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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내 생각을 돌아보다

by Simon de Cyrene

'나는 아기 캐리어가 아닙니다'라 책을 읽었다. 지하철에서 어느 여자분이 읽고 계신 책이 눈에 들어왔고, 내용이 궁금해서 읽기 시작했다. 단순히 호기심으로 읽기 시작한 이 책은 내가 최근 읽은 어느 책 보다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들었고, 놀랍게도 결혼과 가정에 대한 내 생각을 조금은 바꿔놨다.


내 브런치 글들, 특히 사랑과 연애와 결혼에 대한 글들을 읽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난 기본적으로 아이가 한 가정을 완성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책을 읽는 내내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하게 되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래도 다른 남자들보다는 내가 이성에 대한 이해는 높은 편이야'라고 착각한 것은 아닐지. 내가 경험하지 않은 것을, 어렸을 때 주위에 여사친들이 많아서 그렇지 않은 남자들보다 조금 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을 '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


생각이 달라졌냐고? 아니다. 그런데 무슨 영향을 준 것이냐고? 여전히 아기를 갖는 것이 가장 좋긴 하지만, 그것도 가능하다면 자매, 형제 또는 남매가 있는 것이 좋긴 하지만 그 선택은 여성에게 맡겨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몰랐다. 그리고 난 앞으로도 모를 것이다. 아이를 잉태해서 10개월을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남자니까. 이 책을 읽으면서 그나마 조금, 아주 조금은 그에 대해 알게 되었고, 내가 만약 저 경험을 해야 한다면 어떨지에 대해서도 생각이 많아졌다. 그래도 과연 아이를 가져야만 한다고 생각했을까? 많은 고민 끝에 그런 결론을 냈을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말을 내가 해왔던 패턴처럼 쉽게 결정하진 못했을 듯하다. 더군다나 한국에서는.


책을 읽는 초반에는 임신하신 분들이 겪게 되는 신체적인 변화에 대해서 놀랐지만, 중반부를 넘어서는 순간부터는 임신하신 분들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에 놀랐다. 임신하신 분의 배를 함부로 만지는 것도, 지하철에서 멀쩡히 앞에 임신하신 분이 있어도 멀뚱멀뚱 앉아 있는 사람에 대해서도, 사람들에 임신한 것에 대해 하는 말들도 충격적이었다. 마치 내가 보지 못하고 있던 우리 사회의 민낯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개인주의가 아닌 이기주의로 가득 찬 사회의 모습 말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 경험을 하라고 강요할 수 없고, 하고 싶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이가 생기면 그 가정이 더 풍성해지기는 하겠지만, 그리고 내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감출 이유도 없지만 그걸 여성에게 강요해서는 안된다. 설득이라는 핑계로 그 얘기를 반복해서 꺼내는 것 또한 폭력일 것이다. 그 주제가 나오면 내 의견은 솔직하게 말하겠지만 그 뒤에 '그런데 아기를 갖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최대한 짧게 붙이고 말아야겠단 생각을 했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으니까.


만약 내 배우자가 아이를 갖고 싶다고, 갖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한다면 그 사람 옆에서 최대한 함께 하고 싶단 생각이 들더라. 아니, 남편이라면 그래야 한단 생각이. 부부가 된다는 것은 한 몸이 된다는 것이고, 그건 단순히 스킨십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공동체가 된다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내게 필요한 것을 배우자가 채워줌과 동시에 나도 철저히 그 사람이 필요한 면을 채워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정상이고 상식이 아닐까? 그렇다면 아이를 잉태한 아내를 옆에서, 아내의 컨디션과 필요에 따라 맞추는 것은 자랑할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 아닐까? 그럴 때야 비로소 남자들은 자신을 '아빠'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아이에게 자매, 형제 또는 남매가 있는 것이 아이를 위해서 좋다는 생각도 변함이 없다. 하지만 어떻게 모든 것을 갖겠나? 사실 이 생각은 내 회사 동기가 본인이 임신했을 때 경험했던 신체적인 변화에 대해 들었을 때 이미 한 번 꺾인 상태였다. 다른 사람들보다 유난히 더 신체적으로 힘들었던 그 친구에게 차마 '그래도 아이에게 자매, 형제, 남매가 있는 게 낫지 않을까?'라고는 하지 못하겠더라. 그 말은 폭력이라고 생각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배우자에게 두 번의 임신을 '요구' 또는 설득이라는 이름으로 '강요'하는 것이 얼마나 폭력적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더라.


