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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없고 시간만 있을 땐 거리를 걸어보자

by 별빛바람

해외여행을 다니다 보면 종종 이쁜 거리에서 사진을 찍곤 한다. 아무래도 이국적인 분위기 때문에 낯선 곳에 왔다는 착각이 더욱 강렬하게 뇌리에 꽂히기 때문이다. 가까운 홍콩만 하더라도 2층 버스와 트램이 움직이는 모습이 내가 지내는 곳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특히, 간판에 적힌 뜻 모를 무수한 글자들. 만약 그 내용이 "할머니 순댓국"이나 "컴퓨터 세탁소"였다면 우리에겐 별 감응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주 보질 못하는 그런 간판이라면 무언가 색다르단 느낌이 들지 않을까?

홍콩 트램(Canon EOS 60D. EF 35/2.0)
IMG_4506.JPG 홍콩의 어지러운 간판들(Canon EOS 60D. EF 35/2.0)

흔히들 여행을 가는 목적 중 하나는 "휴식"이라는 의견과 "새로운 경험"을 하기 위함이라는 두 가지 의견이 충돌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사실 여행의 기능은 둘 다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분명 지친 일상 속에 우리가 자주 보던 무언가(일이 될 수 있고, 나를 괴롭히는 교과서가 될 수 있으며, 지긋지긋한 인간관계일 수 있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일탈의 욕망이 가장 먼저 작용하는 것이 사실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한 동안 해외여행을 떠났던 것도 내가 모르는 환경 속에서, 잘 모르는 사람들 속에 있고 싶었던 욕망이 컸기 때문이다. 아마 그 시기에는 나도 많이 지쳤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두 번째 "새로운 경험"은 첫 번째 의견에 대한 파생된 결과임을 우리는 쉽게 눈치챌 수 있다. 분명 기존의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가장 먼저 작용하여 선택한 여행의 결과, 우리는 새로운 것을 보고 싶은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일 것이다. 물론, 가치관의 차이다. "새로운 경험"은 시각적인 경험이 될 수 있고, 육체적 경험이 될 수 있으며, 정신적 경험이 될 수 있다. 당연히 휴식도 정신적 경험의 일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제주도의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비치배드에 누워 멍 때리기를 하루 종일 하는 것은 정신적이며 육체적인 경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난 여행의 목적에 "새로운 경험"에 좀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며 이 글을 쓰고자 한다. 특히, "새로운 경험"중 시각적인 경험도 하나의 가치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바라보던 간판을 한 예로 이야길 해보자. 항상 걸어 다니다 보던 "간판". 우리 집 앞에 있던 "컴퓨터 세탁소" 간판은 내 눈엔 너무나 익숙한 공간이다. 당연히 몇십 년 동안 같은 간판이며, 사장님은 돈이 아까우니 간판을 보수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한 귀퉁이가 깨져있음에도 우리는 전혀 눈치채질 못하고 있다. 아니, 눈치채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이미 몇 년 혹은 몇십 년 동안 내가 너무나 자주 보아왔던 그 간판이니 말이다. 하지만, 낯선 곳에서 보이는 한 귀퉁이가 깨지고 빛이 바랜 아크릴 간판을 보았을 때 느낌은 어떨까? 분명 우리는 두 눈을 비비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와! 아직도 이런 간판이 있어?" 그리고, 우리는 핸드폰을 꺼내 연신 셔터를 눌러댈 것이다.

L1000411.JPG 골목 1(Leica M-E typ240, Summicron-M 50/2.0 ASPH)
L1000412.JPG 일방통행(Leica M-E typ240, Summicron-M 50/2.0 ASPH)

하지만, 여행을 떠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다못해 가까운 교외를 방문하려 하더라도 차가 있어야 하고, 하루 반나절이라는 시간을 빼놔야 한다. 혹시라도 술을 좋아하는 분과 함께 동행을 한다면, 숙소도 고려해야 한다. 너무 많은 것들을 고민해야 한다. 물론, 나 같은 경우는 즉흥적으로 차를 몰고 스마트폰을 뒤져 눈에 제일 먼저 띄는 맛집을 고르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 성공하는 케이스보다 실패하는 케이스도 더 많기 때문에 항상 여행이 즐겁다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선택을 잘못하면 단지 30분 구경을 하기 위해 차 안에서 3 ~ 4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있으니 말이다. 아이들은 지치고, 조수석에 앉아있는 와이프를 살짝 바라보면 화가 난 모습을 애써 피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돈이 많이 든다는데 있다. 여행을 떠나면 필연적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은 통장의 잔고이다. 나처럼 낯선 곳에 방문하여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경우라면 그 돈은 기하급수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동하는 교통비와 식비만 하더라도 벌써 몇만 원의 돈이 날아갈 수밖에 없다. 물론, 모든 것을 경제적 가치로 평가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새로운 것을 구경하고, 시각적인 경험으로 나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질 수 있다면 몇만 원이 아니라 몇 십만 원을 쓴다 하더라도 분명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이 글의 목적은 돈을 쓰지 않더라도 발견할 수 있는 일상의 새로움을 이야기하고자 함이다.

