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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on de Cyrene Apr 14. 2023

결혼, 어떤 사람과 해야 할까?

결혼과 연애와 사랑에 대한 소고. 3편

앞에서 검토했듯이 결혼은 자신과 상대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잘' 할 경우 하지 않은 것보다 우리 삶이 나아질 확률이 훨씬 더 높다. 그렇다면 결혼해서 행복할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당연히 자신을 먼저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확실한 건 우리나라 사람들 중 상당수, 어쩌면 대다수는 자신을 잘 모르는 상태로 살아간단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장담을 하냐고? 그건 우리나라 대학입시만 봐도 알 수 있다. 우리나라는 과거보다도 의대와 이공계로의 쏠림현상이 심화됐는데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경제적인 요인이다. 더 안정적으로, 잘 먹고살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고 취업이 원활할 것 같아서. 그 이유가 아니면 이렇게 의대와 이공계, 그중에서도 특히 이공계로의 쏠림 현상이 요즘처럼 발생할 수가 없다. 모든 사람들은 다르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교육제도가 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나는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른 맥락에서 이 지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학교가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대부분 경우 '학교에서 배운 것만으로 입시에 성공할 수 없고, 학원에 가야 하기 때문에 학교게 본연의 역할을 다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공교육제도의 기능과 역할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하는 무지함에서 비롯된 비판이다.


공교육제도는 학생들이 대학에 잘 갈 수 있게 만들어주는 법제도가 아니다. 공교육제도는 개인이 사회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정서적, 사회적, 지식적인 기초를 형성하는데 필요한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다. 그렇기 때문에 공교육제도에서 습득하는 '입시에 필요한 지식'은 공교육제도가 제공하는 서비스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아이들은 공교육제도 하에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하고, 배려하는 법을 배우고, 경험하고, 익혀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공부하고, 암기하고, 시험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노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배움에 속한다.


그러한 공교육제도를 망가뜨리는 것은 궁극적으로 부모들이다. 상당수 부모들이 자신의 자녀밖에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자녀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서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보내는 것만 생각하다 보니 그와 관계없는 요소들은 공교육제도에서 제거할 것을 요구하고 교사들은 그런 요구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서 시험문제도, 교육과정도 그 요구에 맞추게 된다.


모든 교사들이 '잘'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내가 직접 경험한 '선생님' 중에 선생님 답지 못한 사람들도 분명 있었다. 그러한 교사들의 잘못이나 과실은 어떠한 방법으로도 정당화될 수는 없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들이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한 것은 부모들은 자신이 한 번 항의하고 요구했다고 생각하지만 교사들의 입장에선 자신이 교사로 일하는 기간 내내 그런 항의와 요구를 들어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정부와 교육청에서 요구하는 것들도 교육과정이 바뀔 때마다 계속 바뀌니 교사들도 지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의 공교육제도는 개인이 자신을 발견하는 시간과 과정을 더 이상 제공하지 못할 정도로 망가졌단 것이다. 그렇다 보니 공부 잘하는 학생들은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없다고 무시하고, 공부 못하는 학생들은 교사들을 과거보다 더 존중하지 않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카오스 안에서 12년을 보낸 학생들이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하며, 어떤 사람과 함께 할 때 건강한 사랑을 할 수 있을지를 알게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혼생활이 불행해지는 가장 크고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나라 사람들 중 상당수가 그러한 상태에서 더 성장하거나 자신을 알아가지 못하고 스펙, 외모, 연애기간 등을 바탕으로 결혼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스펙, 외모, 연애기간이 의미 없고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아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글에서 다시 하겠지만 나는 그런 요소들이 연애와 결혼에 꽤나 중요하게 작용할 수 있는 요소이며 모두 중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개인의 성향에 따라 다르게 작용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요소들이 절대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결혼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두 사람 모두 반드시 갖춰야 할 조건이 세 가지 있다면 첫 번째는 상대의 말을 들을 줄 알아야 하는 사람이고, 두 번째는 정직해야 하며, 세 번째는 서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다름이 있어야 한단 것이다. 이 조건들이 아이러니한 것은 이 세 가지는 사실 상호 간의 연관성이 있기 때문에 이 중 한 가지가 되는 사람은 세 가지가 모두 되고 한 가지 안 되는 사람은 보통 세 가지가 다 안된단 것이다.


