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 보는 세상. 18편.
나는 개신교 신자다. 부모님은 같은 교회에서 만나셨고, 나는 평생 교회를 다니며 살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순탄하게, 방황하지 않고 교회와 개신교의 테두리 안에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아주 잠시, 일주일 정도 무신론자가 되었던 시기 외에는 교회를 떠난 적이 없지만 나는 앞의 글에서 '의심하라!'라고 한 것처럼 개신교의 교리도 끊임없이 의심했다. 목사님들도, 성경도 의심하며 다른 종교들도 들여다봤고, 다른 종교들도 의심하며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낸 끝에 나는 개신교 신자로 '남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지고 있던 의심들은 세상과 나를 더 알아가고 경험하면서 조금씩 걷히고 있다. 이 글에서는 그 과정을 나누고자 한다.
개신교가 진리라고 믿기 전에 나는 '신은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해야만 했다. 그 질문은 '신이 없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라는 질문으로 이어졌고, 내 호기심은 자연스럽게 진화론으로 이어졌다. 진화론, 빅뱅이론 등을 20대에 나름 진지하게 파는 과정에서 깨달은 것이 한 가지 있다면 신을 부정하는 과학적인 접근방법은 '현상이 어떻게 일어났나?'에 대해서는 나름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었지만 '그러한 현상이 어떠한 원리에 의해서 왜 일어났나?'에 대해서는 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단 것이다. '자연선택'이라는 그럴듯한 이론을 내세우기는 하지만 그건 결국 '기후와 환경이 변함에 따라 그에 맞춰서 변했다'는 말 밖에 되지 않는데, 그건 결국 '우연히 기후와 환경에 의해서' 변해왔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다 좋다. 생물학적인 특성들은 그렇다고 치자. 그렇다면 우리의 감정과 이성은 어떻게, 왜 생겼을까? 사실 자연에서 생존하는 데는 감정도, 이성도 없고 본능만 있는 게 훨씬 유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왜 다른 생명체와 달리 감정과 이성, 특히 고도로 발달된 이성을 갖추게 되었을까? 자연에 적응하기 위해서? 그렇다면 왜 곰과 원숭이와 호랑이와 사자는 이성이 그렇게 발달하지 않았나? 그에 대해서 과학이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무슨 표현을 쓰던지 그 표현은 실질적으로 '우연히'를 의미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믿는 '과학'은 어느 정도 신뢰하고 믿을 수 있으며, 절대적인가? 인간은 지난 3년 간 작은 바이러스의 감염되는 것의 문제를 아직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 그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했다고 생각한 백신도 누군가에게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지만 누군가는 부작용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가 절대적으로 믿고 신뢰하는 '과학'이 절대적이지 않고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 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우리가 지금 '사실'이라고 믿는 것도 200-300년 후에는 과학기술이 충분히 발달되지 못해서 잘못 알았던 것으로 밝혀질 수 있다. 지구가 도는 게 아니라 하늘이 돈다고 믿었던 시대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지식과 과학 수준을 신뢰했던 것처럼, 우리 시대에 사는 사람들도 과학에 대한 과도한 신뢰를 보내는 경향이 없지는 않다.
과학이 의미가 없거나 거짓이라는 것도, 효용성이 없단 것도 아니다. 과학은 우리 삶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고, 우리가 더 편리하고 풍요로운 세상에서 안전하게 살 수 있게 해 줬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른 것을 의심하듯이 과학도, 우리가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언제든지 틀릴 수 있단 것을 염두에 두고 세상을 봐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봤을 때 신의 존재 여부는 절대로 입증될 수 없는 사실이다. 신이 죽었다고, 신이 없다고 책까지 쓴 사람들의 주장도 결국 그 근거는 자신이 생각하는 '옳음'을 근거로 하고 있고, 그 시대의 믿음과 과학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이 자신의 전공과 성장환경의 틀에서 세상을 보고 있다는 한계를 갖고, 이는 그들의 생각도 그 뿌리에는 자신의 경험에 기반한 '믿음'이 있단 것을 보여준다.
