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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on de Cyrene Feb 12. 2022

오늘은 어디에서 일할까?

프리랜서로 사는 순간들. 8화

박사학위 받은 학교를 모교라고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어떻게 생각해보면 가장 많이 영향을 받은 고등학교가 가장 '모교'답다가도, 그래도 학부를 나온 학교까지는 모교라고 해도 되지 않나 싶다가 생각해보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학교는 석박사 과정을 보낸 학교다 보니 그 학교도 모교가 아닐까...라는 생산적이지는 않은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어쨌든, 박사학위를 받은 모교에 잘 찾아가지 않는다. 지금도 그곳에 객원연구원으로 발령이 나 있고, 지도교수님과 여전히 같이 일을 하지만 학교에는 잘 가지 않는다. 코로나 때문에 더 그런 면도 있지만, 코로나 이전에도 그랬다. 물론, 학교가 서울로 따지면 우리 집에서 끝과 끝에 있기 때문에 거리가 멀어서 가지 않는 것도 있고, 학교와 관련되어서 내가 하는 일들이 출퇴근을 요하는 것은 아니다 보니 굳이 학교에 가지 않는 것도 있다. 


하지만 사실 논문을 쓰고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참고할 책들을 마음껏 활용하기 위해서는 학교에 갈 필요가 없지는 않다. 그리고 아무래도 '학계'에 여전히 발을 담고 있다는 티라도 내려면 아무래도 학교에 자주 얼굴을 보이면서 교수님들과 인사도 하고 식사도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들의 학위 관련 일자리들은 그런 식으로 연결되기도 하고, 정보력이 중요하기도 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학교에 거의 가지 않는다. 


공간에서 받은 스트레스 때문이다. 박사학위를 받은 모교도 모교라 부르지만, 그 학교에서 보낸 시간들은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어둡고 힘들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런지는 모르지만, 나는 특정 장소에서 특정한 감정을 깊게 느끼고 나면 그 장소를 다시 찾았을 때 그때의 느낌들이 되살아나곤 한다. 그래서 한 때는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나면 그 친구와의 추억이 깊은 장소는 다시 찾지 못하기도 했고, 수년이 지난 후에도 그 장소에 가면 그때의 기억과 느낌들이 되살아나곤 했다. 그렇다 보니 박사학위를 받은 학교를 찾으면 30분도 되지 않아 근육이 뭉치고 혈압이 오르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학교에 잘 가지 않는다. 


프리랜서로 일할 때도 마찬가지. 아무래도 일을 할 때 집중을 하고, 스트레스를 안 받지는 않다 보니 공유 사무실에서 특정 자리에서 오래 일하다 보면 그 자리에 앉을 때면 예민해지고 스트레스를 받아서 일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자리를 옮겨 보기도 하고, 카페를 찾기도 한다.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코로나로 인해 내 방에서 일해야 했던 시기가 아닐까 싶은데, 오롯이 쉼의 공간이 되어야 할 방에 있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를 받다 보니 삶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 슬럼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른 장소를 찾아야 한다. 얼마 정도라도 리프레시를 할 수 있는 장소를. 카페에서 일을 해보기도 하고, 공유사무실에서 다른 공간에서 자리를 잡아보기도 한다. 하다 하다 몇 달 전에는 4년째 사용하는 공유사무실과 멀지 않은 곳에 생긴 사용하는 만큼만 비용을 부담하면 되는 공유사무실에도 계약을 했다. 그 공간에서 3-4시간 정도 일을 하다 보면 지치기 시작하는데, 지친다 싶을 때면 따릉이를 타고 다른 공유사무실에서 일하는 식. 남들은 왜 그렇게 유별을 떠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내가 하는 일의 특성과 코로나로 인해 사람을 거의 만나지 않다 보니 그런 식으로라도 움직이고 변화를 주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받아 견딜 수가 없더라. 


거의 7-8년째 1년에 1회 이상 제주도를 찾는 내게 혹자는 '신세 좋다'라고 하기도 한다. 그런데 사실 나는 제주도에 항상 노트북을 끌고 내려가고, 언제든지 일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로 지낸다. 내게 제주도는 여행지라기보다는 서울이라는 도시 자체에 지쳤을 때, 서울에 있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선택하는 도피처와 같은 곳이다. 환경을 완전히 바꿈으로써 다시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나 자신을 리셋하는 시간이랄까? 그렇다 보니 나는 제주도에 가서도 거의 가던 곳을 가고, 먹는 음식을 먹는다. 


사람들은 '너는 프리랜서니까 어디에서든 일할 수 있는 것 아냐? 좋겠다.'라고 하지만, 사실 많은 프리랜서들은 '어디에서나'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쓰는 자리나 공간을 견디지 못하면 '다른 곳'을 찾아다닌다. 내가 아는 분은 일을 하기 위해 노트북을 끌고 강릉, 통영, 제주, 여수를 돌아다니시더라. 그곳에 가서 그분이 하시는 건, 카페에 가서 일하는 것이 전부였다. 


프리랜서들은 왜 그럴까? 그건 아마도 프리랜서는 자신의 일에 대해서 오롯이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프리랜서들은 일이 잘 될 때면 잘 되는대로, 잘 안 들어오면 안 들어오는 대로 긴장을 할 수밖에 없고, 일상에 깔려 있는 그 긴장감에 지치고 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혼자 모든 것을 책임지는 건 꽤나 버겁고 많은 체력을 요하는 일이니 말이다. 


그리고 프리랜서들은 '어디에서나 일할 수 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언제든지 일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경우도 많다. 쉬다가도 일 전화는 받아야 하고, 휴가 중에도 이메일은 확인해야 한다. 언제, 어디에서든지. 일은 프리랜서가 있는 곳이나 상황을 가리지 않고 들어오고, 의뢰인들은 편의를 봐주면서  일하지 않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프리랜서들은 깨어있는 동안은 거의 대부분 시간을 어느 정도 이상의 긴장감을, 언제든지 일에 대응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하며 지낸다. 


그렇다 보니 '어디에서든지 일할 수 있는 것'은 꼭 그렇게 장점만은 아니다. 이는 프리랜서들이 장소를 옮겨 다니는 것은 많은 경우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아니라 '일이 되는 곳'을 찾아다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 부쩍 본인 공간을 마련하는 프리랜서나 1인 사업가들이 주위에 적지 않다. 그들이 부러운 것은 그렇게 자신의 취향에 맞게, 자신이 일에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로 공간을 꾸밀 수 있고, 집은 오롯이 쉼의 공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 부쩍 그런 사람들이 부럽고, 배가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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