상대방의 말을 들을 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은 우리는 모두 다른 인간이기 때문에 다름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데 그 다름의 타협점을 찾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대화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대화는 '말하고 듣기'이지 '말하기'가 아니란 것이다. 그런데 초등학교 때부터 경쟁을 강조하고, 세상에는 정답이 있는 것처럼 교육받으며, 자신의 주관을 표현하는 방식의 시험이 아니라 정답을 고르는 시험만 봐 오는 교육제도 안에서 살아온 우리나라 사람들 중 상당수는 '말하는 법'만 알지 '듣는 법'은 모른다. 그리고 그중 상당수는 심지어 관계도 경쟁으로 간주하고 자신이 상대를 '길들여야 한다'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사람과는 절대로 건강한 관계를 형성할 수 없는데, 이는 그런 사람은 절대로 다름을 존중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모두 다름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다름을 존중할 수 없다면 그건 결국 상대가 자신에게 굴복하고 모든 것을 맞추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닌가? 그건 연인이나 배우자가 아니라 노예를 원하는 것이다.


정직한 것이 중요한 것은 연인이나 부부가 아닌 다른 관계에서도 '신뢰'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과 일을 같이 할 수 있을까? 신뢰가 깨지는 순간 우리는 상대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그 관계는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상대가 하는 말과 행동을 신뢰할 수 없다면 상대에게 당신은 어떤 말을 털어놓을 수 있을까? 나는 신뢰하지 못하는 상대에게 최대한 말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연인이나 부부관계에서 그런 방식으로 대화가 단절되기 시작하면 그 관계도 멀어질 수밖에 없다. 이는 두 사람이 아무리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도 대화를 하지 않으면 함께 하지 않는 시간에 대한 정보와 서로의 마음과 생각이 전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뢰에 균열이 발생하는 시작점에는 많은 경우 '다름에 대한 존중의 부재'가 있는 것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상대의 다름을 틀림으로 여기고 상대에게 그것을 고칠 것을 요구하면 그 사람은 그것을 고치기보다는 상대가 싫어하는 것을 상대 앞에서만 하지 않고 몰래 뒤에서 하기 시작한다. 왜 그러냐고? 사람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기혼자나 이혼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만난 지 2-3개월 안에 결혼한 사람이 아니라면 상대에 대해서 몰랐던 점 때문에 다투는 경우는 거의 없는 듯하다. 대부분 갈등은 상대에게 고치라고 요구해서 상대가 그 앞에서만 고친 것처럼 행동하거나 자신에게 거슬렸지만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넘어갔던 것들이 뒤에서는 하고 있던 것이 결혼한 후에 반복적으로 부딪히면서 문제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결혼하기 전에 자신에게도, 상대에게도 솔직해야 한다. 상대가 하는 특정한 행동이나 패턴, 말이 불편하게 여겨지면 그에 대해서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고 그에 대해서 상대도 솔직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화를 내고, 지적하고, 고칠 것을 요구하기보다는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상대의 특정한 행동, 말이나 패턴이 왜 불편한 지에 대해 설명한 후 상대가 어느 정도 수준으로 맞춰나가는 노력을 할 수 있을지를 물어보는 게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일 수 있는 건 그래야 그 말을 듣는 상대의 입장에서 그 말이 자신을 지적하는 것으로 들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과정을 반복하면서 서로의 다름을 맞춰가다 두 사람 모두, 혹은 한 사람이 자신이 상대와 자신의 다름을 평생 감당할 자신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면 두 사람은 헤어지면 된다.


이 모든 과정은 연애를 하면서 이뤄져야 한다. 사람들이 연애를 1년은 해 봐야 한다고 하는 건 이 때문인데 사실 연애기간이 순탄하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연애를 10년을 했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 같이 놀러 가고, 스킨십을 즐기면서 가벼운 얘기만 했다면 두 사람은 그 10년 동안 서로의 진짜 모습은 모를 수 있다. 반면에 2-3개월을 만났어도 자신을 잘 아는 사람들이 만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솔직하게 공유하고 그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눴다면 두 사람은 만난 기간에 비해서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을 수도 있다. 연애에서 중요한 것은 양보다는 질이고, 양이 반드시 질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상대의 특정한 성향이나 경향이 본인과 안 맞거나 본인이 그에 대해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 그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상대의 그러한 성향이나 경향을 비판하거나 판단하고 바꾸려고 하기 전에 누군가에게는 그게 괜찮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상대와 결혼까지 생각을 하고 있다면 결혼하기 전에 그에 대한 대화들을 충분히, 잘 나눠야 한다. 만약 그 과정에서 아무리 대화를 해봐도 상호 간의 감당할 수 없는 다름을 발견한다면, 자신이 상대를 존중하지 못하거나 상대가 자신을 존중해주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다면, 심지어 상대가 정직하지 않은 듯해서 신뢰하기가 힘들다면 일단 결혼은 그런 문제들이 해결될 때까지 미루는 게 맞다. 이는 그런 부분들이 지금 당장 보이지 않아도 발견되는 다름이 있는 게 결혼생활인데, 이미 그런 문제를 안고 시작하는 결혼생활은 힘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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