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불리는 장소. 그 곳은 학교
어느 곳이나 강자와 약자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물리적인 힘이 되었건 혹은 사람을 끌어당길 수 있는 매력이 있던 어떠한 역량이 되었건 그건 강자로서 자리 잡을 수 있는 순간이다. 적어도 사회 생활은 그러했다. 학연, 지연이 연결되면서 그 안에 "네트워크"라는 라인이 더해진다. 그리고 그 라인을 통제하는 사람은 그 것으로 자신의 권력을 열심히 뽐낸다.
그 안에서 권력에 대한 표현은 때론 폭력적이기도 하고, 잔인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 권력이 표현이되는 선은 분명 정해져 있다. 누군가를 고통을 줄 지언정 육체적인 고통을 가하지 않으리라는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 장소를 잠시 옮기면 어떨까? 바로 학교라는 곳이다.
내가 처음 국민학교를 입학하던 그 시절. 88올림픽의 열기를 띄던 그 시절. 결국 강자는 선생님과 선생님이 지정한 몇 명의 아이들이었다. 선생님은 스승의 날 부터 시작하여 열심히 선물을 받아냈으며, 그 선물의 범위에 따라 친구들의 위치는 정해졌다.
물론, 그 선물이 모든 것을 정하진 않았다만, 학교 교문 앞에서 떡볶이 10개에 100원 하던 그 행복은 또 다른 권력이 발현되는 순간이었다.
"선생님! OOO가 학교 앞에서 떡볶이 사 먹고, 군것질을 해요."
학교 앞에서 떡볶이를 사 먹는게 교칙에 크게 위반되는 것도 아니고, 학교 앞 문구점에서 사탕이나 과자와 같은 100원도 안하던 간식을 사먹는 것이 학업에 큰 지장을 주는 것도 아니었건만 그 순간은 이미 학교에서 "불량학생"으로 낙인이 찍히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한 판에 50원, 100원 하던 오락실을 들리는 것도 불량학생이라는 증명을 하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선생님은 교칙으로 지정하여 "절대로 학교에 돈을 가져오지 말 것"을 지시하였으며, 돈을 가져온다면 당연히 반장이 되었건 몇 몇 아이들이 정당한 권력에 의하여 돈을 강탈할 수 있는 권리도 주었다.
그 명분은 불량식품을 먹지 않고, 불량한 장소를 가지 않기 위한 사전 선도 차원이라고 하였지만, 그 사전 선도의 범위를 지정하기 위해 아이들의 지갑을 뒤지고 가져가는 것은 과연 누가 부여한 정당한 권리였는지 조차 어느 누구도 인지 못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돈도 과연 선생님이 정당하게 기록한 후, 2학년이 올라갈 시점에 돌려주었는지? 아니면 그 돈을 걷었던 아이들의 몫이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날은 우연찮게 내 바지 주머니에 400원 정도의 돈이 있었다. 물론, 학교 앞 떡볶이에 야끼만두를 찍어 먹는건 정말 큰 행복이었지만, 당시 4학년이던 누나와 함게 먹지 않으면 그 맛을 느낄수도 없었다. 당연히 주머니에 들어있던 400원은 언젠가 집에 찾아온 손님이 나에게 주었던 돈이었고, 그 돈을 미처 다른데 챙기지 않고 주머니속에 넣어두게 되어 가져가게 된 돈이었다.
하지만 그 날은 여지없이 아이들의 주머니를 뒤지던 몇 몇 선도하던 친구들에게 걸린 순간이었다. 내 주머니에 있던 400원은 바로 선생님게 이르는 수단이었고, 난 주머니에 400원이 있다는 죄목으로 엎드려 뻗쳐서 엉덩이를 맞았으며, 400원도 그 선도하던 아이들에게 뺒기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나에게서 400원을 가져갔는지 조차 이름이나 금액도 적지 않은채 자신의 주머니속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물론 그 아이들은 언젠가 떡볶이에 오뎅갈비에 야끼만두와 삶은 계란을 푸짐하게 먹는 모습을 보았다. 그 돈이 내 돈이었는지? 아니면 부모님이 용돈을 많이 주었던 것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러한 권력이 이후 합법적인 권력이 되었으리란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난 2학년 2학기때 청량리에서 면목동으로 전학을 갔으며, 면목동은 열악한 교육 환경 덕분에 오전반 / 오후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진행헀었다. 그나마 오후반일 땐 늦잠을 잘 수 있어서 편했으며, 오전반일 땐 일찍 수업을 끝낼 수 있으니 편했다.
