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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on de Cyrene Feb 26. 2020

군대문화가 대화에 미치는 영향

대화의 원리. 4화

'군대문화'라고 하면, 사람들은 현시점의 군대문화를 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군대문화는 우리나라 곳곳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초등학교 교실이다. 


우리나라 학교 교실들은 일제시대의 교실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칠판이나 교실 뒤에 라커나 게시판이 생겼다는 것 정도. 그런데 일제시대에 이뤄졌던 교육은 철저히 일제의 이데올로기를 이식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이는 1911년에 공포된 조선교육령에서도 드러나고, 일제가 1918년에 서당 규칙을 제정하는 방식으로 서당에서 이뤄지는 교육을 통제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일제의 이데올로기를 이식하기 위해서는 정답이 제시되어야 했을 것이다. 이는 다른 방향으로 사고하지 못하게 '세상은 이러이러한 것이야'라는 식의 주입식 교육이 이뤄져야만 일제의 의도가 그대로 전달되고 이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도는 교실과 교복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같은 책상에 앉아 선생님을 같은 각도에서 보게 되는 구조의 교실. 같은 머리를 하고 같은 옷을 입음으로써 동질감을 형성하고 획일적으로 사고하게 만드는 정책. 그러한 목적을 가진 입장에서 일종의 사교육이었던 '서당'은 일제의 그런 의도에서 엇나가는 교육방법이었고, 일제가 서당에서 이뤄지는 교육을 통제한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와 같은 교육제도와 방법 하에서 학생들은 절대로 사고하는 방법을 배울 수가 없다. 이는 자신의 생각을 갖기 위해서는 생각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재료가 다양해야 하는데, 성장과정에서 같은 재료만 반복적으로 제공되는 교육을 받다 보면 그 사람은 그 재료가 세상의 전부인 것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북한의 교육이 과목 이름만 달리하고 있을 뿐 '사회'적인 과목에서는 사실상 김일성, 김정일의 가르침을 반복하는 것 역시 획일적으로 사고하는 사회 구성원을 만들기 위한 정책이다. 


일제가 그와 같은 교육을 시행한 것은 그들이 전쟁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하나로 통일시켜야 자신들의 전쟁을 정당화시킬 수 있었고, 그렇게 전쟁이 정당화될 때야 비로소 사람들이 전장에 나가거나 자신의 물질을 전쟁용으로 내놓게 하는 게 가능했기 때문에 그러한 교육을 통해서 뿌리를 그 방향으로 심는 작업을 한 것이다. 세계 정복에 나선 그들은 국가 전체를 군대로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방식은 일본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전쟁을 이끌고 나가는 국가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군대에서 이처럼 그 구성원의 사고방식을 단순화하고 '정답'을 제시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전쟁터에 나간다는 것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확고한 신념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자신이 속한 집단에 소속감을 갖게 하고, 동질감을 형성하도록 해야 한다. 군대에서 모두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원칙을 암기하며 지키고, 생활방식을 통일하고, 심지어 같은 노래를 반복해서 부르게 하는 것은 그러한 동질감을 형성시키는 수단이다. 군대는 그렇게 하나로 뭉쳐야 전쟁과 전투에서 힘을 집중시켜서 승리하고, 승리함으로써 최대한 희생자를 적게 낼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문제는 우리나라의 교육제도가 큰 틀에서는 여전히 그러한 방식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최근에 지어진 우리나라 학교들도 일제시대의 교실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고, 장식과 교실 안에 쓰이는 물건들의 재질이 달라졌을 뿐 우리나라에서 '학교'는 여전히 앞에 있는 칠판을 같은 각도에서 바라보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교과서 역시 여전히 '사고하는 법'보다는 '정답의 제시'에 초점이 맞추고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나라는 시험방식에 있어서 대부분 객관식을 선택하고 있기 때문에 학생들은 어렸을 때부터 [정답 찾기]에 초점을 맞춘 공부를 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교육이 암기 중심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 이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교육에 '가부장적 문화'가 결합되면서 나이가 한 살이라도 많은 사람은 절대로 복종해야 하는 상대로 강요되고, 이는 대학교는 물론이고 사회생활로까지 이어진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성은 군 복무가 의무인 우리나라에서 젊은 남자들이 20대 초반에 군생활을 하게 되면서 그들 안에 완전히 고착된다. 모든 남자들이 그렇게 극단적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문화와 분위기가 본인 성향에 맞지 않는 사람들도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와 같은 분위기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진 않더라도 순응하며 넘어갈 수 있는 적응력이 생긴다. 그리고 그러한 문화는 사회생활로 그대로 이어진다.