이 지점에서는 '신은 있다'라고 믿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믿기로 한 결정적인 이유는 사람의 이성과 감성의 존재를 '우연히 자연선택에 의해서' 생긴 것으로 믿는 것보다는 '신이 그렇게 만들었다'라고 전제하는 게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한 믿음이 경험이 많아지고, 나이가 들수록 강화되는 것은 우리 인생에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신기한 일들이 생각보다 많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은 신의 존재를 자신도 모르는 상태에서 믿고 있는데, 이는 '운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고 점이나 사주팔자를 보러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는 데서 알 수 있다. 신이 없다면 운명이 어떻게 있으며, 영적인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진단 말인가?
이 지점에서 나는 다신교가 현실적일 수 있을 지에 대해 고민해 봤는데, 다신교는 비현실적이란 결론을 내렸다. 이는 신이 여럿 있다고 하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 조화롭기 때문이다. 신이 여럿 있다면 그 신은 자신이 관할하는 영역에 욕심을 부릴 텐데, 그렇다고 하기에는 자연이 너무 조화로웠다. 물론, 신에도 단계를 두고 위아래를 정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그건 결국 절대적인 신은 하나밖에 없단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이 있다면 하나 밖에 없다는 결론에 나는 이르렀다.
그렇게 하자 남는 종교는 많지 않았다. 유일신 사상을 전제로 하는 종교는 유대교, 개신교, 구교(천주교), 이슬람 정도밖에 없고, 놀랍게도 그 종교들은 비슷한 지역에서 유래되었다. 그 종교 중 한 가지를 믿는 사람은 이 표현도 받아들이지 못할 수 있겠지만, 이 종교들은 '사실'의 영역에서는 뿌리를 같이 하면서 개신교를 기준으로 [구약]에 해당하는 부분 중 상당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종교 중에는 무엇이 진리에 가까울까? 내게 유대교는 구약에서 '메시아'에 대한 내용이 있는데 그 부분은 무시하고 구약에 해당하는 내용을 여전히 믿는다는 것이 모순되고 이상하게 여겨졌다. 이슬람의 경우 예수님은 본인이 '하나님이 보낸 아들'이라고 했는데 그 말은 무시하면서 예수는 선지자로 여기면서 무함마드의 가르침만이 진리라고 믿는 것도, 그 정통교리의 경우 너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요소들이 많아서 인간이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단 것도 진리로 여기기에는 부족함이 느껴졌다. 가장 많이 고민을 한 것은 개신교와 구교인데, 구교의 경우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장치가 너무 많아서 그 해석과 세계관에 동의하기가 힘들어서 나는 개신교 신자로 남았다.
나는 그렇게 남기로 결정한 후에도 개신교 교리와 교회들의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이해되지 않는 면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내 경험이 늘어나면서, 그리고 목사님들의 말이 아닌 성경을 읽고 현실과 비교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성경에서 설명하고 있는 인과 신에 대해 더 많이, 깊게 믿게 되어가고 있다. 이는 성경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너무 적 너라 하게 보여주고 있고, 그런 인간을 대하는 신의 모습은 단편적인 에피소드만 보면 폭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그 맥락과 인류 전체의 미래를 놓고 바라보면 그러한 지점들이 모두 이해도 되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타나는 신의 모습은 단편적으로 보면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지만 전체적인 그림을 보면 지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하는 존재다. 성경은 그러한 내용을 굉장히 객관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개신교는 분명 오해받고 있다. 하지만 그 오해에 억울해할 생각은 없다. 이는 역사적으로 십자가와 하나님을 내세운 사람들이 자신의 욕심과 욕망을 위해 성경의 내용을 악용해 왔고, 그러한 사례들은 충분히 개신교에 대한 반감을 갖게 만들만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한국교회들 중 적지 않은 교회들이 보여주는 모습을 보면 한국에서 사람들이 개신교를 믿지 못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그러한 상황에서 한국교회들이 보여주는 많은 모습들, 특히 60-70년대와 다르지 않은 교회 안에서의 문화와 전도활동들은, 그 경직된 문화들은 한국교회를 퇴보시킬 수밖에 없다.
