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이 지난 아침. 무언가를 기다리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커피 전문점으로 달려간다. 늘 시키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샷 추가를 기대하려다, 새로운 메뉴가 내 눈길을 끈다. "트리플 샷 블랙" 이름부터 참 독특하다. 일반적인 아메리카노는 샷 두 개를 넣지만, 이 커피는 블랙 노트 2개 + 아로마 노트 1개를 넣은 트리플 샷이라 한다. 그리고 적혀 있는 주의 문구. "고 카페인이니 주의하세요." 분명 무언가 좀 다른 맛을 만들어 내는 것일까? 호기심에 주문을 해 본다.
바리스타는 분주히 원두를 간다. 투썸플레이스의 간판 메뉴인 블랙노트나 아로마 노트가 아닌 트리플 샷 블랙은 두 개의 원두를 섞어야지만 맛이 나온다 한다. 물론, 나는 어느 원두가 맛있는지를 잘 모른다. 그냥 카페인의 맛에 취해, 혹은 씁쓸한 맛에 취해 한 잔 마실 뿐이다. 내가 마시는 아메리카노는 졸린 시간을 잠시 벗어나기 위해 털어 넣는 쓴 물약과 같은 존재일 뿐이지, 여유를 가지며 마시는 그런 다과의 성격은 아니었다.
내 앞에 두 손님은 따뜻한 아메리카노에 달콤한 케이크를 주문한다. 이른 아침, 잠시간의 여유를 즐기기 위해서인지, 혹은 커피 한잔에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인지 모를 일이다. 나도 잠시 20분 정도 여유가 있어 한 잔 주문했으나, 케이크까지 먹을 마음의 여유는 허락하질 않는다. 단지, 시간을 때우기 위해 - 잠시나마 앉아있을 곳을 찾기 위해 선택을 하였는지 모른다. 커피 전문점의 다양한 메뉴가 있지만, 내 눈에는 항상 아메리카노만 눈에 들어갈 뿐이다. 그리고, 따뜻한 커피 한 잔에 향에 취해봄직하지만, 마음이 급한 나머지 항상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켜 빨대를 있는 힘껏 들이킬 뿐이다. 참 여유 없이 재미없게 살아온 인생이다.
Zoom 화상 회의를 접속하고 회의가 시작될 때까지 기다린다. 불과 몇 년 사이에 기업의 환경이 바뀌었다. 과거처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회의를 하지 않는다. 시간만 맞는다면 다양한 장비를 활용하여 회의를 한다. 즉, 그만큼 시간의 여유가 사라진다. 언제 어디서나 긴장을 해야 하는 순간. 더 이상 커피 한 잔과 케이크 한 조각의 여유를 느끼는 것은 사치가 된 지 오래다.
그래도 삶에 여유를 가져보려 노력을 한다. 가방 한 켠에는 항상 카메라를 넣어본다.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찍어보자는 마음으로 들고 다니는 수동 카메라. 초점과 조리개, 셔터스피드 모두 수동으로 조절을 해야 하니 사진 한 장을 찍기 위해 최소 30초간의 긴 호흡이 필요하다. 거기에 더한 필름 사진 한 컷. 36장의 사진이 만들어내는 여유가 잠시 동안의 시간의 여유를 만들어내는 것도 또 하나의 방법이라 할 수 있다.
항상 정신없이 지내왔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주말조차 여유라는 것을 가져보질 못했다. 항상 휴대폰을 들고 다니며, 회사에서 무슨 연락이 올지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커피 한 잔 마실 여유가 없어, 얼음 듬뿍 넣은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들이킨다. 분명 차나 커피는 뜨거울 때 마셔야 향을 느낄 수 있다고 하는데, 내가 마시는 커피는 한 입에 털어 넣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한다.
언젠가부터 외출을 할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텀블러에 얼음 가득 채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통 들고 간다. 물을 마시듯 습관적으로 마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그러다 문득 맘에 드는 순간을 찾으면 가방 속에서 카메라를 찾아 꺼낸다. 그리고 이제부터라도 따뜻한 차 한잔의 향기를 느끼며 여유를 가져보자 생각해본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기엔 이미 40대에 접어들기 시작한다.
삶의 여유 없이 정신없이 지내온 지난 10년. 이제는 조금이나마 한 숨 돌리며 여유를 가지며 지내올 때가 아닌가 싶다. 너무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지쳐버린 것은 아닌지? 다시 한번 가방 속의 카메라를 꺼내 뷰파인더를 넌지시 바라본다. 그리고, 한 텀 쉬며 여유를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