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편견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의 그릇된 신념 때문일까? 일부 사람들은 자신의 그릇된 신념이 반드시 옳은 판단이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종교에 대한 신념도 그러하고, 정치에 대한 신념도 그러하다. 어찌 보면 그러한 그릇된 신념은 “나이”라는 권위에 의해 그러한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그래서 자신의 그릇된 신념에 논리적 뒷받침을 하기 위해 “나는 절대로 그렇게 살지는 않았다.”라는 부연 설명을 늘 덧 붙인다.
하지만 그건 “편견”이라기보다는 고집의 결과이다. 사실 나는 절대로 그렇게 살지는 않았다는 이야기는 “경우 없이 살지는 않았다.”라는 자신의 논점이 먼저 선행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 “경우 없는 행위”에 대한 정확한 논의가 없기 때문에 늘 대화의 결과는 맴돌게 된다. 그리고 그 불미 스러 일에 대한 결론은 “내가 오래 살았기 때문에…”라는 권위를 다시 한번 덧 붙인다.
우리는 그 부분에서 늘 놓치게 된다. 나보다 더 어린아이를 통해서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다. 언젠가 5살짜리 둘째 아이가 신발을 만지고 노는 걸 보고 왜 더러운 걸 만지냐고 혼낸 적이 있었는데, 나중에 둘째 아이는 언니도 바쁘고, 엄마 아빠도 바쁘니 자기가 대신 신발 정리를 해 준거라 이야기한다. 사실 그 부분은 내가 놓친 경우다. 아이의 선의에 찬 행동을 우리는 우리의 시각에서 ”편견“이라는 필터를 통해서 바라보았을 뿐이다. 분명 5살짜리 둘째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음에도 어른이란 이유로 그 가르침을 놓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자신의 권위와 믿음이 무너지는 경우 더욱 강하게 발생한다. 젊은 사람들은 분명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몇 년이라도 더 경험한 나의 삶에 비추어 보았을 때 옳은 선택을 해야 한다는 믿음의 결과로 행동을 실행하게 된다. 당연히 그 행동이 잘못된 행동이라면, 그 결과는 단지 “한 부분”일뿐이며 실제 그러한 행위의 악의는 없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강조하는 단어. “난 경우 없이 살지 않았다.”
요 며칠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 단지 한 사람의 어리석은 믿음과 자신의 편견, 그리고 그 편견에 대한 사고의 결과가 무너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행한 행동의 결과였다. 그리고 그 믿음에 대해 정정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존재하였지만, 다시 한번 “경우 없이” 살지 않았다는 신념 때문에 그 믿음에 대한 새로운 기회를 잃어가게 된다.
아무리 나이가 많더라도, 아무리 많은 경험을 했더라도 그 경험은 모든 경험의 결과는 아니다. 단지 수많은 상황 중에 일부일 뿐이다. 그러니 그 믿음에 대해서는 좀 더 열린 마음으로 다양한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요 며칠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리고 한 동안 글을 쓸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분명 그 일의 문제점을 알고 있고, 해결할 방법이 있기 때문에 다시 한번 시간을 가지고 기다려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 해답은 아이의 시각에서 분명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니 만큼 그 답을 찾아가고자 한다. 단지 “경우 없는” 상황은 존재하지 않는다. 비슷한 경우의 문제만 직면했을 뿐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