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곳이나 다 똑같지만 "직업"이라는 환경에 내몰리게 되면 소명이라는 건 사라질 수밖에 없다. 분명 해병대를 지원하는 사람들 중에는 여러 가지 목적 중 하나 때문이었을 거다. 더 강해지기 위해 혹은 끈끈한 전우애 때문에, 혹은 나름의 인맥을 위해 등등. 사실은 그 모든 것들이 해병대를 나왔다는 자부심 때문이란 것 하나로 포장이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전역 후에도 해병대를 나온 것을 자랑스러워하니 그 안에서의 환경은 분명 "자부심"을 느낄만한 환경이었음엔 틀림없다.
하지만 그 환경이란 것은 상병 말 호봉이 되어야 젓가락을 쓸 수 있고, 일병까지는 국을 먹을 수 없으며, 상병은 되어야 세탁기를 쓸 수 있는 그런 자질구래한 규칙들 때문이라면 아무도 믿지를 않는다. 그냥 이유 없이 잠자리를 먹인다. 이유 없이 라이터 불에 손을 지진다. 이유 없이 후임의 성기를 만지작 거리고, 이유 없이 가래침을 먹인다. 그들은 그것이 "강한" 해병이 될 수 있는 지름길이라 생각한다. 이병과 일병의 생활을 지나 상병이 되는 순간 그동안의 피해자에서 다시 가해자가 되며 똑같이 개구리를 먹이고, 라이터가 아닌 성냥불로 상대의 손등을 지진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난 그래도 그 선임처럼 괴롭히진 않았어."라고 이야기한다.
물론 그 모든 것은 간부들의 무책임과 암묵적인 지시에 의해 그런 것들도 사실이다. 강한 해병들을 컨트롤하기 위해서는 암묵적인 "해병대의 룰"을 지켜줘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지만, 정확히 이야기하면 "직업"이 된 사람들의 생각에서, 그 자리를 버티기 위해 필요한 것은 별다른 문제가 없어지는 것. 그거 하나뿐이었다. 그렇게 암묵적인 침묵 아래, 그곳인 사람이 견디기 힘든 많은 부조리와 문제점들이 조금씩 조금씩 생겨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근무하던 그곳에서 어느 한 군장점에서 만들어 파는 팔각모가 있었다. 재질은 마치 군복과 같은 재질인데, 그 재질의 팔각모에 풀을 잔뜩 먹여서 빳빳하게 각을 만들어 팔았다. 그 팔각모는 당연히 그 지역의 "특산품"과 같은 것이었고, 깐깐한 사장님 덕분에 구입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 팔각모에도 나름의 기준이 있었다. 분명 팔각모를 살 수 있는 계급이 존재했고, 그 계급이 지나면 락카 스프레이를 뿌르던, 카드를 이용해 각대를 잡든 빳빳한 모양을 만들어 내며 그들 나름대로 기준을 잡아갔다. 당연히 그 안에서 간부들은 그 모든 것들을 용인해 주고, 눈감아 주면서 다른 혜택을 받아가곤 했다.
당연히 그들은 직업이었으니, 소명의식이란 게 남아있을 리 없다. 그나마 그들이 하고자 하는 행동은 고작 삼겹살 몇 근 가져가고, 소주 몇 병 가져가며, 김치 몇 조각 가져가는 것이 다였다. 그날은 저녁 늦게 업무를 마치고 퇴근할 때였다. 부사관 숙소에서 삼겹살을 구워 소주와 함께 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 소주와 삼겹살의 출처는 불 보듯 뻔했다. 난 그 부분에 대해 지적을 하였고, 당연히 그 지적은 나의 불이익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 자리는 자신들이 컨트롤하기 쉬운 다른 위관급 장교가 들어왔다. (이미 그 인원은 사병들의 개인정보 도용 문제로 징계를 받은 뒤, 타 부대로 전출 간 상태였으나 자신들이 보기에 그 사람이 자신이 컨트롤하기 편할 거라 생각했는지 다시 복귀시킨다.)
