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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on de Cyrene Feb 19. 2020

가부장제가 대화에 미치는 영향

대화의 원리. 3화

가부장제 : 가장이 가족 성원에 대하여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가족을 지배 ·통솔하는 가족형태


가부장제의 핵심은 '가장'과 '강력한 권한'이다. 그리고 이 두 표현은 부정적으로 비칠 때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사회구조에 따라 이 두 가지 요소를 축으로 하는 사회문화나 제도는 긍정적인 수준을 넘어서 필요할 때도 있다. 사회가 빠르게 변하지 않고, 외부에서 개인이나 가정을 보호해주는 제도적 장치가 없을 때는 강력한 권한을 가진 가장이 개인의 안전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이는 사회가 빠르게 변하지 않으면 과거의 경험이 가장 풍부한 가장이 내리는 의사결정이 타당할 경우가 많고, 그러한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갖고 개인을 통제하는 것이 그 개인의 이익에도 더 부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는 가부장제가 오래전부터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역사를 아무리 짧게 잡아도 유교문화가 뿌리내린 조선시대라고 할 수 있으니, 조선 중기 이후라고 하더라도 수백 년이 지난 문화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가부장제가 조선시대에는 크게 문제가 될 이유가 없었다. 조선시대에도 법제도는 있었으나 오늘날의 '법률가'가 배출되는 조선시대의 '율과'는 '잡과'에 속했고, 중인들이 진출했다. 이는 조선시대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법치주의'의 원리로 운영되는 국가는 아니고, 주요 의사결정은 정치와 권력에 의해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에는 가장이 강력한 권한을 갖고 가정의 구성원들을 책임지는 것이 그들을 위해서도 더 안전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가부장제' 부정적으로 비치는 것일까?  가장  이유는 현대사회는 변화가 엄청나게 빠르다는 것이고,  번째 이유는 근대국가가 형성된 이후에는 가족이 아닌 국가가 개인을  보호해  때도 있기 때문이다. 변화의 속도가 엄청난 현대사회에서 '과거의 경험이 많은' 가장들의 경험은 무용지물인 경우가 적지 않다. 그리고 가장의 책임은 다하지 않으면서 권한은 휘두르려는 가장들은 국가로부터 통제를 받기도 한다. 또한 '평등' '자유'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은 국가에서 교육을 받고 자란 이들에게 가부장제에서 강력한 권한으로 '복종' 요구하는 것이 먹힐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가장들은 가족에게, 직장상사는 부하직원들에게 가부장적으로 대할 때가 많다. 자신이 생각하는 답을 통보하고, 상대에게 그것을 따르라고 요구하며, 상대의 말은 듣지 않는 사람은 우리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서 통보하는 답이 실제로 정답이고, 그것을 따라 했을 때 결과가 좋을 경우 사실 상대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만약 그런 결과가 나온다면 그 사람이 상대의 말을 듣지 않는 것도 크게 문제 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결과가 그렇지 않단 것이다. 우리 사회의 가정과 사회에서 '가장'의 지위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가장으로써의 권한 휘두르기를 시도한다. 그런데 문제는 현대사회에서 변화가 발생하는 속도로 인해 그 과정에서 현실과 다른 사실관계들이 있고, 때로는 그들이 말하는 답이 현실과 완전히 다를 때가 적지 않다는 데 있다. 그렇다 보니 그 명을 듣는 종속적인 사람들은 거기에서부터 감정적으로 어긋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은 한두 번 정도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는 시도를 해보지만, 좌절을 하다 포기하기에 이른다.


문제는 우리나라의 가정들에도 이런 문화가 아직 있다는 것이다. 특히 현재 20-30대들의 부모님 세대는 그런 경향이 절대로 약하다고 할 수는 없을 정도로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적지 않은 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정답을 강요받고, 정답을 찾을 것을 요구받으며, 가정과 사회에서 '가장'적인 역할을 가진 이들과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고 다른 답을 내놓지 않게 될 것을 강요받는다. 우리나라만큼 '모든 것에 정답은 있어!'라고 강요하는, 그렇게 행동하고 살기를 강요받는 사회도 드물지 않을까?


