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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on de Cyrene May 06. 2022

인간은 왜 자기중심적이면서 외로울까?

사랑학개론. 2화

인간은 자기중심적이다. '이기적'이라고 하지 않고 '자기중심적'이라고 하는 것은 이 두 개념이 분명히 다르기 때문이다. 이기적인 사람은 자신밖에 모르는, 자신을 위해서는 남이 어떤 피해를 입든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인 반면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을 신경 쓰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경험과 관점에 구속되어 있는 사람이다. 이기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의 피해에 관심 자체가 없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서라면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가하기도 하지만,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의도치 않은 피해를 입힐 수는 있어도 고의로 누군가를 해치지는 않는다.


이 두 단계를 넘어선 사람이 '개인주의자'이다. 개인주의자는 '개인'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여기에서 '개인'은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포함된다. 따라서 진정한 개인주의자는 꽤나 이타적일 수밖에 없다. 마음으로 공감하거나 누군가를 위하는 수준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내가 이 행동을 하면 저 사람은 이런 피해를 입겠구나. 그렇다면 이 행동은 할 가치가 있을까? 그 피해는 피할 수 없는(inevitable) 것일까?'를 고민하며 자신의 행동에 결정을 하고, 자신의 행동이나 결정으로 인해 누군가가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미안해할 줄 안다. 이는 그 사람이 박애주의자여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자신과 같은 '개인'으로서 존중하기 때문이다.


공교육의 목적은 이런 '개인주의자'를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우린 그걸 다른 표현으로 '사회성'이라고 부르니까. 하지만 인간은 참으로 다양해서 같은 교육을 받아도 누군가는 개인주의자가 되지만 누군가는 이기적이 되거나 자기중심적이 된다. 제대로 된 공교육 제도에서도 그런데 우리나라 공교육 제도는 사회성을 갖추고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한 사람을 키워내는 것보다 경쟁시키고 줄 세우는데만 초점을 맞추고 있으니 우리나라에는 이기적이거나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이 넘쳐날 수밖에 없다.


남녀를 불문하고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된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건 이 때문이다. 제대로 된 사랑을 하려면 우선 상대를 독립된 '개인'으로 볼 줄 알아야 하는데 우리나라 교육은 그런 가르침을 주지 않기 때문에. 여기에 더해서 사회 기반에 깔린 군대문화와 편집되고 왜곡된 유교문화와 페미니즘이 우리나라에서 진짜 사랑을 하시기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인간은 왜 개인주의자가 될 수 있는 교육을, 사회성을 학습하지 않으면 자기중심적이 되거나 심하면 이기적이 되는 걸까? 그건 그 사람이 악해서가 아니다. 이기적인 건 악하다고 할 수 있지만 자기중심적인 것은 사실 자연스럽고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순리다.


인간이 자기중심적이 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누구나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에 가장 큰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직접 경험하는 것은 간접경험이나 공부해서 알게 되는 것과 달리 필터 없이 우리의 일부가 되는데, 물리적인 시간과 공간적 한계로 인해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경험에는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 보니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는 편중되고 왜곡된 경험을 가질 수밖에 없고, 자신이 가장 잘 아는 것이 편중되고 왜곡되어 있다 보니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는 편중되고 왜곡된 사고방식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편중되고 왜곡된 것을 균형 잡는데 활용될 수 있는 것들이 다른 사람들의 말과 글이다. 매체로 따지면 책, 영상, TV 등을 통해서 우리는 시공간을 뛰어넘어서 직접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을 간접적으로 접함으로써 편중되고 왜곡된 지점들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


