니에 어떻게든 들어가기 위해 "정치"라는 이름으로 혹은 "네트워크"라는 이름으로 그 현실을 이겨내기 위해 고민을 했다. 나의 20대는 불가능한 현실을 꿈꾸기 위한 투쟁이었지만, 30대는 불가능한 현실이 실현되지 못할 것이란 좌절감이 더욱 커지는 순간이었다.

이미 회사 생활도 입사와 동시에 낙인이 찍혀 있었다. 선택된 존재들은 별도로 고용 계약서를 작성했고, 그들은 어느 부서로 - 어떠한 V/C업무를 수행해야 하는지 이미 결정된 미래를 향해 달려 나갈 뿐이었다. 단지 나머지 존재들은 그들을 서포트 하기 위해 들러리에 지나지 않았다. 어떠한 성과가 있다 하더라도, 그 성과의 마무리는 그들을 위한 것이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매출이 증대해도, 비용이 절감돼도, 혹은 회사의 비효율을 찾더라도 그 마무리는 내가 할 수 없었다. 그렇게 13년간 직장생활을 마무리하고, 현실의 나는 이 글을 적기 시작한다. 결국 어떠한 일도 성공하지 못했지만, 오뚝이처럼 이겨낸 내 과거를 다시 한번 생각하며 글을 적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상의 나는 다른 모습을 살고 있을지 모른다. 그건 다름 아닌 군 복무 시절에 있었던 한 에피소드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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