이와 같은 군대문화는 우리 사회에서 '대화'가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는 교육과정에서 사람들이 '사고하는 법'이 아니라 '암기하는 법'을 배우고 학습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암기한 것을 자신의 생각이라고 착각한 상태로 자신이 자신의 생각이라고 믿는 것을 말하고 그 입장을 고수하게 된다. 이는 그것이 본인에게는 확고한, 그리고 자신이 유일하게 아는 정답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 중 상당수, 어쩌면 대부분은 그 과정에서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방법을 아예 모르는 상태로 성인이 된다. 


그리고 자신이 믿는 것에 대한 확고한 믿음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신과 '다름'은 '틀림'이고, 그에 따라 자신과 다른 것은 배척해야 할 대상으로 사고하게 만든다. 그렇다 보니 사람들은 대화의 중요한 부분인 '듣기'를 할 줄 모르게 된다. 이는 대화가 잘 이루어지려면 다양한 시선과 시각에서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되어야 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 중 상당수는 모든 문제에 대한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서 상명하복식의 군대문화가 선생님과 학생 간의 관계에서 형성되고, 왜곡된 가부장제로 인해 마찬가지 상하관계가 가정에서도 형성되면서 우리나라에서는 '나이가 많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의 말에는 반박하거나 다른 의견을 말하지 말고 무조건 따를 것'이 강요된다. 이는 아직 초등학교에도 입학하지 않은 한 두 살 차이 나는 아이들이 자신과 동갑은 친구지만, 나이가 어린아이는 '동생'으로 규정하고 자신의 말을 따를 것을 요구하는 영상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여기에 더해서 그러한 문화에 반발하는 사람들 역시 상대의 말을 걸러서 듣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보니 그런 말에 강하게 부딪치다 보니 우리나라에선 필연적으로 세대 간, 계층 간, 지역 간 갈등이 심화될 수밖에 없다. 


지금과 같은 교육방식은 한반도에 일제시대에 처음 도입되었다. 그것이 유일한 교육방식도, 우리의 전통적인 교육방식도 아니란 것이다. 이전에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뤄지는 공교육이 자리 잡은 경우도 없었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교육이 이뤄진 계층에서 교육은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익히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고구려 시대의 경당, 신라 시대의 화랑도, 고려 시대의 국자감. 향교. 서당, 조신시대의 성균관. 사부학당. 향교. 서원. 서당에서는 단순 암기가 강요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는 인성과 관계가 강조되었다.


다른 국가들의 교육방식도 우리나라의 그것과 굉장히 다르다. 나만 해도 미국인 학교를 다니면서 계속해서 사고하는 방법을 익힐 것을 강요받으면서 자랐다. 전형적인 모태신앙인 내게 생각에 충격을 준 것은 기독교인임에도 불구하고 불교 경전을 읽고 있었던 선생님이었으며, 정답을 주지 않고 끊임없이 '왜?'를 물었던 선생님들의 수업을 들었던 경험은 내가 끊임없이 생각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 당시에 토론 수업에서 [창조론  대 진화론]을 주제로 토론을 벌였던 경험은 그 과정에서 나온 다양한 논의들로 인해 한 때 나를 어마어마한 혼란으로 몰아넣었고 결과적으로는 그 경험이 내 사고의 폭을 넓히는데 도움이 되었다. 


대화를 잘하는 방법의 기본 중의 기본은 '다름은 틀림이 아니라 다름일 뿐'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지금 나의 믿음과 생각은 이렇지만 그것은 언제든지 바뀔 수도 있고 그게 이상하거나 나쁜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자세라 할 것이다. 그런 자세를 갖고 있어야 나와 다른 의견이나 생각을 듣고, 그것을 지금의 내 입장과 비교하고 분석해서 더 견고한 결론을 낼 수 있지 않겠나? 


그런데 우리나라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군대문화는 항상 정답을 제시할 것을 요구하고, 그 정답을 갖고 싸워서 이겨야 승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나라 사람들 중 상당수는 전쟁에는 승리 혹은 패배만이 있는 것처럼 대화에도 오로지 그 두 가지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그러한 문화만 바뀌어도 훨씬 더 평화롭고 생산적인 대화가 이뤄질 수 있지 않을까?


대화는 승패를 결정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고, 대화는 그 과정에 핵심이 있다. 대화 당사자들이 모두 언제든지 상대에게 설득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이상 대화다운 대화는 이뤄질 수가 없다.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브런치에서 다양한 주제의 글을 씁니다. 혹시라도 감사하게도 '구독해야지!'라는 생각이 드셨다면, 2020년에 제가 쓸 계획(링크)을 참조하셔서 결정하시는 것을 권장합니다. 브런치에는 '매거진 구독'이라는 좋은 시스템이 있으니, 관심 있는 매거진만 구독하시는 것이 나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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