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에서 태어난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고향이 없는 느낌을 가지고 살았다. 그래도 서울에서 한 지역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최소한 그 지역을 고향으로 여길 수 있지만, 나는 서울에 살 때도 다른 지역에 살았기 때문에 서울은 내게 고향 같지만 또 아닌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여기에 더해서 어렸을 때 한국과 외국을 오가며 살았다 보니 서울에서 태어나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내겐 서울은 고향의 느낌을 주진 않는다. 이 도시를 어느 도시보다 사랑하고 아끼지만, 이곳을 '고향'이라고 부르는 데는 이질감이 조금 느껴진다.
그건 아마도 '고향'이라는 표현은 따뜻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는데 서울이라는 대도시는 그런 느낌을 주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 도시를 전 세계 어느 도시보다 사랑하지만, 이 도시 안에서 그런 따뜻함을 주고 추억이 담긴 곳은 곳곳에 많지만 [서울]은 너무 크다 보니 도시 자체가 고향으로는 여겨지지는 못하는 느낌이다.
그런 내게 거창은 마음의 고향과 같은 곳이다. 아버지 직장을 따라 외국에 살던 중에 부모님은 대학은 한국에서 나와야 한다며 나를 먼저 혼자 한국으로 보내셨다. 서울이 고향인, 심지어 본적이 서울시 종로구이고 한국에서는 서울에만 살았던 나를 경상남도 최북단에 있는 거창이라는 작은 곳에 있는 기숙사 학교로.
가고 싶지 않았다. 외국에 살다온 아이들이 대부분 다니는 서울의 외고에 가고 싶었다. 더군다나 한영외고는 내가 해외로 나가기 전에 살았던 동네에,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한영외고를 가고 싶었다. 나와 비슷한 친구들이 있는 학교에 다니고 싶었다. 안 그래도 학교 선생님들은 내게 한국에 가면 새로운 문화와 교육방식에 적응하기 힘들 거고, 공부를 잘하는 편이니 장학금을 받아서 미국으로 가라고 하셨는데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시골마을로 혼자 가라니... 그냥 싫었다.
하지만 내게는 선택권이 없었고, 부모님은 나를 거창고등학교로 전학시키셨다. 예상대로 학교에 적응하기는 힘들었고, 나는 매일 밤마다 컵라면을 야식으로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학기만에 10킬로가 빠질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으며, 국제전화를 걸어 돌아가고 싶다고 울부짖었다. 나를 왜 이곳으로 보냈냐며. 한국에서만 자란 아이들에게 나는 행동 하나, 말 하나가 다른 존재였고, 내게 그 아이들은 전체가 이해할 수 없는 집단이었다. 군대 막사와 같은 기숙사에서 나는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로 잠들었다. 그렇게, 한 학기가 지났다.
두 번째 학기부는 조금 나아졌다. 친구들과의 관계는 나아졌지만 수업은 여전히 귀에 들어오지 않고 이해할 수 없었고, 미국인학교에 다닐 때는 항상 우등생이었던 나는 졸지에 열등생으로 전락했다. 한국말은 했지만 한국말로 진행되는 수업들은 이해가 되지 않았고, 심지어 영어를 한국말로 옮긴 표현조차도 그게 뭔지를 몰라 사전을 찾아야 했다. [미토콘드리아]가 뭔지를 모르겠어서 찾아보니 [mitochondria]의 한국 발음이더라. 이것도 파악 못한 나 자신에 대한 분노와 자괴감에 기숙사 독서실에서 눈물을 펑펑 흘렸던 기억이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적응하기 시작했지만, 학교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이 학교가, 이 동네가 내게 마음의 고향 같은 곳으로 남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학교생활을 하는 내내 나는 몸부림치며 버티기에 급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면서 그때 일들은 추억으로 정리되었다. 그리고 그 안에 있었던 친한 친구들과의 따뜻하고 소중한 기억들이 때로는 내가 힘든 순간을 버틸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주기도 했고, 그 친구들과의 마음은 나를 그때로 되돌려놓기도 했다. 또 그때는 그렇게 힘들게만 느껴졌던 것들이 내 안에 마음의 근육과 버틸 수 있는 힘을 만들어줬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그 시간에 감사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한두 시간이면 전체를 둘러볼 수 있는 크기의 읍내와 학교 뒤에 위치했던 포도밭, 주말에 차 타고 나가면 계곡에서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었던 환경은 서울이 내게 주지 못하는 [고향]의 따뜻한 느낌을 선물해 줬다.