문제는 그런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은 '본인의 생각'을 하는 훈련을 받지 못한다는데 있다. 어렸을 때부터 이미 기성세대가 정답을 던지면서 특정한 방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면서, 결정하라고 주입받은 상태이고 조금만 다르게 행동해도 이상하게 취급을 받는데 어떻게 '본인만의 생각'을 하게 되겠나?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가부장적인 가정과 사회 문화에서 자라난 사람들은 '말'을 잘 못한다. 이는 '말'은 자신의 생각을 기반으로 해야 하는데, 생각하는 능력 자체가 성장과정에서 길러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을 잘 못하고 본인 안에 정답이 이미 정해져 있으니 그 사람은 '듣기'도 잘 못하게 된다. '듣기'는 내가 언제든지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다른 사람의 관점을 듣고, 그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을 전제로 하는데 이미 본인 안에 정답이 정해져 있고 생각하는 능력도 결여되어 있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말을 듣겠나?


어떤 이들은 '요즘 세대는 달라요!'라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대학교 면접과 자기소개서 강사를 하는 지인과 전문대학원 진학 관련 강사를 하는 지인의 얘기를 들어보면 이는 요즘 고등학생들과 대학생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본인이 왜 특정 전공을 하고 싶고, 그 후에는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 종이 한 장에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는 10대와 20대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그게 그들의 탓일까? 아니다. 그들이 자신만의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들고 정답을 강요하는 가부장적인 문화의 탓이다. 이미 그런 사회 속에 태어난 그들에게는 아무 죄도 없다.


사실 가부장제가 자리 잡은 사회에서는 대화 자체가 크게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가장이 하는 말은 다 현실에서 맞는 말일 테니까. 하지만 현대사회는 다르다. 사회적 변화로 인해 가장이 하는 말 중에는 틀린 말들이 더 많을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면 우리 아버지께서는 '고등학교 친구들이 평생을 가고, 그 이후 친구들은 멀어지게 되더라'라고 하셨는데 내게 있어서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아버지 시대에는 고등학교 때는 매일 얼굴을 보고 부대꼈지만,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그럴 수 있는 관계가 없고 휴대폰이 없는 상황에서 연락을 쉽게 할 수도 없어서 가까워지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한 직장에 계속 다니는 문화가 지배적이었던 당시에 같은 회사 사람들은 서로의 경쟁자였을 것이다. 하지만 SNS와 휴대폰을 통해 수시로 서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우리 시대에는 매일 보지 않아도 어느 정도 친밀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고, 워낙 사는 형태가 다양하다 보니 이제는 다른 삶을 사는 고등학교 동기들과 대화가 잘 안 통하기도 하며, 평생직장 개념이 없어진 시대에는 직접 경쟁하는 상대가 아닌 이상 친구나 형, 오빠, 누나, 언니, 동생으로 지내는 것도 충분히 가능해졌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가장의 말이 항상 맞는' 가부장적인 문화를 몸에 여전히 안고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간에는 갈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들의 이러한 다름은 서로에게 틀림으로 인식되어 대화의 단절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다 보니 세대 간 갈등은 심화되고, '가장 세대'들은 젊은 사람들을 '건방진 요즘 세대'로, 그런 '가장 세대'를 젊은 세대들은 '꼰대'로 인지하게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상의 첫걸음은 '대화'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 그리고 이는 '가장 세대'와 '가장 후속 세대'가 서로의 다름이 반드시 틀림은 아니고, '가장 세대의 경험이 여전히 유효한 영역'과 '사회적 변화로 인해 요즘 세대가 더 잘 인지하고 있는 영역'을 구분해서 인식하고, 그러한 인식하에 서로 '듣고 말할 때'야 비로소 가부장제로 인해 야기된 우리 사회의 갈등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또 그래야 우리 사회에서 유연하고 창의적인 사고가 가능해진다.


문제는 가부장적인 문화가 우리 사회에 너무나도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는 데 있다. 그러한 가부장제는 심지어 이상하게 변형되어서 나타나기도 한다. 남자들 중에는 가부장제에서의 권한은 갖되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여자들 중에는 가부장제의 책임은 남자에게 지우면서 권한은 부정하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현실이 이를 보여준다. 그러한 생황에서 무슨 대화가 통할 수 있고, 갈등이 어떻게 해소될 수 있을까?


우리 사회에서 대화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가부장적인 요소를 완전히 벗어버리고 개인을 개인으로 존중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른들이 아이들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줘야 하고, 어른들이 자신이 언제든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항상 전제하고 사람들을 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야 비로소 우리 사회에서 대화가 회복될 수 있지 않을까?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브런치에서 다양한 주제의 글을 씁니다. 혹시라도 감사하게도 '구독해야지!'라는 생각이 드셨다면, 2020년에 제가 쓸 계획(링크)을 참조하셔서 결정하시는 것을 권장합니다. 브런치에는 '매거진 구독'이라는 좋은 시스템이 있으니, 관심 있는 매거진만 구독하시는 것이 나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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