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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빛바람 Oct 07. 2022

전형적인 천재성의 뒤틀기

영화 “굿 윌 헌팅”의 윌 헌팅은 왜 그랬을까?



   

  배우 맷 데이먼의 학부시절 리포트에서 시작된 영화 “굿 윌 헌팅”은 마음의 상처를 받은 천재의 행동 속에서 천재성을 극한으로 발휘하도록 원동력을 준 스승의 헌신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영화라 치부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주인공 윌 헌팅의 마지막 행동과 함께 스승의 선택은 “왜 그러했을까?”라는 의문을 가지기에 충분했다. 분명 전형적인 신데렐라류의 스토리였다면 주인공 윌 헌팅은 훌륭한 스승을 만나 학업을 이어나가게 되고, 그의 천재성을 극한으로 보여주는 학자의 반열에 오르며 사랑을 쟁취하는 것으로 마무리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주인공 윌은 학업도 포기하고,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기 위해 무작정 떠나는 방랑자의 모습을 보여주며 막을 내린다.

  윌 헌팅은 놀라울 정도로 뛰어난 천재 캐릭터의 모습을 보여준다. 책을 한 번 훑어서 보는 것만으로도 그 책의 내용을 전부 이해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한 번 본 것에 대한 응용능력도 뛰어나 수학적 난제에 다양한 방식으로 해답을 접근하는 모습도 보여주곤 한다. 일반적으로 “속독” 혹은 “기억력” 등 어느 특정 분야가 뛰어난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인지 능력이 뛰어난 보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천재”는 본인의 능력 이외의 것에 대해 부족함을 보여주어 누군가의 보살핌과 도움을 받아야 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윌은 모든 것이 완벽한 존재인 것처럼 보여준다. 그리고 자신의 천재성을 발휘하기보다 친구인 처키과 함께 건물 철거 일을 하며 평생을 보내고 싶어 한다. 지나친 천재성에 비해 욕심 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윌은 왜 그렇게 행동을 하였을까? 하나씩 분석을 해 보며 윌의 캐릭터를 찾아보도록 하자.


1. 잘했어! 윌!

  우선 제목을 주목해봐야 한다. “굿 윌 헌팅(Good Will Hunting)”이라는 의미는 흔히 “훌륭한 윌 헌팅”으로 이해하기 쉽다. 이 영화의 첫 장면에서 보여주는 장면은 램보 교수가 제시한 문제를 아무렇지 않게 해결하는 모습을 보며 “훌륭한 윌”이라고 착각을 하곤 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첫 장면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윌은 유리창(혹은 거울)에 램보 교수가 제시한 문제를 풀다 지하철을 타는 장면과 오버랩된다. 현실의 윌 헌팅은 보스턴의 지하철을 타고 학교에서 청소를 하는 최하층 노동자에 지나지 않으나, 상상 속의 윌은 천재적인 두뇌로 그 어느 누구도 풀기 힘든 문제를 척척 풀어내는 척척박사 윌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유리창은 현실과 다른 상상의 공간을 비춰주는 용도라 할 수 있다. 윌의 현실은 폭력적인 양아버지와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친구들. 최하층 노동자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에 지나지 않으나, 유리창 너머의 윌은 모두들 우러러보는 천재의 모습을 보여준다. 어느 분야의 책이든 단 한 번만 읽어도 그 내용을 100% 이해하게 되고, 천재적인 두뇌로 어려운 수학 문제를 척척 풀어내간다. 최고의 수재들이 모여있는 하버드대학교의 학생들과의 토론에서 단 한마디도 밀리지 않고 이겨내며, 처음으로 사랑이란 감정을 느끼게 되는 하버드대 학생 스카일라를 만남으로서 윌의 상상은 최고조에 달한다.

  윌의 만들어낸 가상의 현실은 상상만으로도 달콤함을 느낄 수 있다. 책을 단 몇 분만 읽어도 그 내용과 관련된 지식을 전부 습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진정한 축복이 될 수밖에 없다. 윌의 이런 재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도권 학교에서는 윌의 재능을 발견해내지 못한다. 단지 윌과 어울리는 친구들만이 윌의 천재적인 두뇌를 인정할 뿐이다. 오히려 윌의 가족들(혹은 양부모들) 조차 인정하지 못한다. 그나마 윌의 천재적인 두뇌를 인정한 것은 필즈메달을 수여받은 램보 교수밖에 없다. 이후 숀 맥과이어 교수의 따뜻한 멘토링으로 윌은 점점 마음을 열어간다. “너의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 한마디에 윌은 무너지고, 스카일라와 사랑을 약속하기 위해 떠난다. 최고의 석학들이 모이는 맥닐사의 입사 제안을 포기할 정도로 윌은 가상의 현실에서 낭만을 추구한다.