하지만 이게 쉽지 않은 것은 그렇게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우리의 경험과 매체를 통해 접한 간접경험을 놓고 비교하고, 분석해야 하는데 그 과정에는 일정 수준 이상의 에너지와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서 직접 경험과 간접경험을 분석해서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 내는 게 말하기와 글쓰기인데 우리나라 공교육 제도 하에서는 말하고 쓰는 훈련을 거의 시키지 않다 보니 우리나라 사람들 중 상당수는 아예 그런 사고를 하는 법을 모른다. 그렇다 보니 대부분 사람들은 그러하는 것이 그저 피곤하고 귀찮고 싫어서 매체를 통해서도 자신의 경험과 같은 연장선에 있는 얘기들에만 귀를 기울이고, 오늘날에는 인터넷의 알고리즘이 그러한 경향성을 더 강화시킨다. 그러니 사람들이 자기중심적이 되고 자기 확신이 강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자기 중심성이 강해지면 혼자 살 수 있게 되어야 할 텐데 인간은 신기하게도 사회적인 특성을 갖는다. 아무리 내성적인 집순이, 집돌이여도 사람을 아예 만나지 않고 살면 우울증에 걸리고 건강에 이상이 오는 것은 인간에게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건 꽤나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자기중심적이면 그냥 혼자 지내도 괜찮아야 할 것 같은데 왜 그렇지 않은 걸까? 사람이 아니라면  반려동물이라도 옆에 둬야 덜 외로워지는 건 왜일까? 자기중심적이면서도 외롭다니! 이 얼마나 모순적인가!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살펴봐야 하고, 인간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론이 있다. 진화론과 창조론. 사람이 지금의 사람의 모습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은 놀랍게도 이 두 가지밖에 없다. 그리고 이 두 이론은 모두 인간이 왜 자기중심적이면서도 외로운지를 잘 설명해준다.


진화론의 전제를 아주, 매우, 단순화하자면 그건 모든 생명체가 '생존하는데 가장 필요한 방법으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그런 이론에 비춰서 인간을 보면, 인간은 야생에서 가장 약한 존재다. 인간보다 힘이 세고 공격적인 맹수도 많고, 인간은 자연에서 혼자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다. 그 유일한 방법은 집단을 형성하는 것이었을 것이데 야생에서는 누구도 쉽게 신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진화론적인 관점에서는 그렇다 보니 인간은 누군가를 신뢰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 '사랑' 같은 감정과 호르몬 작용이 생겼다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사랑과 감정, 호르몬 작용은 모두 '생존'을 위해 필요한 도구에 불과하다.


이렇게 들으면 진화론은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런데 이 이론에는 맹점이 있다. 이 진화라는 것이 하루, 이틀 사이, 아니면 몇 년 안에 생긴 것이라면 이런 이론이 말이 안 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진화는 수 천억 년에 거쳐서 일어난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인간의 외로움과 감정은 비효율적인 진화방법이다.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진화했다면 그런 감정은 오히려 배제되고 이성만 강화되는 게 훨씬 효율적이고 효과적이다. 이성이 극단적으로 발달하는 게 그게 생존에는 더 유리하니까. 이성이 극단적으로 발달함과 동시에 신체도 강하게 진화되는 게 인간의 생존 가능성을 더 높이지 않았을까?


