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았다

모든 관계에는 정답이 있다. 1편

by Simon de Cyrene

우리 집이 가난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어렸을 때와 지금의 느낌은 조금 다르다. 어렸을 때 난 우리 집은 꽤 잘 사는 편이라고 생각했고, 지금은 못 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내가 세상을 조금 더 알게 되어서 그런 면도 분명 있다. 어렸을 때는 작은 것도 좋았고, 큰 걸 바라진 않았으니까. 지금은 어쨌든 돈을 벌었고, 가난해 봤고, 돈에 대한 글도 적지 않게 썼을 정도로 세상을 알기 때문에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시선이 객관적으로는 더 정확할 것이다.


하지만 그 문제가 아니다. 시간이 지나, 나이가 들어 생각해 보면 우리 부모님은 항상 돈에 쫓기는 마음을 갖고 계셨다. 어렸을 때 트랜스포머를 만화로 보고 좋아했고, 산타 할아버지께 트랜스포머 장난감을 달라고 기도를 했는데 산타는 이상한 다른 로봇을 트리 아래 놨더라. 그때 처음 알았다. 산타는 없다는 걸. 산타라면 내가 원하는 걸 정확히 알았을 테니까. 물론, 그다음 해에는 트리 아래 있는 둘리 만화책을 보고 난 다시 산타를 믿었다.


아버지는 대기업에 다니는 회사원이셨다. 하지만 대기업이라고 다 연봉이 엄청나게 높은 것은 아니다. 아버지는 누구나 이름을 들어봤을 법한 대기업 두 곳을 다니며 정년퇴직하셨지만, 두 대기업은 모두 대기업 치고 연봉이 엄청나게 높은 곳은 아니었다. 그 와중에 부모님은 조부모님께 지원을 받지 않고, 알뜰살뜰 돈을 모아서 서울에 집을 사셨다. 아끼고, 아끼고, 아끼셔야 가능했던 일이다.


내가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던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고 싶은 걸 못했던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내가 가고 싶지 않다는 학원도 보내셨고, 내가 하고 싶다는 건 크게 거절한 적은 없으셨다. 돌이켜보면 항상 조금 애매하게 낮은 단계의 것들을 해주거나 사주셨지만 당시에 난 그걸 크게 의식하진 않았다. 더군다나 무역회사를 다니신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해외, 그것도 조금 물가가 낮은 국가에 오래 살았다 보니 난 우리가 가난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이 역시 부모님께서 나와 동생을 위해 가능하면 최선의 것을 주기 위해 노력하셨기 때문이다. 아버지 회사는 학비를 100% 대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은 나와 동생을 학비가 비싼 미국인 학교에 보내셨고, 어떻게든 우리가 영어와 중국어는 익히게 하려고 하셨다. 물려줄 돈은 없으니 먹고살 수 있는 능력은 안겨줘야겠다는 게 아버지의 말씀이셨다.


우리 집이 부자는 아니란 걸 알았던 건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가 아닐까 싶다. 미국학교 시스템에서 공부도 꽤 잘하는 편이었고, 가장 예민한 시기를 해외에서 보냈다 보니 나는 한국 사람보단 미국 사람에 가까운 사고체계를 갖고 있었다. 나는 부모님이 절대로 영어를 쓰지 못하게 하셔서 한국말은 편하게 했지만 고등학교 수업을 갑자기 들을 정도로 한국말을 하진 못했다. 그래서 선생님들은 대학은 미국으로 가라고 하셨지만, 아버지는 고등학교 친구가 평생 간다며 날 기숙사가 있는 한국 학교로 보내셨다. 나는 그렇게, 혼자 고등학교 1학년 2학기에 홀로 귀국을 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어머니께서 말씀해 주시더라. 사실은 미국대학에 보내는 건 감당이 안 됐다고. 학비는 어떻게 해본다고 해도, 생활비까지 지원해 줄 수가 없었다고.


아쉽지 않다. 한국에 돌아와서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내 모교를 사랑하고 그 과정 덕분에 내가 알게 되고 익힌 것들이 있기에 전혀 아쉽지 않다. 분명한 건 그 뒤로 나는 우리 집이 어쩌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여유가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점점 더 알게 됐다는 것이다. 대학에 가자 주위엔 정말 잘 사는 친구들이 보였고, 독특한 부대에서 군생활을 했다 보니 그 안에선 내가 거의 가장 가난했다.


하지만 부모님을 원망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젠 두 분이 어떤 마음과 시간을 보내며 나를 키우셨을지를 상상은 할 수 있을 정도로는 우리 집의 형평과 현실을 알기 때문에. 그리고 두 분이 항상 최선을 다하셨다는 것은 알기 때문에.


어머니는 평생을 아버지 연봉도 모르는 상태로 넉넉하지 않은 생활비만 받으며 조금이라도 좋은 것을 많이 먹이려고 한 푼이라도 아껴서 좋은 것을 많이 살 수 있는 매장에서 장을 보셨다. 그리고 아버지는 조금이라도 돈을 불리고 넉넉하게 지내보시려고 부단히 주식투자를 하셨다. 거의 20년 전 금액으로 수 천만 원을 날리셨지만, 아버지라고 잃고 싶어서 잃었겠나. 지금은 그 마음을 이해한다. 어머니께서 그 빠듯한 생활비에서도 내가 군대에 있을 때 유럽 배낭여행 가라고 매달 20만 원씩 적금을 넣어주셔서 만들어진 500만 원도 불려주겠다며 가져가서 다 날리셨고 20년 넘게 미안하단 말 한마디 없으시지만, 그것도 선한 의도가 있으셨기에 이젠 그냥 넘길 수 있다.


더 넉넉했으면 좋았을까? 좋은 점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더 넉넉했다면, 내가 몰랐을 세상과 경험도 많다는 것을, 우리 집이 부자도 아니지만 가난하지도 않기 때문에 내가 보고, 듣고, 느끼게 된 것들이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두 분이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내셨단 것도. 심지어 지금의 나보다도 10년 넘게 어렸을 때 나를 낳아서 돈을 벌고 애를 키우셨으니 두 분이 얼마나 힘드셨겠나? 이제는 그게 얼마나 대단한 지를 알기 때문에 두 분에 대한 어떤 억한 감정도 없다.


물질적인 면으로는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게 괜찮은 것은 아니다. 그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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