개신교의 경전은 성경이고, 성경의 내용을 제대로 읽어보면 신이 얼마나 유연한 존재로 그려지는 지를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은 예수님은 율법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분명히 말씀하셨음에도 경직된 사고방식과 성경해석으로 교회를 퇴보시키고 있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
모든 것을 맞추고 타협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진리는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그 진리는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진리'가 어디까지인지와 타협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서 유연하게 대응해야만 하는 것들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고민해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는 의심하는 것도, 질문하는 것도 용납되지 않는다. 적지 않은 목회자들은 학부와 대학원을 모두 신학만 공부하고 현실에서 노동을 해보지 않아서 현실도, 사람들의 마음도 모르면서 자신들이 읽은 논문과 책에서만 진리가 발견될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한 경직성과 현실과 괴리된 설교와 가르침들이 오늘날 적지 않은 한국교회를 뒷방으로 밀어내고 있다.
개신교에서 목회자의 지위와 역할은 구교나 다른 종교의 종교지도자들과 달리 절대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한국교회를 포함한 대부분 교회들은 종교적으로 '개신교'와 집단으로서의 '교회'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 체계를 만들어 목회자를 다른 사람들 위에 놓기 시작했고, 지금도 암묵적으로 그러고 있다. 그 지점부터가 사실 개신교적이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성경적이지 않다. 이스라엘에서 '제사장'은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기능과 역할을 담당하는 자들이었던 것처럼 목회자들도 지위가 더 높은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안에 특정한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는 자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 이처럼 시작부터가 잘못되었다 보니 개신교 교리와 성경은 오늘날 오해받고 왜곡될 수밖에 없다.
성경은 '사랑'으로 정리될 수 있다. 성경에서는 신이 인간을 창조하고 사랑했고, 이는 인간에게 자유를 허락한 것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인간은 그 주어진 자유로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채우기 위해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을 살해하고 공동체를 망가뜨렸다. 그마저도 지켜보던 신은 방치 하면 그 문화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인간 사회를 잡아먹을 것으로 보일 때 개입하는데, 그 개입 이전에도 사람을 통해서 경고하고, 협박하며 돌이킬 것을 권유한다. 그렇게라도 인간이 돌이키기를 바랐기 때문에. 그리고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사후세계를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이 땅에서 살아내야 할 방향성'을 의미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리고 그 방향성 역시 '사랑'이다.
실패를 반복하며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왜 살아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면서 깨달은 것은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는 사랑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현실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해야 할 일도 있고, 감내해야 할 것도 있지만 사실 '사랑'이 아니라면 우리는 지금 세상을 떠나는 게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이다. 이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누리는 것들은 대부분 그것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힘듦과 고통을 감당해야 하는데 그럴 바에는 어차피 언젠가는 죽는 인생, 지금 세상을 떠나면 행복과 기쁨도 누리지 못하지만 힘듦과 고통도 경험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역전시키는 건, 사랑밖에 없었다. 우리가 왜 그런지는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누군가에게 온전히 사랑받을 때, 나의 모습 그대로 존중받고 인정받을 때 가장 큰 행복감을 느낀다. 사랑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그 행복감은 너무나도 커서 무엇을 감당하던지 누리고 싶은 수준이다. 그러한 행복감은 그것을 누리기 위해 감당해야 할 모든 힘듦과 어려움을 역전시키더라. 이러한 인간의 모습은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도 증명할 수도 없기 때문에 나는 신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사랑하기 위해 살아간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과 십자가가 이 맥락에서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 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이는 우리가 상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설명할 때 종종 사용하는 '너를 위해서 죽을 수도 있어'라는 표현을 통해 어렵지 않게 설명될 수 있다. 성경은 인간이 얼마나 신이 만든 모습, 만들면서 심어 놓은 계획에서 많이, 자주, 쉽게 벗어나는 존재인지를 보여주고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그렇게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자신 멋대로 하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신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을, 그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다는 것을 인간에게 설득시키고 보여주기 위해서는 신이 그 모든 것을 안고 가겠다는 것을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 예수님이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은 그것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보여주신 것으로 나는 해석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다른 어떤 종교도 '사랑'을 이러한 방식으로, 인간의 시선에 맞춰서 보여주지 않더라. 그래서 나는 개신교 신자로 남았고, 아마 굉장히 높은 확률로 개신교 신자로 죽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