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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on de Cyrene Mar 03. 2022

이럴 거면 제주에 살까 싶다가도...

프리랜서로 사는 순간들. 9화

일 년에 한 번 이상은 꼭 제주도에 간다. 올해는 가족여행까지 해서 두 번 갔는데 내 지금 컨디션에 비춰봤을 때 한 번 정도는 더 가게 되지 않을까 싶다. 한 번 갈 때는 아무리 짧아도 3박 4일, 가장 길게는 8박 9일까지 갔다. 2박 3일로 간 적도 있지만 2박 3일은 항상 짧고 뭔가 찍고 오는 느낌이라 다녀오면 오히려 더 힘들어지더라. 


나보다 제주를 자주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안다. 매년 계절마다 한 번씩 가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제주를 찾는 평균치를 계산하면 나도 제주에 꽤나 자주 가는 편에 속할 것임을 안다. 


그렇게 자주 가서 뭐하냐고? 생각보다 하는 게 없다. 거의 10년 동안 제주를 연 1회 이상 찾으면서 나는 아직도 한라산을 한 번도 오른 적이 없고, 스쿠버 다이빙을 언젠간 하고 싶지만 한 적이 없고, 낚시도 가지 않으며 우도는 아주, 매우, 오래전에 부모님과 어렸을 때 갔던 게 전부다. 여러 숲길들을 한 번씩은 가 본 듯하지만 한 번 이상 갔던 곳은 없다. 


나는 제주에 가면 항상 똑같은 마을 찾아서, 똑같은 첫 저녁식사를 한다. 그 뒤로도 새로운 곳을 가기보단 익숙한 곳들을, 마음 가는 대로 찾아다닌다. 조금 길게 갈 때는 중간에 가보지 않은 곳을 찾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4일은 내가 좋아하는 식당, 카페, 숙소에서 묵는다. 루틴처럼. 


이런 얘기를 하면 사람들은 '역시 프리랜서라서 자유로워서 좋아'라고 할지 모르겠다. 실제로 자주 듣는 얘기다. 휴가를 내거나 주위 사람들 눈치 보지 않고 언제든지 훌쩍 떠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어떤 이들은 '그렇게 제주를 좋아하고 자주 갈 거면 아예 제주에서 사는 건 어떠냐?'라고 묻는다. 내가 하는 일들이 꼭 서울에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일이 있을 때면 서울에 한 번씩 가면 되는 것 아니냐며. 


아니다. 뭐가 아니냐고? 그들의 생각과 아이디어가 모두 아니다. 그들의 생각과 달리 나는 제주에 '가고 싶을 때' 가지는 못한다. 서울에서 회의가 언제 잡힐지 모르기 때문에 눈치, 코치를 봐야 최대한 보면서 일정을 짠다. 내가 하는 일들의 회의는 보통 길어도 3-4일 후, 심하면 다음 날 잡히는 경우가 많고 그 회의는 절대 빠지거나 누가 나를 대체해 줄 수도 없다. 그렇다 보니 나는 항상 일이 어떻게 전개되는 지를 짧게는 몇 주, 길면 몇 달을 눈치 보다가 회의 다음날 제주로 향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도 아니라면 아주 오래전부터 판을 깔아놓고 관련된 사람들에게 일이 조금 있다며 먼저 작업을 해놓지만 그 작업과 무관하게 회의가 잡혀서 제주행을 접어야 할 때도 있다. 


그리고 나는 제주에 단순한 '여행'으로 가지 않는다. 나는 제주행 비행기를 '갑갑해서 아무 일도 안 잡혀 죽을 것 같을 때' 탄다. 그때마다 상황을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서울에 있는 것 자체가 숨이 막혔을 때, 내 몸과 마음의 젖산에 과부하가 걸렸을 때 제주로 향한다. 몸과 마음에 젖산이 그토록 많이 쌓이는 건 항상 불확실성과 싸우며 긴장 속에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일이 갑자기 들어왔다가 갑자기 나가고, 결과물 하나, 하나가 평가와 판단의 대상이 되는 삶. 그 안에서 허우적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내 안에 마음과 몸의 젖산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쌓여서 어느 순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더라. 나는 제주에 그걸 빼내러 간다. 


