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 보는 세상. 16편.
생각도 많고 진지한 편이다. 브런치에서 5년 반 넘게 여러 주제에 대해 글을 쓰고 있는 것만 봐도 이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생각이 많지 않거나 진지하지 않으면 절대로 이렇게까지 글을 쓰고 있을 수 없다.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나의 명예에 도움이 되지도 않는데, 심지어 그 오랜 기간을 가능하면 나의 이력을 숨기면서 글을 쓰고 있는 건 내가 생각도 많고 진지하기 때문이다. '나도 주위에서 생각이 많은 편이라고 하는데, 너는 그런 내가 보기에도 생각이 너무 많아'라는 말을 아는 형에게 들었을 정도면 할 말 다한 것이 아닌가?
이런 나의 성향이 싫었다. 나도 인생을 조금 가볍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고, 생각이 많지 않았으면 좋겠단 생각을 하며 30여 년을 살았다. 쿨하고, 진지하지 않고 싶었다. 그러면 뭔가 인생이 더 즐겁고, 사람들도 나를 더 쉽게 대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가벼워지고 싶었다. 몸도, 마음도, 생각도. 그러다 내가 왜 이렇게 생각이 많은 지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을 발견한 순간, 그냥 나는 이럴 수밖에 없는 사람임을 받아들였다.
내가 그런 것은 어느 정도 유전적이고 환경적인 영향이 있을 것이다. 어머니께서 생각이 엄청나게 많으시고, 아버지도 어렸을 때 글을 쓰셨다는데 생각이 기본적으로 많지 않은 이상 글을 쓸 수가 없으니까.
여기에 더해서 나는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해외와 한국을 오가면서 가장 예민한 시기를 보냈다 보니 생각이 더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한 환경에 적응할 수 있겠다 싶으면 외국에 가서 다른 환경에 적응해야 했고, 거기에서 자리를 잡았다 싶으면 다시 한국에 왔다가, 또 이제 괜찮겠다 싶으면 외국으로 나갔으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때마다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해야 했겠나? 외국에 나가면 한국 사람인데, 한국에 오면 한국에서만 산 아이들과 다르다 보니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정체성의 혼란을 나는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시절부터 겪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뿐 아니라 미국인학교에서는 객관식이 아니라 주관식 시험이 많았다 보니 나는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서는 생각을 많이 할 수밖에 없었다. 성적을 포기해버리면 달랐겠지만 경쟁에서는 이겨야 하는 성향이 강하다 보니 나는 공부도 열심히 했고, 그 과정에서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무는 패턴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나는 항상, 모든 것을 그냥 받아들이지 못하고 '왜?'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래야 답답하지 않고, 내가 살 수 있어서. 이런 내가 생각이 많은 진지한 사람이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진지한 사람을 '진지충'이라며 벌레에 비유하기 시작하더라. 그 말이 듣기 싫어서라도 진지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그렇지 않은 척을 하며 나 자신을 부인했다. 물론, 내가 항상 진지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아무 소리나 할 때도 있고, 사람을 약 올리는 것도 좋아하는 편이다. 하지만 깨어 있는 시간의 50% 이상은 진지하고 생각이 많다 보니 '진지충'이란 표현이 그리 유쾌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대 중반을 넘어서기 시작하면서 나는 이런 사람이란 것을 받아들이고, 차라리 진지하고 생각이 많을 때는 끝까지 가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진지충'이란 표현은 '진지한 것은 피곤하고 쿨하지 못하다'라는 생각을 깔고 있는데, 진지하지 않아서 도움이 되는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친구들의 평판과 친구들과 어울릴 때 쿨한 척, 어깨를 들썩이며 과시하는 것 정도가 진지하지 않음으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에 반해 진지하지 않음으로 잃는 것은 그와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우리는 진지하고 생각이 많지 않으면 돈을 어디에서, 어떻게, 지속 가능한 방법을 벌 수 있는지도 알 수 없고, 진지하지 않으면 주위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 지도 알 수 없다. 무엇보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만큼은 진지하고 생각이 많지 않은 이상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런 삶이 정말 행복하다고 생각하는가? 이처럼 진지하지 않을 이유보다는 진지할 이유가 훨씬 많다.
물론, 매사에 필요 이상으로 진지한 사람만큼 피곤하고 힘든 사람도 드물기에 '진지충'이란 표현이 나오게 된 배경은 이해한다. 하지만 그런 표현 하나가 '진지할 필요 없고, 진지한 것은 쿨하지 않고 나쁜 것'이라는 인식을 누군가에게 심게 되면, 그건 그 사람의 인생을 나락으로 몰고 가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이는 진지하지 않게 되면 모든 것을 충동적으로, 자신의 욕구와 욕망에 이끌려서 결정하고 행동하게 되는 데 그런 사람은 자신도 건강한 자아를 가질 수 없을 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이 감당하기 힘들 수준의 피해를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진지할 때는 진지하고, 생각할 때는 생각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의심해 보고, 한 문제를 가지고 다각도로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사람들은 그게 피곤하고 힘들다며 그런 시간 갖는 것을 회피하지만 그렇게 회피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고, 그렇게 회피하기만 한 문제는 안에서 곪고 곪다 썩어서 그 사람을 망가트릴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진지하고 심각해야 할 지점에 대해서는 진지하고 심각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시간을 들여야만 한다.
그렇게 진지하고 진지한 나의 성향을 받아들이고 그렇게 살다 보니 깨닫게 되는 게 있다. 그건 정말 생각과 진지함이 극단으로 가면 모든 게 심플해진단 것이다. 계속 의심하고, 묻고, 질문하다 보면 그에 대한 나의 답들이 정리되고, 그 답을 내리는 데까지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쓰면 쓸수록 그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말에 흔들리지 않게 된다. 이는 대부분 사람들은 어떤 문제를 끝까지 놓고 고민하는 적이 없다 보니 그렇게 고민을 해 놓으면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의 맥락과 수준, 깊이가 파악되기 때문이다. 나도 그 생각을 했던 적이 있고, 거기에서 더 나갔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흘릴 것은 흘릴 수 있게 된다.
불혹이라는 마흔은 어쩌면 그런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마흔에 불혹에 최대한 가까운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고민하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불혹에까지 이르렀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많은 문제들이 그렇게 정리되고 받아들여지니 역설적으로 내 생각과 마음이 가벼워짐을 최근에 느낀다. 더 이상 고민하고 생각할 소재가 없으니, 더 이상 그렇게까지 진지하고 생각이 많을 필요가 없이 현실에서 행동을 하면 되고, 심각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어느 정도의 여유가 생기더라.
그렇게 가벼워지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진지해야 하고, 생각과 고민을 많이 해야 한다. 세상은, 인생은 그렇지 않고서는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힘든 것들이 너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