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입은 줄 몰랐던 상처덩어리

모든 관계에는 답이 있다. 2편

by Simon de Cyrene

중요한 시험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학부시절에 했던 동아리 후배가 오랜만에 연락이 왔고, 얼마간 통화를 하던 중에 후배가 '왜 이렇게 유들유들해졌어?'라더니 내가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는 이야기를 했다. 학부시절 내 모습에 대한 이야기였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냐는 질문에 후배는 "자신에 대한 기준은 너무 높아서 안쓰러울 정도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기준을 낮추지만 여전히 요구하는 기준이 남들보다 높은 사람"이라고 했다. '얘가 나를 이렇게 잘 알았나?' 싶을 정도로 맞는 말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조금은 달라졌지만, 나는 여전히 스스로에게 엄격한 편이다. 처음 해보는 사범대, 그리고 3시간 연강 강의에 준비해 간 내용을 너무 짧게 마치고 나서 이틀간 스스로에게 화가 나서 아무것도 못했을 정도니까 정상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 다른 것에는 유연한 편이지만 내 기준에 선을 넘는 말이나 행동이 반복되면 그 사람과의 관계는 조용히 정리하는 편이다.


이런 나의 특성은 부모님에게서 왔다. 두 분은 모두 당시에 명문고를 졸업하셨고, 두 분 모두 원하던 서울대학교는 가지 못하셨다. 재수를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추측컨대 두 분은 그런 지점에서 공감대를 형성하며 빠르게 가까워지셨을 것이고, 그러니 처음 만나고 나서 거의 매일 만나다 두 달 만에 결혼하셨겠지...


그런 두 분은 내게 항상 엄격하셨다. 이 내용을 글로 쓰는 지금까지도 난 두 분께 맨 정신에 하시는 칭찬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리고 난 어렸을 때부터 모든 것을 잘해야만 했다. 심지어 놀이기구를 타는 것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비행기가 무서워 타지 못한 나는 아버지께 그 앞에서 엄청나게 혼이 났고, 한국에서 영어학원을 다니다 갔음에도 교장선생님 앞에서 입도 뻥끗하지 못했다고 나는 집에 와서 아버지께서 '돈이 아깝다'라고 하시는 말을 들었다.


두 분이 나쁜 의도를 가지신 건 아니었다. 미국인 학교에서 학생회장에 당선됐을 때 어머니의 첫마디는 "여러 나라 애들 있는데 한국 사람이 학생회장이 됐으니까 공부도 잘해야 된다"였지만 그 뒤에 어머니는 아들 자랑하는 전화를 돌리셨고, 아버지는 술을 드시고 나면 예쁘다, 잘한다는 말을 쏟아내셨다. 두 분이 보시기에 자랑스러운 일을 내가 해내면 두 분은 내 앞에서는 칭찬을 하지 않으셨지만 뒤에서는 자랑을 하셨다.


몰랐다. 내가 그 과정에서 상처를 받았다는 걸. 일반적인 기준에서 좋은 성적을 자주 받았고, 좋은 대학에 진학했으며, 좋은 직장을 다니다 좋은 로스쿨에 다녔지만 그럴 때도 '너 그러니까 더 잘해야 돼'라거나 '그거로 만족을 하겠다고?'라는 말을 듣는 게 내게 얼마나 상처를 입히고 있었는지를 나는 몰랐다. 그럴 때마다 나는 "칭찬 좀 해달라고!"라고 했지만, 부모님은 그때마다 "넌 또 칭찬 타령이니?"라고만 하셨고, 난 그렇게 30대 초반까지 스스로를 채찍질만 하며 살았다. 상처를 입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러던 게 터졌다. 내 인생에서 가장 어둡고 힘든 시절의 입구에서. 나는 당연히 합격할 줄 알았던 변호사시험에 떨어졌고, 고속도로만 타고 갈 줄 알았던 인생이 갑자기 깜깜하고 불안해지면서 내 안에 곪았던 상처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그리고 두 분께는 항상 '잘 견디며 잘 참는' 아들이었던 내가 그 상처들을 터뜨리며 두 분에게 화살을 돌리자 두 분은 당황하시는 걸 넘어 내가 이상하다며 정신의학과 치료를 받아보게 하라고 하셨다.


난 힘들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두 분이 있는 힘을 다해 나를 챙겨주셨으니까. 특별히 부족한 게 없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상처를 터뜨릴 때 두 분도 같은 말을 하셨다. 우리가 너한테 뭐 그렇게 못해준 게 있냐고, 우리가 왜 너한테 지금 이런 얘기를 들어야 하냐고. 틀린 말이 아니었다. 앞의 글에서 썼듯이 두 분은 본인들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나를 키우셨기 때문에.


힘든 시기였다. 있는 줄도 몰랐던 내 상처들을 처음 발견했는데, 그 상처를 해결하고 가겠다고 마음을 먹자 내가 이상한 애가, 정신병자가 되어버렸으니까. 나로 인해 집안이 항상 시끄럽자 동생은 "형 애야? 그냥 넘어가면 되지 왜 그렇게 난리를 쳐?"라고 했고, 그 또한 이해가 됐다. 하지만 난 그 상처를 그대로 둘 수 없었다. 해결하고 가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내가 가정을 꾸렸을 때 아내와 아이이게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오해하지 몰자. 두 분은 내게 항상 최선을 다하셨다. 나도 그걸 알았고, 지금도 알고 있다. 하지만 부모님도, 나도 모르는 게 있었다. 그건 현실에서 무엇을 해주느냐는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단 것이었다.


그 뒤의 이야기는 다음 글로 넘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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