이후 옮긴 곳에 한 부서관은 나에게 이런 이야길 했다. "어차피 다 부질없습니다. 아무리 잘한다 해도, 인정 안 해 주더라고요." 그는 자신이 모시던 중대장이 고군반 시절 동기의 노트북을 훔쳤으며, 그 노트북을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의 와이프에게 주었는데, 마침 그 와이프는 노트북이 고장 나 AS센터에 맡기게 되었을 때 "분실 노트북"으로 등록된 사실을 확인했다는 이야길 해 주었다. 당연히, 그 중대장은 자신의 비위 사실을 숨기기 위해 그 노트북을 "우연히" 주운 것이라 이야기해달라 부사관에게 부탁했지만, 그걸 "인정"하기 어려웠던 부사관에게 줄 수 있는 불이익은 다 주어졌다며 투덜 되었다. 당연히, 난 이런 최 전방 부대에 배치된 것부터가 불이익이었으니 세상의 불이익은 서로가 다 받은 거라 생각을 했다.
그나마 난 불이익이 그리 크진 않았다. 어차피 학창 시절부터 불이익이라면 치가 떨릴 정도로 받아왔으며, 말도 안 되는 "불이익"이 넘쳐나는 곳에서 생활했으니 어차피 바뀌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임관 후, 육군 수송학교에서 초군반을 갔을 때, 내가 응시한 시험 목록이 "희한하게" 누락이 되며 육군 인원들은 상위권 등수로 - 해병대 인원들은 하위권 등수로 표시되는 기적을 보기도 했으니 크게 변하는 건 없었다. "점수"에 대해 정정을 요청하였으나 "이미 보고가 되었고, 상장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정정은 할 수 없다는 답변은 언제나 상투적이었다.
이후 군 생활에서 새로운 진리가 나올 거란 생각은 해 보지 않았다. 어차피 "군복무"라는 것이 소명 의식이 있어서 선택하는 것이 아닌 "직업"이라는 단위의 선택일 뿐이었다. 단지 사병들의 잘못된 판단에 의해 "해병대"라는 곳의 환상을 품어오곤 했지만, 실제의 모습은 단지 억압과 착취의 연속이며 그 안에는 "직업"이라는 굴레 안에서 벗어나기 힘든 사람들의 암묵적인 침묵과 부조리의 연속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며칠 지나지 않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내가 적는 이야긴 20년 전 이야기다. 이미 30년 전 이야기를 이야기하다, 다시 20년 전 이야기를 하긴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더 좋게 바뀌었을 수도 있다. 분명 좋게 바뀌었을 거라 생각한다. 당연히 전우를 생각하며, 부하를 소중이 여기는 그런 문화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은 그리 바뀌지 않은 듯하다. 해병대 인원들에게 신과 같은 존재였던 모 사령관은 새파란 후배의 죽음에 그 조치가 잘 된 일이라며 이야기하였을 뿐이다. 그리고, 그 죽음에 당연하게도 "진실"인양 찬양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더더욱 잘못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바라보게 되었다.
우리가 충성해야 할 것은 "사람"이 아니고, "조직"이 아니었다. 분명 최악의 상황에서 "나" 자신과 "나 자신"이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옆의 "전우" 밖에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갔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우리는 충성을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상은 그러하지 않았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바뀌진 않았다. 그리고 난 좌천된 뒤 조용히 군 생활을 마무리하면 되겠단 생각을 했으나, 마침 그날 부대에 큰 화재가 났고, 그 화재의 이유는 정말 어이없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한 부사관이 자신이 구입한 차량의 기름 값을 아끼 끼기 위해 부대 치장 장비의 휘발유를 빼내던 도중 담배 한 대를 피우다 화재를 낸 것이었다. 이 것이 나의 첫 일과였다. 그리고 난 이러한 것들과 싸워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