그런데 또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이성과 감정이라는 것도 진화된다는 게 이상하기도 하다. 이는 인간의 평균 수명은 100년이 되었던 적이 없는데, 아니 과거에는 사람이 성경에서 나오듯이 천 년 가까이 살았다고 해도 그 인간의 감정과 이성이 지금처럼 복잡하게 '진화'할 틈이 없기 때문이다. 생물학적인 변화야 세대에 따라 조금씩, 조금씩 진화할 수 있는데 인간의 감정과 뇌는 어떻게, 왜 진화한단 말인가?  이성이야 뇌가 진화했다고 할 수 있지만 감정의 영역은 이게 아예 설명 되지를 않는다. 과학자들이 '사랑의 유효기간은 1년'이라는 식의 얘기는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그건 인간의 호르몬 작용이 미치는 영향과 유효기간에 대한 얘기지 그게 왜 생겼는지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동물은 물론이고 식물도 감정이 있지만 인간처럼 이렇게 복잡하지는 않다. 그런데 인간이 생존에 가장 유리한 방향으로 진화했다면 '왜?' 그랬는지, 그리고 왜 인간은 여전히 외로워하고 사랑을 필요로 하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에 대한 창조론의 설명은 매우, 훨씬 간단하다. 그건 절대자인 신이 인간을 '서로 사랑하는 존재'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뭔가 복잡한 것을 율법적이고 교리적으로 많이 만들어 내지만 성경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사실 '사랑'이다. 성경은 신이 인간을 얼마나, 어떻게 사랑하는지와 함께 인간은 얼마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존재인지, 그리고 신이 인간 안에 심어 놓은 사랑이 무엇인지, 그 사랑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인간이 외로운 것은, 사랑을,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너무 단순하고 비과학적인 '믿음'일 뿐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진화론도 사실은 그 뿌리에 '객관적인 증거'가 아니라 '믿음'이 자리 잡고 있다. 인간이 지금처럼 복잡한 이성과 감정을 갖는 방향으로 '진화'되었는지에 대한 '객관적인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이 무조건 더 과학적이라는 생각이야말로 엄청난 믿음이 아닐까? 무엇이 옳거나 틀렸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뿌리까지 들어가 보면 진화론과 창조론 모두 결국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에 기반한 '믿음'일 수밖에 없고 이는 사실 영원히 '믿음'의 영역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지구 상에 그에 대한 증거가 남아있을 수는 없기 때문에.


당신이 어느 이론을 믿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인간은 누구나 사랑이 필요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있으면 외롭고 불안하단 것이다. 만약 사랑과 외로움이 단순히 '생존'의 문제라면 수 백억을 가진 자산가는 외롭지 않아야 할 텐데 돈을 많이 번 사람들도 극심한 외로움을 호소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질병을 겪는 것을 보면 이건 단순히 생존 차원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돈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도 사랑을 갈망하고, 연애, 이혼, 결혼 관련 프로그램이 어느 나라에서든지 화제성도, OTT에서 시청 순위도 항상 상위권에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혹자는 '사랑하면 외롭지 않냐?'라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진짜, 제대로 된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외롭지 않다. 우리가 사랑한다고, 했다고도 생각하면서도 외롭거나 외로웠던 것은 '진짜 사랑'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사랑으로 외로움이 해결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사랑의 탈을 쓴 욕구와 욕망, 욕정으로 상대를 이용하려 하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소유하는 것은 어느 선까지는 행복과 만족감을 주지만 소유에서 오는 행복과 즐거움, 만족감은 희석되기 마련이다 보니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생각한 욕구와 욕망, 욕정으로 누군가를 만나다(소유하다) 보면 그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마치 명품 가방이나 차를 가지고 다니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무감각해지듯이…)


그게 이상하거나 잘못되었다는  아니다. 우리의 감정구분하기가 힘들다. 우리 안에 같은 느낌의 감정이 올라와도 그게 사랑일 수도 있고 욕구나 욕망의 발현일  있다 보니 나의 감정의 뿌리를 아는  쉽지 않다. 그걸 알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돌아보고, 묻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데  가정에는 많은 에너지와 노력이 들다 보니 그런 감정이 드는 사람은 그게 무조건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반응한다. 사람들이 사랑한다면서 스킨십을 강요하고, 상대를  마음대로 조종하려   있는   때문이다.


하지만 외관이 엇비슷해 보여도 일본의 기무치나 중국의 파오차이가 김치는 아니듯이, 비슷하게 느껴지는 감정을 모두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다. 사랑과 욕구와 욕정과 욕망은 분명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이는 특히 사랑은 우리의 외로움을 해결해 줄 수 있지만 욕구, 욕정과 욕망은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시리즈에서 앞으로 다룰 내용 중 일부 내용은 제 유튜브 채널 (클릭)에서 미리 조금씩 다루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브런치에서 다양한 주제의 글을 씁니다. 혹시라도 감사하게도 '구독해야지!'라는 생각이 드셨다면, 2022년에 제가 쓸 계획(링크)을 참조하셔서 결정하시는 것을 권장합니다. 브런치에는 '매거진 구독'이라는 좋은 시스템이 있으니, 관심 있는 매거진만 구독하시는 것이 나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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