이제는 다시 세상에 나가야 하는, 내 일을 본격적으로 해야 하는 시기가 온 듯하고 개인적으로 마음이 힘든 상태가 되어 무려 11년 만에 거창을 찾았다. 졸업 후 10년 동안은 그래도 3-4번 정도 거창을 찾았는데 30대를 방황하고 힘들어하며 지냈다 보니 마음의 고향을 찾을 여유가 없었다. 고향이라고 하면서 11년 만에 찾는 게 민망하긴 하지만 내게 거창은 여전히 따뜻하게 다가왔고, 이젠 몇 분 남아계시지 않은 고등학생 때 은사님들이 반갑게 맞아주셔서 감사했다.
거창은 20년 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포도밭은 공원과 도로가 되어있었고, 읍내에는 극장이 들어왔으며, 그때 유일한 패스트푸드 체인이었던 롯데리아의 위치도 바뀌었다. 학교도 건물이 늘었고, 곳곳이 보수되었으며, 교실도 달라져 있었다. 하지만 내게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고향의 따뜻함을 느끼게 하는 것들은 여전히 곳곳에 있었고 그것들이 남아있음에 감사했다.
고등학생 때 젊은 축에 속하셨던 영어 선생님께서 교장선생님이 되어 있으셨고, 같은 교회를 다녔던 선생님과는 3시간이 넘게 수다를 떨었고 선생님으로 학교에 있는 동기를 졸졸졸 따라다니며 졸업 후 처음 보는 예술제의 풍경을 즐겼다. 그 위로 20년도 더 지난 나의 학창 시절이 겹쳐 보였다.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던 곳도, 친구들과 '벽에 이름 써놓고 20년 후에도 있나 와서 보자'라고 했던 벽도, 3학년만 앉을 수 있었던 벤치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내 눈에는 겹쳐 보이는 추억들이 있었다.
겨우 1박 2일이었다. 그런데 그 짧은 방문은 그보다 더 긴 여운을 남겼고, 내 안에 있던 적지 않던 상처들 중 상당수를 치유해 줬고, 여전히 그러하고 있다. 마음의 고향에 다녀온 지 4일이 지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게 그걸 보여준다.
고향은 그런 곳이다. 짧게 머물러도 그곳에서의 좋은 기억과 추억들이 세상 속에서 입은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곳. 그게 가능한 건 우리가 고향이라 부르는 곳에 머무르는 시간에는 거칠고 경쟁적인 세상보다는 따뜻함이 필연적으로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그게 따스함인 줄 몰랐지만, 고향을 떠나 차디찬 세상 속에서 살다 보면 그곳이 얼마나 따스한 곳이었는 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고향에 돌아가 살고 싶다는 것은 아니다. 이는 고향을 나의 현재로 끌어오면 어른이 된, 생계와 경제활동을 함으로 인해 몰려오는 차가움들이 내 안에 있는 고향의 따스함을 덮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돌아가지 않고 길게 머물기만 해도 차가운 현실의 냉기가 몰려오기 시작할 것이다. 그걸 알기에 짧고 굵게 1박 2일을 보내고 나의 진짜 고향인 서울로 복귀했다.
차갑고 경쟁적인 세상 속에서 우린 누구나 한 번씩 회복하기 위해 찾을 수 있는 마음의 고향이 필요하다. 내게 그런 곳이 있어 다행이다.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브런치에서 다양한 주제의 글을 씁니다. 혹시라도 감사하게도 '구독해야지!'라는 생각이 드셨다면, 2022년에 제가 쓸 계획(링크)을 참조하셔서 결정하시는 것을 권장합니다. 브런치에는 '매거진 구독'이라는 좋은 시스템이 있으니, 관심 있는 매거진만 구독하시는 것이 나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