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팠던 과거가 고마울 때
난 기본적으로 경험론자다. 그래서 누구도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는 특정한 지식이나 사안 또는 감정을 머리로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과연 '안다'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이해하는 것도 아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는 누군가가 '넌 그런 것을 겪어보지 않아서 모르는 거야'라고 하면 본인이 경험한 것에 대해 유세를 떤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오만해도 그렇게 오만할 수 없었다.
내가 거의 완전한 경험론자가 된 것은 내가 실패를 경험하고 그 과정에서 아픔을 겪게 되면서부터가 아닌가 싶다. 변호사시험을 수차례 떨어질 때마다 사람들은 '네가 딴 짓을 많이 해서 그런 것 아니냐?'라고도 했고, 사람들은 내가 얼마나 힘들게 그 순간을 버텨내는 지를 알지 못하면서 내 마음과 상태를 함부로 판단했다. 그 사람들은 내가 경제적으로도 얼마나 쪼들리고 집안에서는 얼마나 심한 압박을 받고 있는 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때서야 깨달았다. 나도 과거에 무심코 그렇게 던졌던 말들이 누군가에게는 어마어마하게 큰 상처가 되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아픔과 열등감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극복해낸 지금, 그때의 실패는 지금 내게 굉장히 큰 자산이다. 이는 내가 경험했던 그 아픔들이 다른 종류의 아픔을 경험하는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런 대화를 할 때 난 절대로 '네가 얼마나 힘든지 나도 알아'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이는 그 사람과 나는 다르고, 그 사람이 처한 환경과 내가 처했던 환경이 다르기에 내가 그 사람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네 마음을 내가 절대로 알 수 없어'라고 고백하며 대화를 시작하고, 그 이후에 내가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의 경험과 마음을 나눈다. 그리고 보통 공감하는 대화는 그 지점에서부터 물꼬가 트인다.
혹자는 그러더라. 본인의 약점을 굳이 그렇게 드러낼 필요가 있냐고. 내가 그러하는 이유는 딱 한 가지다. 내가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울 때는 누구도, 심지어는 내 가족도 내 아픔에 공감해주고 토닥여주지 않았다. 내가 듣고 싶었던 유일한 말은 '괜찮아, 꼭 성공하지 않아도 돼'였지만 누구도 그 말을 해주지 않았다. 나는 누군가에겐 내가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 누구도 내밀지 않았던 손이 되어주고 싶었고, 누군가에게는 내가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던 귀가 되어주고 싶었다. 내가 내 아픔을 아픈 사람들 앞에 꺼내놓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 고백은 보통 상대가 본인의 이야기를 나눠주는 마중물이 된다.
내 가족과 지인들을 원망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도 대부분 그러한 어둠 속으로 들어가 본 경험이 없었기에 어떤 말을 해야 할 줄 몰랐을 뿐이란 사실을 나도 안다. 하지만 나는 그 감정을 알기에 내가 손을 내밀어 잡아줄 수 있는 사람들의 손은 잡아주고 싶다. 그 사람은 나보다는 덜 힘들었으면 좋겠기에.
사람들은 아픔, 고통, 고난이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나 또한 그랬다. 그리고 지금도 가능하면 그러한 것들은 피하고 싶다. 하지만 아픔, 고통과 고난은 그 과정을 잘 견뎌내고 그 과정을 이겨내면 '공감능력'이라는 큰 선물이 주어진다. 그리고 누군가와 그렇게 진심으로 함께 아파하고, 상대의 말을 경청해주는 경험은 나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착각하게도 해줘서 자아 건강에도 나쁘지 않은 듯하더라.
아는 형 중에 아버지 사업이 엄청나게 번창해서 본인 명의의 건물도 있고, 신혼을 50평이 넘는 집에서 시작한 사람이 있다. 내가 본 그 형 차만 포르셰, 카이안, BMW이니 내가 보지 못한 게 뭐가 있을지가 궁금할 정도다. 거기다 그 사람은 성격도 나쁘지 않고 과도하게 오만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결혼도 일찍 했고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있으며 일은 취미로 하고 수시로 외국에 나가서 수개월씩 머문다. 그 형이 가진 것들이 부럽지 않냐고? 부럽다.
그런데 그 형과 대화를 하던 중에 그 형은 절대로 가질 수 없는 것을 나는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 있었다. 그 형은 항상 그런 환경에서 자라왔기에 자신과 다른 환경에서 자라서 다른 성향을 가진 사람을 수용하고 포용하는 능력이 상당히 떨어지더라. 그리고 그 형은 내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 중에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것으로는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러한 경향성이 보통 큰 실패 없이 여유로운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일수록 더 분명하고 강하게 나타난단 사실이다.
누군가는 지금 나의 모습과 삶, 그리고 그 형의 모습과 삶을 선택하라면 난 지금 나의 삶을 선택하겠다. 인간이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다. 어느 하나를 가지면 포기해야만 하는 것이 반드시 생기게 되어 있다. 물질적 풍요로움과 공감능력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난 후자를 고르겠다. 후자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고 생각하기에.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감정을 공유하는 것을 의미하는 '공감'은 그 감정을 느껴봐야 공유할 수 있다. 그래서 내겐 그 아프고 힘들었던 시절이 꽤나 고맙다. 이는 그때 그 감정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내가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의 종류와 그 깊이는 더 적고 얕았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지금 아프고 힘든 사람들에게 '그러니까 엄살 부리지 마!'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다만 잘 버티고 이겨내라고, 그 과정이 지나고 나면 같은 세상도 다르게 보이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는 말은 해주고 싶다. 내 경험에 의하면 분명히 그렇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