생존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수입은 있어야 한다고, 좋아하는 일들이 다 돈이 되지 않다 보니 돈이 있으면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면서 돈이 많으면 좋겠단 생각을 막연하게 한 적은 있다. 하지만 돈을 중심으로 결정하거나 사고하는 것은 잘 못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결혼이라는 것을 할 수 있게 된다면 돈을 정말 많이 벌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가진 배우자에게 조금이라도 마음 편하게 검사받고, 쉬고, 요양할 수 있게 해주고 싶어서.


프리랜서로 사는 것에 대해서 지금까지는 사실 '나는 남들보다 더 회사 부적응자니까' 정도의 생각을 했지, 무엇인가를 위해서 프리랜서로 살아야겠단 생각은 한 적이 없다. 지금 돌아보면 부끄러운 생각이지만 내 배우자가 프리랜서였으면 좋겠단 생각은 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처음으로, 가정을 꾸리게 된다면 최소한 배우자가 아이를 가진 시점에는 자리 잡은 프리랜서이고 싶어졌다. 아이를 함께 보고, 내가 '한 몸'으로서의 책임을 조금이라도 더 잘할 수 있도록.


글을 쓰는 내내 '임산부'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피했다. 그 말이 개인을 없애고 임신한 여성을 하나의 그룹으로 구별 짓는 듯해서. 그녀들도 개인으로 존재하는 사람인데 왜 동양권 일부 국가에서는 '임산부'라는 표현을 쓰는 걸까? 영어로 pregnant women은 임신한 '여자'이다. 이는 여성이 임신을 했다고 해서 그녀가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사고방식이 반영된 것은 아닐까?


배우자를 '돕는다'는 표현도 최대한 배제했다. 아내가 임신한 후에 그와 함께 하는 것은 남편의 수동적인 도움이 아니라 의무이자 책임이라고 생각하기에.


어떤 이들은 주위에 아이를 가진 여성에게 '00는 안 그랬다'거나 '너는 유난히 심한 것 같다'라는 말을 아무 생각 없이 한다. 실제로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그분이 그렇게 겪는 것이 본인 탓인가? 그녀가 겪는 상황이 그녀에게 힘들다면 그 힘듦은 그대로 존중되어야 한다. 당신이 무엇인가에 실패했을 때 누가 당신에게 '야 뭘 그 정도 갖고 그렇게 힘들어하냐? 더 힘든 사람들도 있어.'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어떤 기분이겠나? 개인의 주관적 고통과 힘듦은 그 주관적인 수준에 따라 존중받아야 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나는 아기 캐리어가 아닙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여자보다 남자들이 꼭 읽어야 하는 책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을 읽고 남자들이 본인은 절대로 임신한 여성이 하는 경험을 온전히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러한 점을 존중해 주기 시작할 때야 비로소 우리 사회가 조금이라도, 콩알만큼이라도 바뀔 것이다. 아내가 임신한 친구들에게는 본인이 읽으라고, 임신한 친구들에게는 남편 읽히라고 선물해주고 싶은 책이다.


사실 결혼 전에 읽혀봐야 하는 책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고 ‘내가 이걸 왜?’ 또는 ‘남들도 다 낳는거 유별떤다’ 또는 ‘다 이 정도는 아니잖아’라고 반응을 보이는 사람과는 가정을 꾸리지 않는게 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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