그렇게 제주를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한라산을 한 번도 가지 않은 건, 안 그래도 힘들어서 쉬고 싶어서 제주를 찾은 마당에 내 몸에게 가혹행위를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2-3년 동안은 '기회가 되면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라고 생각했지만 아직까지는 그 정도 몸의 여유를 가지고 제주를 찾은 적은 없다. 나도 언젠가는 아름다운 백록담을 보고 싶지만 최소한 아직까지는 그런 기회가 오지 않았다. 


나의 제주행에 대한 지인들의 생각에 가장 억울한 건 사실 그들은 내가 제주를 무조건 쉬러 간다고 생각한단 점이다. 나는 제주도에 단 한 번도 노트북을 끌고 가지 않은 적이 없다. 몸과 마음에 젖산이 쌓이면 보통 일하러 가는 공간들에서도 일이 잘 안 되다 보니 나는 일의 유무와 무관하게 항상 노트북을 끌고 제주를 찾고, 하루에 한 번 이상은 노트북을 켠다. 밀려 있는 일은 항상 있고, 제주에 있는 동안 연락이 오는 경우도 많으며, 무엇보다 서울에서 일이 안되어 처리하지 못한 걸 어느 정도 이상 끝내고 올라가야 본전이기 때문에. 


그렇다. 난 역설적이게도 여러 면에서 '일하러' 제주에 간다. 제주에 가서도 일을 한다. 이게 낭만적으로 들릴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 제주행도 그렇게 자유롭지는 않고, 그렇게 제주를 찾아도 제주를 오롯이 누렸다는 느낌은 최소한 5박 6일 이상은 있어야 들더라. 제주에서의 처음 이틀은 현실에서의 긴장감이 풀어지는 데 사용되고, 이틀 정도는 몸과 마음의 기초체력을 회복하는 데 사용되고, 5-6일 차부터야 조금은 여유가 생기기 때문에. 


그렇다면 그냥 제주에 가서 살라는 얘기들에 대해서는, 나 역시 그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다. 사촌 형이 제주에 살기도 하고, 까미노를 같이 걸은 부부도 제주에 살고 친한 후배의 친척이 모두 제주에 살기 때문에 정말 원한다면 불가능하진 않을 것이다. 게스트하우스나 작은 가게들에서 일하면서 몇 달 정도 사는 걸 고려해 본 적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제주에 살지 않기로 한 것은, 내가 제주에 사는 순간 일과 현실의 무게로 인한 스트레스가 내 안의 제주에도 쌓일 것을 알기 때문이다. 긴장하고 예민한 상태에서 일을 하다 보면 그 장소에서도 그런 감정들이 떠오르는데 제주에서 살게 되면 시간이 지나면서 제주에 있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가 될 것이 아닌가? 그렇게 되는 것은 내 마음의 가장 큰 안식처인 제주를 잃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되면 나는 몸과 마음이 지쳤을 때 어디에서 안식을, 쉼을 누릴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나는 제주에 살 생각을 접었다. 이미 수년 전에. 심지어 한 달 살기나 두 달 살기도 하지 않는다. 그 정도 살게 되면 일도 어느 정도 이상 강도와 빈도로 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제주가 내게 스트레스를 받는 공간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프리랜서들이 장소나 공간에 예민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사람들마다 자신의 몸과 마음에 쌓인 젖산을 풀어내는 방법과 루틴도 다르다. 분명한 건 프리랜서들은 모두 몸과 마음의 젖산이 쌓이는 걸 주기적으로 경험하게 되고, 그걸 풀어낼 루틴을 갖고 있어야 생존할 수 있단 것이다. 내겐 제주가 그 루틴이다. 차가 생기면 더 많은 루틴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일단 내게는 제주가 그렇다. 


물론, 회사원과 사업하는 사람들도 그런 경험을 한다. 하지만 프리랜서 안에 쌓이는 몸과 마음의 젖산이 조금은 다른 것은, 회사원과 사업가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일하면서 어느 정도의 부담을 덜어낼 수 있고 모든 게 한 사람의 탓은 아니지만 프리랜서들은 혼자 모든 것을 짊어지고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프리랜서들은 몸과 마음의 젖산이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보다 조금은 더 빨리 쌓이고, 그만큼 그걸 풀어낼 루틴이 더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에.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브런치에서 다양한 주제의 글을 씁니다. 혹시라도 감사하게도 '구독해야지!'라는 생각이 드셨다면, 2022년에 제가 쓸 계획(링크)을 참조하셔서 결정하시는 것을 권장합니다. 브런치에는 '매거진 구독'이라는 좋은 시스템이 있으니, 관심 있는 매거진만 구독하시는 것이 나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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