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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on de Cyrene Jun 07. 2023

이혼이 어때서

결혼과 연애와 사랑에 대한 소고. 8편

어렸을 때부터 이혼은 잘못된 것으로 들으면서 자랐다. 개신교 가정에서 태어나 자란 영향이다. 현시점에 이혼에 대한 나의 생각은 완전히 달라졌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성경에 이혼에 대한 절차를 인정하고 있는 내용이 신명기 24장 1-4절에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서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했을 때 요셉이 마리아와의 약혼을 깨려 했다는 사실이 마태복음 1장 19절에 나온다는 사실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이혼이 허용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나라의 개신교 교회에서 이혼을 죄악으로 여기고 무조건적으로 배척하게 된 배경에는 성경에 쓰여 있는 내용을 맥락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율법적으로, 마치 정해진 법이 있는 것처럼 여기는 문화가 있다. 그런 식의 문화적인 이야기가 나올 때면 나는 항상 반문한다. 삼겹살을 먹지 않냐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원칙을 성경에서 정하고 있는 대로 적용받을 생각이 있냐고. 


성경에 나오는 다른 율법적인 내용들은 피해 가면서도 '이혼'에 대해서만큼은 우리나라 개신교 신자들 중 상당수가 꽂혀서 '죄악'으로 여기는 것은 우리나라에 여전히 존재하는 유교적 문화의 영향이 있다. 유교사회에서 결혼은 집안과 집안 사이의 만남이다 보니 이혼이 쉽게 용납되지 않았고, 이혼하는 것은 집안의 수치로 여겨졌는데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개신교가 들어오다 보니 사람들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춰서 그 부분을 그대로 수용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건 '유교적'일 수는 있어도 '기독교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는 성경에서 이혼을 하지 말라는 내용은 '약자의 보호'적인 차원이 강하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여전히 많은 분야에서 사회적으로 약자이지만 성경이 다루고 있는 시대에 여성들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남성우월적인 시대였다. 구약시대에는 일부다처제가 허용된 것은 물론이고 신약시대에도 모인 사람들의 총합에는 아이와 여자는 포함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 시대가 얼마나 남성우월적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시대에 이혼을 '허락'한다는 것은 결국 남자가 언제든지 여자를 버려도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그런 시대에 여성이 남성에게 이혼을 통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봤을 때 성경에서 이혼을 금하는 것은 남성에게 혼인 후에 여성을 함부로 버리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 주된 목표였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혼을 하는 절차에 대해 정하고 있는 신명기에서 이혼증서를 여성에게 주는 것을 전제로 하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따라서 성경에서 이혼을 금하는 것은 당시의 사회적 환경과 분위기의 특성상 여성이 남편에게 일방적으로 이혼을 당한 후에 그 여성이 사회적으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신약시대에 예수님이 지배계층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들과 어울리며 그로 인해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에게 비난을 받지 않았나? 성경은 곳곳에서 '약자들과 함께 하라'라고 말하고 있고, 이혼제도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렇게 사회적 맥락으로 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혼이 법처럼 금지될 이유는 없다. 이는 성경에서는 개인에게 기본적으로 자유를 허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녀가 성경이 쓰여진 시대보다는 상대적으로 평등해진 오늘날에 이혼도 당연히 허락은 된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혼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거나 막 해도 된단 것은 아니다. 성경에서 정하고 있는 율법들은 사회적으로, 인간의 본성에 비춰봤을 때 그래도 하지 않는 게 낫기 때문에 '권장'하고 있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는 이혼을 하는 과정만 살펴봐도 분명히 알 수 있다. 기성세대들은 '요즘 사람들은 너무 쉽게 이혼을 한다'라고 하지만 내가 주위에서 살펴본 지인들의 이혼과정에 의하면 이혼은 여전히 힘들다. 현실적인 요소들 때문에 힘든 면도 있지만, '평생 함께 할 것이라고 믿고 신중하게 결정한 결혼이 깨어짐으로 인한 힘듦'은 이혼한 사람들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이혼을 해보지 않은 나는 내가 무엇을 상상하든지 그 이상일 것이란 것만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렇다 보니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전제되는 개신교적인 관점에서 어쨌든 막지 않고 결혼을 '허락'하신 데는 하나님도 이유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 우선 가정을 지키라는 것이 전제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혼을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도 아닌 것은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도 성경에서 전제가 되는데, 이는 어떤 인간도 이 땅에서 완전히 신의 계획과 목표에 맞는 수준의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인간은 그 내재적인 한계로 인해 완벽해지지 못하고, 매일 실수하고 넘어지기를 반복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맞춰갈 수 있다면 이혼을 하지 않고 서로 맞춰가는 게 좋겠지만 그게 힘든 경우 이혼을 하는 것 자체가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행위가 아니라 마음이 핵심이라고 말하고 있다. 


개신교적인 관점이 아니더라도 이혼은 '가능하다면' 하지 않는 게 낫다. 특히 아이가 있는 경우에는 부모의 이혼이 아이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두 사람이 일정 수준으로 맞춰서 살 수 있다면 이혼은 하지 않는 게 나을 것이다. 다만, 이러한 경우에도 만약 부모의 관계가 극악으로 치달아서 아이가 그로 인해 오히려 상처를 받고 불안하게 된다면 오히려 이혼을 하는 게 아이의 정서적 안정을 위해서 나을 수도 있단 것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무조건 이혼하지 않는 게 능사는 아니란 것이다. 