당시 어머니는 없는 돈을 아껴가며 우릴 먹이려 하셨는지, 늘 점심이나 저녁은 갱시기죽을 먹을때가 많았다. 국수 한 움큼에 김치, 그리고 물 한바가지, 밥 한술. 그것을 커다란 냄비에 푹 삶아서 국수라도 한 가닥 먹게 되면 마치 라면을 먹듯 호로록 먹을 수 있어 행복하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그전에 빼았겼단 400원은 우리 가족이 1주일은 풍족히 먹던 돈이었다. 120원짜리 안성탕면이나, 한 모에 100원 하던 두부. 혹은 콩나물 50원 어치면 갱시기죽이 더욱 풍족해지던 시절이었다. 아무래도 시큼한 김치 냄새보단 라면 스프가 조금이라도 들어갔을 때 맛은 정말 풍족했다. 두부라도 몇 조각 들어가고, 콩나물 한 움큼이 들어가면 그것 만큼 맛있는 음식이 없었다.
하지만 그 시절은 폭력이 난무하던 시절이었다. 주머니에 들어있는 돈이 얼마이던 빼앗아야지만 직성이 풀리던 아이들. 당연히 그 돈을 가져가는 것 자체가 두려울 수 밖에 없던 아이들. 학교에서 무언가 사소한 행복을 찾는건 사치라 하더라도, 맛있는 떡복이나 좋은 물건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조차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 학교의 모습이었다.
그나마 채울 수 있는 것들은 서열을 매기기 위해 순서를 매기며 "공부"하라는 지시에 순응하는 것 뿐. 하지만 그 마저도 고3 담임 선생님의 얄팍한 포인트와 인센티브에 무너진 아이들이 한 두명이었던가? 그 당시만 하더라도 대학 입시 원서를 쓰기 위해서는 담임 선생님의 서명이 필요했는데, 자신이 지정한 지방대 몇 개를 쓰지 않으면 절대로 원서를 쓰지 않겠다고 버티던 선생님.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학교 입학 처장이 선생님들을 관광버스로 대절해 학생 몇 명을 입학시켜주면 성의를 잊지 않겠다고 이야길 했다.
"야이 새끼야! 너가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가던, 지방에 가던 어차피 취업 못하는건 마찬가지야."
과연 마찬가지였을까? 그렇다면 왜 선생님은 자기 반에 서울대 학생이 한 명이라도 더 들리기 위해 그렇게 노력하였을까? 서울대라 하더라도 그 친구가 원하는 전공과 상관 없이 성적에 맞추어 서울대를 선택하도록 지시하던 선생님의 모습은 왜 지금도 잊혀지지 않을까? 그리고 한 편으론 앞 길이 창창하던 그 친구를 왜 지방의 사립대를 가도록 했었는지? 당연히 그 선생님은 상위 3% 정도의 수능성적표를 들고 온 나에게도 동일한 이야길 했다.
"어차피 다닐 학교. 그냥 지방에서 편하게 다녀."
참 우스웠다. 고등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이란 존재가, 단지 자신의 지갑에 돈 몇 푼 때문에 그 이름도 듣지 못한 대학을 가라고 강요를 했으니 말이다. 총 4개의 선택을 할 수 있었던 학교에서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똘똘이 스머프로 불리던 반장은 서울대 철학과 수시 합격을 하는 순간 눈물을 흘리며, 손수 칠판에 적어가며 "축! OOO 서울대 수시 합격"이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으니 말이다.
대학 졸업 후 10년이 지난 시점.
난 그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그리고, 1인분에 20만원이 넘는 일식을 사 드리며 그 간의 근황을 물어보았다. 당연하지만, 똘똘이 스머프는 내가 대학을 졸업한 후, 장교 생활을 마치고 직장을 다니며 이제 막 과장 직급을 얻은 그 순간. 그 친구는 그제서야 학부를 졸업했다고 했다. 선생님의 희망이며 자랑이었던 그 친구의 미래는 그러했다.
우리는 그렇게 학교를 졸업했다.
스텔라가 학폭의 가해 관련자로 분류된 그 날.
나와 와이프가 적은 수 천매에 달하는 여러 문서를 단 한 페이지도 읽은 선생님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스텔라가 그 곳에 없었다는 것을 명학하게 알았던 ㄱ선생님은 개인의 권리라는 이유로 증언을 거부하였으며, 교감 선생님은 당사자들끼리 풀어야 할 문제라는 이유로 어떠한 도움도 주질 않았다. 그러는 동안 피해자라 주장한 아이는 자신의 주장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는지? 수 많은 아이들을 학폭 가해자로 신고하였고, 행정심판을 진행하였다.
관내 90여개의 학교 중, 1학기동안 심의한 96건의 학폭 신고.
그 피해자라 주장한 아이가 신고한 학폭 건수는 무려 20건이 넘었다.
그 신고에 대해 학교는 수 많은 특혜를 제공해가며 그 학폭 신고를 지원해주곤 했다.
가장 행복하고, 아무 생각없이 학교를 다녀야 할 초등학교 4학년 학생에게 벌어진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