  하지만 어딘가 이상하다. 윌의 천재적 두뇌를 중심으로 모두들 “잘했어! 윌”이라고 소리친다. 처키는 윌의 천재적인 두뇌가 부럽다 한다. 스카일라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이 큰 유산을 상속받았지만, 윌이 가지고 있는 천재적인 두뇌만 있으면 남부러울 게 없다고 한다. 램보 교수도 필즈 메달을 받았지만, 윌의 재능을 뛰어넘지 못한다고 이야기한다. 모두들 윌을 두고 “잘했다.”라고 이야기한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윌이 생각하는 데로 흘러간다. 모두들 윌의 천재성에 감탄하고, 천재성에 칭찬을 한다. 그리고 제목에서처럼 “Good Will Hunting!(잘했어! 윌 헌팅!)이라 이야기한다.


2. 현실의 윌

  윌의 거울 속 이면의 상상의 현실에서는 “잘했어 윌!”이라는 칭찬을 듣는 존재가 되길 원한다. 하지만, 현실의 윌은 어떤가? 영화 중간중간의 단서를 통해 우리는 상상을 해 볼 수 있다. 보스턴 남부 출신의 고아인 윌은 12명의 고아와 함께 지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그리고 영화에서처럼 3번의 입양과 파양을 겪었으며, 3번 다 양부모의 학대로 파양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따라 정상적인 교육과 양육을 받았을 리 없다고 판단된다. 당연히, 3번의 입양과 파양을 겪었으니 뚜렷한 주거지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윌은 유치원 시절 자신을 괴롭혔던 친구를 주목하고, 자신의 친구들에게 힘껏 때려주자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윌의 친구들이 입양과 파양을 반복한 윌의 근처에서 함께 살았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현실의 윌은 그리 내세울 것 없는 하찮은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미국 보스턴 남부에서 보잘것없는 존재인 윌은 누가 지어주었는지 모를 이름과 성을 가지고 살고 있으며, 어린 시절부터 친구들에게 두들겨 맞으며 내세울 것 없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고 싶었지만, 늘 사람들과의 관계가 불완전하게 종결되는 것을 경험하여 상상 속의 여자 친구인 스카일라와도 아름다움 속에서 자신이 먼저 차고 떠나는 모습으로 중반부까지의 모습을 만들어 낸다. 실제로 스카일라와 윌은 몇 번 만나지 않은 사이인데, 스카일라는 윌과 평생을 함께하길 원하기까지 한다.

  윌은 항상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 했던 존재였다. 이름에서 보여주는 “윌 헌팅”은 의지를 사냥하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먼 미래 혹은 아직 벌어지지 않을 윌의 가상현실을 좇는 모습을 사냥하는 존재로 이름이 설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영화 제목인 “굿 윌 헌팅”은 “잘했어! 윌 헌팅”이 될 수도 있지만, “Good Will(좋은 미래)”를 상상하고 쫓는 헌팅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한번 상상해 볼 수 있다.

  윌의 양아버지는 허리띠와 야구배트, 렌치를 바닥에 두고 그중 하나를 고르라고 이야길 했다고 한다. 윌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렌치를 골랐다고 한다. 멕과이어 교수와 이야기를 하는 그 순간에서 윌의 현실과 과거에 아름다운 미래를 기대하기란 쉽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부분이다. 항상 구타와 학대를 하는 양부모를 피해 도망갈 수 있는 곳은 도서관 밖에 없었을 것이다. 도서관은 적어도 자신과 같은 최하층민이 자주 방문하지 않는 곳이니, 윌이 도망가기에는 충분한 곳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윌은 머릿속에서 Good Will을 Hunting 하기 시작한다. 내가 만약 여기에 있는 책을 다 읽게 되고, 이 내용을 전부다 이해하게 되면 사람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을까 라는 기분 좋은 상상을 말이다.

  그 상상 속에서 윌은 단 몇 분만에 책을 이해해내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준다. 하버드의 수재들도 몇 시간을 고민해야 이해할 수 있는 내용들인데도 말이다. 셰익스피어의 아름다운 문장을 물 흐르듯 이야기하고, 미켈란젤로의 아름다운 그림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상상해 낸다. 그림의 붓 터치만 보더라도 그 사람의 심리 상태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을 보유하게 된다. 상상 속의 윌은 분명 모든 것을 가진 그런 완벽한 존재였다.

  우리는 거울 속의 윌을 바라보며 영화를 관찰한다. 하지만, 현실 속의 윌을 바라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심지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영화를 맥과이어 교수의 헌신으로 상처받은 아이를 치유하는 과정이라 이야기한다. 사실, 우리의 눈에는 거울 밖 현실인 최하층민의 실제 모습이 보이질 않으니, 그들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이 영화가 노리는 부분은 학대받고 고통받는 윌이라는 한 아이의 상상을 통해, 달콤한 상상만이 우리들이 주목받는 모습이 될지도 모른다. 윌은 여전히 학대받고 소외받고 있으며 고통받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여전히 지하철에서 지나쳐 보고 있는 윌을 놓치고, 거울 속의 천재만 바라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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