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학교"라는 이름이 사라진 시대
요즘도 비슷한 개념의 반이 존재하겠지만, 나의 중학교 시절에는 "개별학습반"이라는 반이 존재했다. 흔히 이야기 하는 수업 부적응 학생들, 자폐증, 다운 증후군 아이들을 한 반에 모아놓아 특수 교사 주도하에 교육을 진행한다는 취지였다. 그 취지는 한 편으로는 국민 모두가 교육의 혜택을 충분히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을 수도 있지만, 한 편으로는 그 이면에서 발생하는 "차별"과 "멸시"에 대한 교육은 여전히 존재했었다.
초등학교 2학년 시절. 머리를 가만히 두질 못하고 항상 흔들며 "어어! 어어!" 하는 소리를 내는 친구가 한 명 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 아이는 자폐증 혹은 서번트 증후군을 가지고 있는 아이였던 것 같다. 자신만의 소리를 내고, 수업을 집중하지 못했던 친구지만 그래도 숫자 계산을 하거나 외우는 것은 누구보다 뛰어났다.
"야! 2035년 12월 7일은 무슨 요일이야?"
그 친구는 달력을 통째로 외운듯 했다. 그래서 년도와 월, 일을 이야기 하면 자동으로 그 날은 무슨 요일이라고 이야기 했다. 4자리 혹은 5자리수 곱셈이나 나눗셈은 그 친구에게는 식은 죽 먹기였다. 물론, 그 외 것들은 아무것도 하질 못했으니 당연히 사회 생활을 하는 것이 불편했을 것이다. 별도 그 친구를 위해 교육을 지원해 줄 수 없었는지 매년 학년이 바뀌고 그 친구의 반 담임이 되는 것은 왠지 모르게 선생님 나름대로 벌칙을 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2학년이 지나고 그 뒤로 그 친구를 본 것은 5학년이 되어서였다. 반갑다기 보다는 좀 이상한 친구가 또 같은 반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신기했다.
담임 선생님은 개학 첫 날. 자폐증 애를 전담으로 담당할 친구가 있으면 손 들라고 했다. 난 자신있게 손 들었다. 그 친구를 2학년 때 본 기억이 있으니, 분명 잘 지낼 수 있으리라 생각을 했다. (이제 와서 이야기 하지만, 그건 내 자만심이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난 아무리 분단이 바뀌고, 자리가 바뀌더라도 항상 그 친구와 같은 짝궁이 되어야 했으며, 그 친구가 등교를 하면서 부터 하교를 하는 그 순간까지 모든 것을 책임져 줘야 했다. 그래서 반 아이들은 내 별명을 "보디가드"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화장실도 같이 갔고, 밥도 같이 먹었다. 하지만 대화가 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자폐증 아이와 대화를 할 말 주변이 뛰어나지 않았던 것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 친구가 수업시간이나 쉬는 시간에 어떤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잘 케어해야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잘 달래주는 것이 내가 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 기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1학기가 끝날 무렵. 그 친구는 어떤 문제 때문이었는지 갑짜기 소리를 치며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달래 보기도 했지만 도무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 시간이 무려 30분 정도 지났을까? 뒤에서 조용히 지켜 보던 선생님은 그 친구가 안정되자 마자 나를 부르더니 내 뺨을 먼저 때리며 말을 시작했다. "애 하나 관리 못해?"라는 말을 시작하며 자폐증 친구를 관리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분풀이를 나한테 하는 듯 했다. 그리고 그 날 이후 자폐증 친구의 보디가드는 내가 아닌 부반장이 하게 되었다.
부반장은 보디가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자폐증 친구가 고개를 들면 주먹으로 얼굴을 때렸고, 소리를 조금이라도 내리면 뒤통수나 배를 때렸다. 밥을 조금이라도 더럽게 먹거나 흘리며 먹어도 때리기 일수였다. 그리고 선생님은 너무나 흡족해 했고, 그 자폐증 친구의 눈은 점점 촛점을 일어갔다. 늘 손가락을 흔들며 고개를 까딱 거리지만 어떠한 말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기만 해도 수 차례 주먹을 날렸으니 그 만큼 좋은 교육은 없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 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그 친구는 개별학습반이라는 학습 부진아나 자폐증, 다운증후군이 있는 아이들과 함께 수업을 들었지만, 초등학교 5학년 이전 초롱 초롱했던 눈동자를 다시는 보진 못했다. 더 이상 숫자계산이나 달력 날짜의 요일을 맞추는 일도 하지 않았다. 단지 잘 하는 것은 누군가 가까이 다가가거나 손을 들기만 하면 반사적으로 하는 이야기 뿐이었다.
"때리지 마세요."