출근 때는 어려울 수 있지만, 퇴근을 할 때 늘 타던 지하철이나 버스를 잠시 피하고 한-두 정거장 정도 걸어갈 때가 있다. 너무 의자에 앉아있다 보니 살도 많이 찌고 체력도 약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귀에 이어폰을 끼고 걸어 다니곤 했다. 당연히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나 유튜브의 만담을 들으며 걷곤 하였다. 딱히 여유는 없었던 것 같다. 머릿속에서 생각을 하곤 했지만, 그 생각은 어느 정류장에서 버스를 탈 것인가? 뿐이었던 것 같다. 그냥 탁 트인 러닝머신 위를 걷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다른 점이라면 복장이 다르고, 운동을 할 때와는 다른 백팩이 등 뒤에 있다는 것뿐이다.

그러다 한 번 카메라를 들고 걸어가 본 적이 있었다. 그리 거창한 카메라도 아니었다. 중고나라에서 20 ~ 30만 원이면 구입할 수 있었던 Nikon FM2였다. 그 당시 생각으로는 한 두 컷 정도 하늘만 찍으면 될 거란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카메라를 목에 걸고 걷다 보니 마치 내가 동대문으로 관광을 온 중국인 혹은 일본인 관광객이 된 것만 같았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던 포장마차의 테이블, 치킨집의 간판, 횟집의 어항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길가에 펼쳐져 있던 옷들의 패턴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걸어가 동묘 쪽으로 가 보면 이곳은 마치 홍콩의 레이디스 마켓과 같은 모습이었다. 아니, 그냥 내 생각이 그렇다고 생각을 해 보니 바라보는 모든 것들이 새롭게 보였다.

L1000415.JPG 골목 2(Leica M-E typ240, Summicron-M 50/2.0 ASPH)
L1000422.JPG 표지판(Leica M-E typ240, Summicron-M 50/2.0 ASPH)
210625000338310009.jpg Shake Shack(Nikon FM2, Nikkor 50/1.4, Kodak Colorplus 200)
210717000359100021.jpg 흔적(Nikon FM2, Nikkor 50/1.4, Kodak Colorplus 200)

우라기 자주 바라보던 그곳을 새롭게 바라보았을 때, 때론 조금만 생각을 바꾸어 한 블록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골목을 걸었을 때의 느낌. 분명 어린 시절, 낯선 친구네 집을 방문했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분명 익숙하지만 또 다른 배치로 인해 새롭게 보이던 그 골목의 모습. 그 낯선 공간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눈 속에 담아두고 머릿속에 담아두곤 했다. 물론 가끔씩 너무 긴장을 하면 길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긴 했다. 하지만, 이제 나이가 드니 눈보다는 - 그리고 머릿속에 담아두기보다는 카메라를 사용하여 담아두고자 노력한다. 당연히 카메라가 좋을 필요는 없다. 집에 굴러다니는 싸구려 카메라를 들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카메라를 들고 가자는 의미는 익숙하지 않은 공간을 방문하며 새로운 것을 느껴보기 위한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그래도 카메라라도 하나 들고 있어야 관광객의 느낌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또 하나의 장점은 낯선 곳을 걸으며 찾게 되는 수많은 새로운 가게와 식당들이 있다. 이미 몇 년간 살아온 집 근처의 슈퍼와 식당은 너무나 익숙해서 이젠 지루하기만 하다. 하지만, 몇 블록 떨어진 슈퍼나 하다 못해 다이소만 가더라도 우리 동네에는 없는 새로운 물건들을 발견할 수 있다. 몇 천 원 하지 않는 물건이지만 우리 동네에서 팔지 않는 새로운 물건을 살 수 있다는 즐거움도 새롭게 얻을 수 있다. 요즘 나는 몇 블록 떨어진 다이소를 종종 방문한다. 다른 이유는 없다. 그 동네 다이소에만 키링 재료를 팔기 때문이다. 집에 있는 다 쓴 필름 매거진을 버릴까 하다 키링으로 이쁜 열쇠고리를 만들어보니 재밌는 추억이 된 것 같았다. 한 두 개 만들어 주위 사람들에게 선물해주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새로운 골목에서 구입한 색다른 기념품이었다.