이에 대해서 기성세대들은 '그놈이 다 그 놈이고, 참고 살아'라고 말하는데, '한국의 사회 동향 2020'에 의하면 전체 이혼 중 혼인 지속 기간이 20년이 넘는 황혼 이혼은 34.7%를 기록했다. 그리고 이혼 당시의 평균 나이도 1990년에 비해 남성은 36.8세에서 48.7세, 여성은 32.7세에서 45.3세로 늘어났다. 여기에 더해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나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공식적으로는 이혼하지 않고 남남처럼  사는 노부부가 적지 않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렇게 말하는 세대에 실질적인 이혼을 한 사람들은 그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그렇게 살고 계신 분들이 이혼을 하지 말라고 하는 건 뭔가 이상하지 않나? 


기성세대들은 냉정하게 얘기해서 다른 사람의 시선과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이혼을 '안'한 것이 아니라 '못'한 세대에 가깝다. 그도 그럴 것이 1990년대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이혼을 했다는 사실을 입 밖에 낼 수도 없는 분위기가 아니었나? 여기에 더해서 20-30년 전에 결혼을 하신 분들은 '개인'에 대한 인식보다는 '가족, 사회와 국가'에 대한 인식이 강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 많은 경우 그 연령대의 여성들은 부당하고 말도 안 되는 상황들을 견뎌냈지만 80년대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 중에 그런 의식체계를 가진 사람들은 많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상호 간에 존중과 대화가 이뤄지지 않는 관계를 지속하라는 것은 폭력이다. 


물론, 다시 말하지만 결혼을 이미 한 상태라면 '가능하다면' 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최선을 다해야 한다. 두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화도 하고, 필요하면 상담도 받으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맞춰가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은 그러한 노력 없이 이혼을 하게 되면 상대는 물론이고 남성이나 여성 자체에 대한 불신을 갖게 되어 본인의 삶이 불행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구를 만나든지 어느 정도 이상의 차이는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이혼하지 않고 관계를 잘 만들어나가기 위한 노력은 최대한으로 해야 한다. 결혼을 쉽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고, 두 사람이 결혼을 했다는 것은 어쨌든 그 관계에 어떠한 형태로든지 유대감이 있다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는 불씨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맞춰지지 않는다면,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거나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면 두 사람은 헤어지는 게 나을 수 있다. 이는 그렇지 않으면 그 삶은 지옥과 같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혼은 '실패'가 아닌 '실수'임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혼이 실패가 아니라 실수인 것은 상대도 자신과 더 잘 맞는 사람과 결혼을 했다면 그렇게 힘들지 않았을 수 있고, 이는 본인도 마찬가지며 이혼을 하게 되었다고 해서 뭔가가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혼에 대한 나의 다른 글에 '이혼은 실수도 아니고 그냥 일어난 일일 뿐이다'라고 댓글을 달아주신 분이 있었는데, 그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동의하기 힘들다. 이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결국 나의 선택에는, 내게는 아무 문제가 없었고 상대가 이상한 사람이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혼에 이르게 된 것은 두 사람이 모두 자신과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를 충분히,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 실수는 인정을 해야 다음에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혼이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한 것이었음은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혼을 수차례 반복해서 하는 사람들은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과거와 같은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다. 


개인적으로는 두 가지 경우에는 이혼을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데 첫 번째 경우는 두 사람이 돌이키기 힘들 정도의 다름이 있고, 그 다름이 감당하기가 힘든 상황에서 두 사람 모두 그 다름을 바꿀 생각이 없는 경우다. 그러한 경우에는 두 사람이 노력으로 바꿀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에 상대가 달라질 것을 요구하기보다는 갈라서는 게 나을 수 있다. 


두 번째 경우는 본인이나 상대가 듣는 귀가 없는 경우다. 여기에서 내가 '본인이나 상대가'라고 한 것은 본인이 듣는 귀가 없는 사람들은 항상 남 탓만 하기 때문이다. 이혼을 놓고 고민하는 부부 중에 '모든 것이 상대 탓'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은 아무 잘못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남의 말을 듣는 귀가 없는 이기적인 사람일 확률이 높은데 이는 이혼을 고려하는 모든 관계에는 '틀림'과 함께 '다름'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본인이나 상대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 부부 역시 이혼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인간도 100%, 모든 것을 상대에게 맞춰서 평생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부부는 속이 곪고 곪다 결국 더 안 좋은 모습으로 이별하게 될 확률이 있고,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에 차라리 일찍 헤어지는 게 나을 수 있다. 


결혼에 감정이 앞서야 하는 것은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은 감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좋아할 때, 상대를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먼저 바라볼 수 있을 때야 비로소 우린 우리가 갖고 있는 틀과 한계를 넘어설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경험을 통해 각자의 세상이 확장되어야 두 사람의 세계가 조금씩 맞춰질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그런 과정 없이, 그런 과정을 간과하고 결혼을 한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결혼생활은 불행해진다. 그 과정이 거쳐지지 않는 사람과 가정을 꾸렸고, 노력을 해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 확실해 보인다면 이별하는 게 나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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