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관 후 보름쯤 되었을 때, 사단 참모의 소집이 있었다. 내가 복무했던 수송병과는 대대급 / 연대급 수송관이 1명씩 배치되었으며 그 수송부대와 사단 수송 참모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당연히 사단 수송 참모는 병과의 최고 어른이었으니, 그 어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우리의 모든 것을 결정해 주는 것이었다. 아마 사단 참모의 소집은 신임 수송관 혹은 소대장 대면도 하고 소주도 한잔 하기 위한 자리였을 것이다.
"그래. 자네 부모님은 뭐 하시지?"
한 동기는 아버지가 경찰공무원이라 이야기했으나, 고위 공직자가 아니었던지 참모는 그 자리에서 재떨이를 던진다. 고작 그 정도 직급인 사람을 나에게 이야기한 것은 시간 낭비란 뜻이었다. 그리고 저녁에 사단 참모가 좋아하는 장소로 회식을 진행한다. 그 시골에 있었던 작은 해물탕집이었고, 우리는 그 해물탕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소주 한잔을 마시며 2차 장소로 이동한다. 2차는 맥주에 치킨이었고, 3차는 노래방이었다. 참모는 군인들끼리 노래를 부르는 건 재미없다며, 여군 선배에게 도우미를 부를 것을 지시했다. 여군 선배는 "XX 스타일로 부르면 될까요?"라고 이야기하니 "그렇지. 잘 알고 있구먼."이라고 하며 조용히 마이크를 잡고 있을 뿐이었다. 도우미가 1명이 오자, 참모는 조용히 부르스를 추며 시간을 보낸다. 정신없는 첫 소집의 끝이었다.
그리고 난 뒤 여군 선배는 그다음 날 메일을 보낸다.
제목 : XX 사단 수송 병과 회식 결과 보고
XX월 XX일에 실시했던 수송 병과 회식은 참모님, XX대장님 외 위관급 장교들이 회식 비용을 부담하는 것으로 결정하였습니다. 아래의 금액에 따라 xxxx계좌로 금액을 입금해 주시기 바랍니다.
소위 : xxx만원
중위 : xxx만원
대위 : xxx만원
어찌 되었건 우리는 참모장의 술값과 도우미 값을 대신 내주었다. 이건 참모장을 위한 자리이긴 했지만, 그 병과에는 묘한 전통이 있었다. 항상 윗어른, 혹은 선배가 술을 사야 한다는 게 우리나라의 미풍양속이라 생각했지만, 이곳은 임석상관을 제외한 다른 사람의 밥값을 내야 한다는 것이 하나의 룰이었다. 이런 모습은 바로 윗 기수 선배들에 의해 우리는 철저하게 유린되고 착취되어만 왔다.
점심시간 혹은 저녁, 아니면 주말이 되면 술이 먹고 싶으면 항상 우리와 같은 신임 수송관을 부르곤 했다. 그 선배는 "우리의 전통"이라는 이름 아래 밥을 사달라 했으며, 술을 사달라 했고, 단란 주점의 TC 비용까지 착취해 나갔다. 한 달에 90만 원 남짓 벌었던 신임 소위들에게는 착취의 대상이자 수단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난 "술도 좋아하지 않고, " "여자도 좋아하지 않으니, " 절대 나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밥 한 끼 정도는 사 드릴 수 있지만 그 이상은 불가능하다 했다. 당연히 난 그날 이후부터 사단에서 왕따가 되었다. 같이 밥을 먹고, 술을 먹을 선 후배도 없었다. 단지 그 안에서 인맥을 만들고 - 사람들을 만들어 가야 한다면 그 법칙을 지키며 1년을 지내와야만 했다.
첫 회사 입사 때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말도 안 되는 야근이 난 이해가 되지 않았고, 선배들에게 "그러한 불 합리한 상황"을 왜 해야 하는지 이야길 했다. 그리고 난 가장 잘 나가는 부서에서 쫓겨났다. 단지 그 하나뿐이었다. 뚝심 있게, 선배들이 공고하게 만들어 놓은 원칙을 부정하는 존재는 필요 없다는 존재였다. 우리는 그 속에서 후배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착취와 억압이라는 도구가 조직을 운영하는 원칙이라 생각하며 열심히 조직의 논리로 세상을 움직여 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 도구와 원칙 속에서 "그 원칙이 진실"인지 혹은 "진리"인지 조차 인지하지도 않은 상태에 단지 "조직의 섭리"라는 이야기 하나 만으로 우리는 인정해 갈 뿐이었다.
난 그날 이후 조직에서 왕따가 되었다. 그러니 오히려 군 생활이 참 재미있었다. 내 소대원들과 시간을 보내고 쓸데없는 회식과 술자리를 따라 할 필요가 없었다. 단지 그뿐인 순간이 너무 행복했다. 하지만 군대는 여전히 그 위계관계 속에 움직일 뿐이었다. 간부들에게 할당되었던 면세주는 당연히 짬 많은 행정관, 주임원사나 대대장의 몫이었고, 어쩌다 한 번씩 중대장들이 눈치를 보며 캔맥주 몇 박스를 챙겨갈 뿐이었다. 회식 때 쓰리고 불출되던 삼겹살과 소주, 맥주, 캔 김치는 주임원사의 냉장고에 있었으며, 그건 간부들 회식 때 혹은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곤 했다. 당연하지만 그걸 아는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난 그게 잘못되었다고 이야길 했고 사단 수송부대에서 제일 힘든 연대로 배치를 받았다. 그리고 수송부대는 자연스럽게 보급부대와 합병이 되어 보급수송 부대가 되었으며, 보급과 수송이 함께 업무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당연하지만 그 어느 곳 보다 편한 곳이었고, 당직도 없는 곳이었지만 난 부사관들의 횡령 사실을 이야기했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부사관들에게 찍혔고, 부사관들은 나의 문제점을 하나하나 꼬집어 가며 수송대장에게 이야기했다.
아침 출근부터 시작해, 부대원들을 지휘하는 그 모든 것들 하나하나 잘못되었다고 했다. 그중에 몇 개는 내 동기가 잘못했던 것들도 있었지만 그 모든 것들은 내가 잘못한 게 되었다. 그나마 동기는 아버지가 사단 주임원사 출신이었으니 대 선배의 아들을 공격할 수 없다는 것이 자신들의 논리였다. 그리고 난 자연스럽게 수송부대에서 폐급 소대장이라는 명예를 갖고 전방 연대로 배치를 받게 되었다.
부대 전출 전 날, 회식 때도 임석상관을 제외한 제일 막내였던 내가 회식 비용을 낼 수밖에 없었고, 주임원사는 조용히 나를 불러 이야기했다.
"그러길래... 우리가 잘해줄 때 말 잘 듣지 그랬어요."
그들은 삼겹살이며 김치, 엔진오일이며 그런 잡다한 것들을 챙기는 게 일상이었고, 그것 하나하나가 자신들의 월급이자 보상이라 생각했던지, 그걸 전면으로 부정하는 나를 어떻게든 통제하고 싶었던 거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말고, 3년 후에나 봅시다."
어차피 난 전역할 몸이니 까짓 거 3년 동안 고통을 받으면 되겠다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난 전방 부대로 배치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