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안 만큼 더욱 힘든 학교 밖이라는 장소
참 짖궂은 아이들이 많았던 나의 학창 시절은 화장실이란 곳을 가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했다. 쉬는 시간만 되면, 누구나 할 것 없이 불이 났을 정도로 연기가 꽉 차 오를 정도로 담배를 피워댔다.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그 곳을 지나가도 그냥 못 본척 하기 일쑤였다. 그러다 몇 몇 정의감이 넘치는 선생님은 화장실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화장실 밖을 나오는 친구들의 뺨을 때리며 일렬로 줄을 세우곤 했다. 물론, 처음 화장실 밖을 나오는 친구들은 정말로 소변이나 대변이 급해서 갔던 친구들이다. 진짜 담배를 피우기 위해 들어간 친구들은 쉬는 시간이 끝날 때 까지 한 대 혹은 두 대를 피우는게 그들의 일상이었다.
이미 학생들 사이에서도 누가 담배를 피우고, 누가 일진인지 다 알고 있었다. 당연히 선생님들도 그 정보를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애써 무시했다. 일진들에게 준 권한과 책임을 통해 학교는 어떠한 문제 없이 잘 움직이고 있었으니 억지로 그 관계를 무너뜨리려 하는 것은 애써 만든 평화로운 순간을 무너뜨리는 결과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는 아이들의 모습은 선생님 눈에는 보이질 않았다.
그런 상황과 별개로 학교에서는 나름 재밌는 일들을 많이 하곤 했다. 체육대회가 있었고, 축제가 있었다. 나름 써클에서 선배들의 지도 아래 1년 동안의 결과를 보고하는 축제는 타 학교를 초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장점이 있었다. 그리고 불량써클과 일반써클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선배들의 가르침 아래 우리는 줄빠따 라는 연례 행사와 음주 대면식과 흡연이라는 문화를 함께 공유하면서 고등학교 3년을 보내왔다. 매체의 종류는 중요하지 않다. 과학반이든, 밴드부든 어차피 그 써클에 열정을 다하는 선배도 일부 존재하지만 그렇지 않는 선배들도 대 다수 존재하기 때문이다.
난 천체 관측을 좋아해서 지구과학 써클을 가입했지만, 2학년 / 3학년 선배들 중 천체 망원경을 다룰 줄 알거나, 혹은 천체 망원경으로 별을 관측할 줄 아는 선배는 아무도 없었다. 단지 **여상 봉사활동 써클과 1학년 하고 한 달을 막 넘긴 시점에 대면식이란 것을 했고, 아무 생각 없이 끌려가 그 여상 동기와 운동장을 미친듯이 돌았으며, 소주방을 빌려 식초보다 더 시었단 김치찌개에 소주를 억지로 먹으며 하루를 보낸 기억이 났다. 내가 생각했던 단체의 모습과는 너무 차이가 있었다.
풍물패를 가입했던 동기도 마찬가지였다. 꽹과리나 징을 연주하는 시간보다 선배들의 개똥 철학을 들으며 운동장을 돌고, 엉덩이를 맞고, 앉았다 일어나기를 하는 체벌을 겪으며 1년이란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밴드부도 마찬가지였고, 다 마찬가지였다. 단지 지도 선생님이 계시긴 했지만, CA시간에 잠깐 인사하며 "재밌게 놀다가라." 하는 것이 그들의 일상이었다. 그나마 지구과학 담당 선생님이 좀 별나서 그런게 아닌가 햇지만, 존경했던 화학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나이가 60을 지긋이 바라보던 생물 선생님은 CA시간에 담당 학생들의 얼굴 조차 보질 않았다. 다 알아서 잘 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다 우연찮게 학교에 붙은 포스터를 하나 보게 되었다. 문체부 산하의 모임이었는데, 당시 나는 GW-Basic이나 다른 컴퓨터 분야를 독학으로 공부하며 흥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관심이 가는 모임이었다. 당시에는 상당히 많은 모임들이 있었다. 네틴이라는 청소년 인터넷 언론도 있었고, 나는 청소년 정보 감시단이라는 모임에 가입을 했었다. (그 외에도 상당히 유명한 조직인 청소년 인권 위원회도 있었으니, 그 단체를 잘 이끌었던 친구는 서울대 수시 합격이라는 결과를 얻기도 하고, 명성도 얻었으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문제는 그 조직 혹은 모임을 가입하는 것 조차 학교의 판단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이다. 모집 공고를 붙이는 것도 학교의 재량이고, 신청서를 전달해 주는 것도 학교의 재량이었다. 당연히 알음 알음으로 몰래 가입을 시키는 경우도 있었으며, 혹은 "니 까짓놈이 그딴거 해서 뭐해? 공부나 해." 라는 말로 가입 조차 못하게 하기도 했으니 그 선택의 몫은 역시 선생님의 몫이었다.