L1000903.jpg 쇼핑(Leica SL, Summarit-m, 35/2.5)
L1000940.jpg 작은 물레방아(Leica SL, Summarit-M, 35/2.5)

당연히 새로운 골목에서 경험하는 맛집의 추억도 색다른 경험이 될 수 있다. 학교 앞 골목길 노점상에서 먹던 설탕 듬뿍 들어간 떡볶이는 학교마다 다른 맛이었다. 당연히 만드는 떡볶이 셰프의 입맛이 달랐으니 맛도 다를 수밖에 없다. 붕어빵도 어떤 곳은 좀 더 고소하고, 어떤 곳은 좀 더 달콤했다. 근데 그게 딱 뭐가 차이가 있다고 이야기 하긴 쉽지 않았다. 어차피 그 시절에는 다 맛있었으니까. 하지만 나이가 한 살 더 먹다 보니, 내 입에 맞는 음식이 더 끌리곤 했다. 어찌 보면 조미료 많이 넣은 음식이 더 맛있을 수 있지만, 그래도 그 조미료도 내 입에 맞는 조미료가 있으니 셰프의 선택과 내 입맛이 맞기를 기대해보는 것도 좋은 설렘이라 할 수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순댓국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은 머리 고기가 들어간 순댓국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내장이 듬뿍 들어간 순댓국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또 어떤 사람은 당면 순대가 진짜 순대라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찹쌀로 만든 순대가 진짜 순대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이 조합은 참 묘한 조합이다. 당연히 다진 양념도 풀어서 내놓는 셰프가 있고, 따로 주는 셰프도 있으니 그 조합에 따라 수십 가지의 순댓국이 나올 수 있다. 안에 넣는 토핑도 대파를 송송 썰어 넣을 수 있고, 부추를 한 줌 넣을 수도 있다. 셰프와 내 입맛의 조합이 딱 맞아떨어진다면 그 경험은 정말 색다르지만 환상적인 경험이 될 수 있다. 당연히 이러한 경험은 새로운 골목을 걸었을 때 느낄 수 있는 색다른 경험이라 할 수 있다.

L1010449.JPG 추억의 떡볶이(Leica X1, Elmarit 28/2.8)
L1010447.JPG 우체통(Leica X1, Elmarit 28/2.8)

사실 최고의 여행은 계획을 통해 방문하고자 하는 곳을 찾아가 의도적인 새로움과 의도치 않은 새로움을 함께 경험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만, 때론 이렇게 의도치 않은 짧은 여행도 하나의 큰 매력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여행은 계획도 필요 없고, 굳이 호텔을 예약할 필요도 없고, 항공권을 예약할 필요도 없다. 단지 떠나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된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지하철로 한 정거장 혹은 버스로 두 세 정거장만 더 움직여보면 새로운 모습을 찾을 수 있다. 거기에 더해 여행자의 필수품인 카메라를 들고 간다면 분명 더욱 색다름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럴 여유도 없다면, 항상 다니던 거리를 다녀보는 것도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 늘 지나가던 곳이라 바라보지 못했던 멋진 담벼락과 고즈넉한 골목을 바라볼 수 있다. 때론 자주 보기 힘든 작은 문방구의 천 원짜리 프라모델 장난감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것도 동네 여행의 큰 매력이라 할 수 있다.

000628950038_###.jpg 추억의 문방구(Leica MP, Summicron-DR 50/2.0, Kentmere 400)
000628950040_###.jpg 빨래(Leica MP, Summicron-DR 50/2.0, Kentmere 400)

너무 고민하지 말고 한 번 시도를 해 보자. 거창한 여행이 아니더라도, 우리 마음이 지치고 힘들었을 때 새로움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여행을 시작해 보자. 때론 유선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음악을 흥얼거리며 거리를 걷는 것도 또 하나의 낭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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