극단적인 예가 될 수 있겠지만, 그 시절 약자를 위한 보호장치는 아무것도 없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등록금을 내지 못하는 아이가 있다면 선생님은 종례 시간에 당당하게 그 아이의 이름을 말하며 등록금을 내라고 말했다. 급식을 먹거나 도시락을 싸지 못하는 아이는 이름표 뒤에 붉은색 하트 스티커를 붙여두고 그 아이에게 학교는 불쌍한 너희들에게 도시락이라는 은공을 내린다는 것을 당당하게 자랑했다. 조용히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당연히 운동장에서 선착순 달리기를 하거나, 팔 벌려 높이뛰기와 같은 운동을 하며 구령을 제대로 외치지 못할 경우 그 아이 잘못으로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며 야유를 보내는 것이 교육의 일상이었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반 아이들의 성적은 1등부터 꼴지까지 매겨지며 그 아이의 모든 행동에 대해 모욕을 주는 것이 일상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중학교 3학년 시절 담임 선생님은 인문계 고등학교를 진학하지 못할 몇 몇 아이들을 따로 불러 조회 시간이 끝난 후 따로 창고에서 "너희들 하고 싶은 것" 알아서 하라고 지시했다. 충분히 인문계나 특목고를 갈 수 있는 아이들의 공부를 방해할 것 같은 노파심 때문이라 했다. 그 창고에서 담배를 피우던, 서로 싸우던 하는 것은 알아서 할 문제라 했다. 단지, 그 아이들이 해야 할 일은 "절대로 공부 잘 하는 애들을 방해하지 말 것." 이었다. 그리고 그 선생님은 그러한 노고를 인정 받았는지, 여러 신문에서도 극찬을 하는 진로 상담 교사라는 하나의 분야를 개척했다고 했다. 어떠한 교육에서든 약자에 대한 배려 자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경쟁이 최고 이며, 그 안에서 견디며 생존하는 것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 했다.
스텔라는 억울한 학폭 신고를 당한 이후, 학교에서는 "조사"라는 절차 조차 없이 피해 학생과 분리를 해야 한다는 조치를 내렸다. 그래서 1주일 동안 학교를 등교할 수 없었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과학 수업을 좋아하던 아이는 그 수업을 직접 들을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힘든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보다 더 어려운 순간은 스텔라가 억울하다는 것과 그 일에 전혀 연관되지 않았으며, 일부 가해자들의 주장에 의해 가해자로 둔갑이 되었다는 그 사실에 대해 명확하게 인지를 하고 있었지만 어떠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CCTV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스텔라가 그 자리에 없었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력이 있는 피해자의 심기를 거스른다는 이유로 CCTV의 열람이나 제출조차 거부했다.
그와 함께 스텔라를 더 힘들게 한 것은 스텔라를 모함한 아이들, 그리고 스텔라가 가해자라 거짓 주장을 한 아이들과의 분리조차도 학교에서는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한 분리 조치를 들어주게 되면, 모든 아이들의 분리와 반 교체를 다 들어줘야 한다는 것이 학교측의 논리였다. 그리고, 학교는 어떠한 증가거 없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해자 혹은 피해자라 주장하는 아이의 무고성 학폭 신고를 여과 없이 받아들였다. 단지 학교에서 여전히 억압받고, 억울한 무고의 피해를 받는 약자의 입장이지만, 단지 학교 입장에서는 성가신 존재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이 글은 학교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 모든 순간에도 밤이 찾아올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이야기 하고자 했다. 사실, 이 모든 것의 밤이 찾아올 수 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최초 한 사람의 인격을 형성하고, 사회의 문화와 윤리적 규범을 규정짓도록 만들 수 있는 학교의 교육 환경에서 부터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 이야기 하고 싶었다.
분명 교육의 현장 어딘가에서는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하며, 제자들을 위해 열심히 헌신하는 참된 스승도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실제 대부분의 교사들은 자신은 직업인이며, 서울대 몇 명 더 보내고 - 실업계 몇 명 더 보내 받게 되는 보너스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도 그런 경험을 많이 했다. 중3 담임 선생님은 내 성적이 충분히 인문계를 진학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상고를 가라고 부추겼다. 그리고 재수를 한 뒤 대학 원서를 작성하기 위해 진학 담당 선생님을 찾았을 때, 자신이 보내기로 점 찍은 서울대 진학 예정 아이들의 기운을 뺏는다는 명목으로 나에게 지방 사립대를 쓸 것을 지시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충분히 SKY 중 K나 Y를 진학할 수 있는 성적이었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그 모든 것들이 단지 "성적"이 좋다면 모든 것을 다 용서해주는 환경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친구를 괴롭히고, 돈을 빼았고, 때리더라도 그 친구가 전교 1등이고 혹은 서울대를 진학할 수 있는 친구였다면 그 모든 것이 면죄부였다. 그리고 스텔라가 다니던 그 학교에서 가해자로 지목된 아이들은 부모의 열성적인 교육열로 영어와 다른 수업에 높은 성적을 보여주었다. 당연히 그러니 그 아이들은 단지 "별난"아이일 뿐이지, 잘못한 것은 아니었다.
스텔라는 그 사건 이후로 성적이 떨어졌고, 어느 순간 자신있고 - 재미있어 하던 과학 성적이 60점대 까지 떨어졌다. 물론, 가해 학생은 여전히 웃으며 떠들고 있었다. 스텔라의 억울한 상황에 대해서는 어떠한 배려도 없이 "하고 싶은데로 마음껏 하세요."라는 이야기만 했을 뿐이다. 그 아이의 상황, 환경에 대한 배려보다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