초등학생 시절, 3대 조직이라 할 수 있는 아람단, 보이스카웃, 걸스카웃의 가입 조건은 반에서 1 ~ 2등이었다. 그리고 중학생이 되면서 부터 보이스카웃이 되기 위한 조건은 최소한 내가 다니던 학교는 일진이 되어야지만 가입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니 난 단 한번도 아람단이나 보이스카웃, 혹은 걸스카웃과 같은 것을 해본적이 없었다. 그저 우연찮게 전단지가 붙은(아마 선생님이 미처 파쇄하지 못한 그 순간에 보게 된지도 모르겠다.) 청소년 정보감시단이 유일한 모임이었다. 이런 모임 활동은 나름 자부심이 있는 모양이다. 직장 생활 중 만난 한 동료는 네틴이란 활동을 고등학생 시절 했다는 것 자체를 너무나 자랑 스럽게 생각했다. 당시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 네틴 활동을 하던 친구는 단 한 명, 전교에서 10등 안에 들던 별명이 "야만인"이란 공부 잘하던 친구였다.
그저 선택할 수 있는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학교의 써클은 말이 써클이지 불량하거나 혹은 불량하지 않거나, 어쩌면 그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던 존재였으며, 대외 모임의 경우는 내가 무언가를 선택하기 위해 손 드는 것 조차 자유를 주지 않았으니, 그나마 선택할 수 있는 겻은 교회나 성당의 성가대나 종고등부 모임이 전부였다. 그러니 다양한 경험과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원천적으로 차단되었다.
우리나라의 학교는 어떠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는다. 단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학교를 조용히 다니며 - 조용히 졸업할 수 있는 선택일 뿐이다. 그 외 선택에 대해서는 사치일 뿐이다. 이미 학생부에 좋은 결과를 만들기 위한 설계된 모임 밖에 없었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30년 전만 해도, 봉사활동 부터 시작하여 대외 활동까지 그 모든 것들은 "좋은 학교"를 갈 수 있는 아이들의 몫이었다. 글 쓰기를 좋아하던 나 조차도 교내 글짓기 대회 이상을 나가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물론 조직의 문제는 밖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짧은 글 하나 기고를 하고 싶더라도 이미 써야 할 친구들의 이름은 정해져 있었다. 난 단지, 그 아이들의 "아이디어"만 제공해 줄 뿐이었다. 그러니 난 2년 정도 열심히 활동하다 뒤도 안돌아보고 나갔다. 그리고 내 존재는 당연하지만 잊혀져 버렸다. 어딜 가도 동일한 조직이었으니 말이다.
초등학교 방과후 수업에 대한 선택의 권리도 존재하지 않는 모습이 현재의 모습이다. 프라모델 만들기 반을 선택하려 하더라도 그 선택은 선착순 혹은 선생님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 한다. 특히 외부 행사나 모임에 대한 가입 조차도 30년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단지 선생님의 선택에 의한 것이며, 그 선택을 반발하려 한다면 "왜 너는 튀려 하는 거니?" 라는 이야기로 아이의 기를 죽이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나마 학교 안에 있던 모임 조차도 그 안에서는 권력이 형성되어 있다. 학부모회를 통해 학교라는 하나의 권력기관은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모습들을 바라보며 꼭 한 마디씩 듣게 된다. "그 아이의 어머니가 그래도 XXX회 학부모 회장이시거든요."
그런 모습 속에서 스텔라를 가해자라 지목한 학부모는 XXX회 학부모 회장이라는 명목하에 언제나 학교를 방문했다. 그리고 늘 팔짱 끼며 스텔라가 속해 있는 반을 바라보며 암묵적인 위협을 가해왔다. 단지 "내 아이가 잘 지내는지" 바라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응 이미 스텔라에 향해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학교는 딱 한마디의 변명으로 일관 했다.
"XXX회 학부모 회장이신데 우리가 무슨 수로 막습니까?"
대한민국에서 이름있는 한 사립 초등학교의 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