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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on de Cyrene Mar 21. 2022

'놀기'의 생산성에 대하여

프리랜서로 사는 순간들. 11화

'생산적'으로 시간을 보내야 하는 강박이 있는 편이다.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교육받아온 영향인 듯하다. 어머니는 만화책을 보거나 드러누워 있는 걸 항상 꼴 보기 싫어하셨고 시간을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쓰기를 요구하셨다. 엄격한 부모님 밑에서 필요 이상으로 강한 책임감을 갖고 살다 보니 그런 분위기에서 항상 뭔가 생산적인 걸 해야 한다는 것에 압박을 받았고, 그렇게 압박받는 게 습관이 된 느낌이다.


뭔가 노는 것도 '생산적'이어야 한단 압박 비슷한 게 있던 시절이 있었다. 그것 역시 우리 집안 분위기의 영향을 받았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이는 우리 부모님은 전형적인 '관광지는 일단 다 찍고 보는 여행'을 하시는 편이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항상 언제 다시 올 지 모르는데 보고 사진 찍을 수 있는 건 다 사진 찍어야 한다고 생각하셨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 지점에서는 부모님과 결을 달리 하는 편이다. 내가 의도한 건 아니고 여행은 항상 지쳤을 때, 숨 막혀 죽을 것 같을 때 떠나다 보니 굳이 그렇게 관광지를 찍고 다니게 되지를 않더라. 숨 막혀 죽을 것 같아서 여행을 떠났는데 여행지에서마저 그렇게 돌아다니면 숨이 막혀 여행지에서 세상을 떠나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혼자 여행을 다니기 시작한 후부터는 관광지를 굳이, 일부로 찾아다니지는 않는다. 파리에 4박 5일 있으면서 루브르 미술관이나 베르사유 궁전도 가보지 않았고,  마드리드에 도착해서는 시내는 보지도 않고 톨레도로 향했다면 '찍고 다니는 여행'을 하는 사람들은 '미쳤다'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내겐 여행에서 쉼이 더 중요하고, 떠남 자체가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굳이 사람들이 몰려다니거나 사진을 찍기 위한 곳에 가고 싶진 않았다.


내 여행은 주로 시장, 카페, 유명하지 않은 동네 식당, 무료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떠남 자체에 의미가 있었고, 사진에는 내가 꼭 들어가지 않아도 됐으며, 나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내 삶을 돌아보는 게 내 여행의 가치와 의미였다. 유명한 곳은 이미 인터넷과 책에 사진을 통해 많이 볼 수 있지 않나? 거기에서 사진 한 장을 찍는 것보다 내가 그곳에 있을 때의 날씨, 습도, 냄새, 분위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기억에 담아 오는 게 내겐 더 필요했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여행을 떠났을 때는 그렇게 오롯이 쉬었지만 서울에 머무를 때는 그러지 못했다. 회사를 다닐 때는 그나마 주말에 합법적으로 놀았고, 의식적으로 일을 생각하지 않으면서 잘 놀 수 있었지만 프리랜서가 되고 나서는 달랐다. 돈을 버는 것과 직결되는 일은 물론이고 당장 돈은 안되더라도 투자에 해당하는 일들은 항상 있었다. 그리고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프리랜서인 나로서는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그 일들을 빨리, 많이, 잘 해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주말이 없어져 있었다. 그나마 일요일에는 교회를 가는 시간이 있었지만 그 외의 시간에는 노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지금 이러면 안 되지... 빨리 자리를 잡아야 하는데...라는 생각들로 인해 마음이 급해져 놀 수가 없었다. 나이가 어느 정도 들다 보니 그것도 크게 어렵진 않았다. 어렸을 때는 같이 놀자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지인들이 거의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생기면서 놀 사람들이 거의 사라지고 나니 내가 일부로 누군가를 찾아 나서지 않는 이상 자연스럽게 놀지 않게 되더라. 


하지만 그렇게 놀지 않다 보니 내가 조금씩 망가지는 게 느껴졌다. 약을 먹거나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지만 한 번씩 야간의 우울감도 찾아왔다. 그래서 합법적으로 놀기 위해 서울에 대한 글을 쓰고 영상을 만들기로 했는데 언젠가부터는 그마저도 '내가 그러고 있어도 되는 건가'란 생각에 사로 잡혀서, 비생산적이고 비효율적이란 생각에 선뜻 나서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옥죄고 가두다 보니 나도 모르게 내 몸과 마음이 망가졌다. 그러다 책상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고 나서야 조금씩 스스로를 놔주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약속이 잡히면 마음 편히 나가고, 운동이 안 되는 수준의 산책도 기꺼이 하고, 내가 좋아하는 동네를 걷다 보니 내가 조금씩 회복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렇게 회복된다 싶으면 '일할 수 있겠다' 싶어 또 일을 잡으면 방전된 배터리로 잠시 가다 멈추는 기계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뻗게 되더라. 그러기를 반복하다 '아 몰라 인생 뭐 있어'라며 스스로를 조금씩 더 놔주다 보니 조금씩, 조금씩 회복되어가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현대사회에서는,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생산적'이란 이유로, '효율적'이란 이유로 놀기보단 일하고 공부하기를 권한다. 그게 어느 정도는, 일정 기간 동안에는 먹힐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은 배터리와 마찬가지로 에너지가 충전이 되어야 더 많이, 세게, 강하게 일할 수 있고 사람은 '잘 놀아야' 충전이 된다. 따라서 노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생산적인 삶을 위해 많이 중요하고, 필요하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다. 아니, 기계라고 해서 무조건 쉬지 않고 일할 수 있나? 기계도 일정 시간 이상 일하면 방전이 되고 열이 많이 나서 망가진다. 기계도 중간에 쉬게 해 주고, 기름칠하면서 관리를 해야 성능을 유지하면서 오래 사용할 수 있다. 기계도 그러할진대 마음과 감정까지 가진 인간은 오죽할까...


열심히 놀아야 한단 것이 아니다. 장소를 찍고 다니는 여행을 다녀오면 충전되기보다는 더 방전되어 며칠을 늘어져 있어야 하듯이 뭔가를 열심히 하면서 쉬는 건 역효과를 낼 때가 있다. 유튜브, TV를 보는 게 쉬는 것도 아니다. 이는 유튜브와 TV에는 생각보다 많은 정보들이 빠르게 쏟아지기 때문에 우리의 뇌는 영상을 보는 내내 일정 속도로 일을 해야만 한다. 그런 상태로 쉬는 몸과 뇌가 긴장을 풀게 하는 게 아니라 에너지를 소비하게 만든다. 


우리는 누구나 에너지를 소모하기보다 충전하는, 감정과 마음을 풍요롭게 해 주고 뇌의 긴장을 풀어주는 놀이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함께 있을 때 행복한 사람과 시간을 보내거나 정말 좋아하는 놀이를 해야 한다. 그런 시간이 우리에겐 모두 어느 정도 이상, 주기적으로 필요하다. 더 열심히, 잘 일하기 위해서라도. 프리랜서들은 더더욱. 프리랜서는 스스로 그러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도 챙겨주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놀이에 대한 투자를 스스로 해야 한다. 비생산적인 시간은 전체 시간의 생산성을 늘려주기 때문에. 


이제는 좀 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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