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가장 중요한 게 아니라면, 무엇이 가장 중요할까? 그 답은 사실 분명하고 간단하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건 나 자신이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그래, 나는 나 자신을 위해 돈을 버는 거라니까!'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어떤 과정을 통해 돈을 버는 지를 생각해 보자. 우린 누군가가 돈을 쓰고, 그 돈이 여러 시스템을 통해서 내 주머니로 들어오게 됨으로써 돈을 벌게 된다. 이건 우리가 돈을 벌기 위해서는 벌게 되는 돈에 상응하는 무엇인가를 남에게 맞추고 줘야 한단 것을 의미한다.
당신이 금수저라면, 혹은 당신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했는데 우연히 그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많은 돈을 벌게 됐다면 축하한다. 당신은 아마 인류의 0.1% 안에 들어가는 사람일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 자신이 힘들어하거나 싫어하는, 그것도 아니면 귀찮아하는 일을 남을 위해서 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을 희생하면서 돈을 버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잊어버린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인생의 대부분을 그런 모습으로 살아오셨다. 우리나라는 1970년대까지도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한 곳이었기 때문에 우리 부모님 세대는 그러실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보니 우리 부모님 세대 중 상당수는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취미생활을 하고 싶은지를 알지 못한다. 그들이 살아온 시대에는 '생존'이 지상과제였기 때문에. 그리고 또 조직에 충성을 다하면 그 생존을 하는 건 보장된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하지만 지금의 20-40대들은 완전히 다른 시대를 살아간다. 이 연령대의 사람들은 조직에 충성을 다해도 생존이 보장될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안다. IMF가 그러한 사실을 보여줬고, IMF 이후에 우리나라는 항상 그래왔으니까. 그리고 지금의 20-40대들은 최소한 생존 그 자체가 목표였던 시대를 살진 않았다. 그 연령대에서 정말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았던 사람들도 화장지가 부족하거나 물리적으로 굶어 죽는 사람을 옆에서 보는 경우는 매우, 극히 드물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성장한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뭘 해야 나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을까?'란 고민이 생길 수밖에 없다. 조직이 본인의 안정을 보장해 주기 않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은 직간접적인 경험을 통해 절대로 일단 머리를 박고 열심히 일하는 게 자신에게 그 안정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것도 알다 보니 조직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에는 거부감을 갖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 지점이 20-40대가 하는 가장 큰 실수다. 왜냐고? 이는 우리가 무엇인가에 정말 올인해서 최선을 다해보지 않는 이상 그 길이, 그 업이 자신과 맞는지 여부를 분명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돈을 버는 건 어차피 힘든 과정이 아닌가? 남에게 나를 맞춰줘야 하니 말이다. 그렇다면 어차피 힘들 거, 기왕이면 그 과정에서 보람이나 의미, 가치나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왜냐고? 그나마 그런 것들이 있어야 오랫동안 일할 수 있고, 남에게 일정 부분을 맞춰주는 고통도 덜할 테니까.
사실 우리가 보람, 의미, 가치나 재미를 느끼는 영역은 공교육제도를 거치면서 발견되어야 하는데 우리나라의 공교육제도의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내가 고등학생일 때도 이과 편중현상이 있었지만 최근에 들은 바에 의하면 남자 고등학교의 경우 전체 학급 중에 한 반만 문과일 정도로 이과 편중 현상이 심하고, 공부를 조금 잘한다 싶은 학생들은 모두 일단 이과로 가고 본다고 한다. 왜 그럴까? 의대에 가면 모든 게 해결될 것 같고, 의대는 못 가도 공대를 가야 취업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게 그 학생들의 잘못일까? 아니다. 그건 여전히 마치 인생에 정답이 있고 모든 사람들이 동질적인 것처럼 세뇌시키는 사회와 어른들의 잘못이다.
의사나 한의사를 하면서 하루, 하루가 고통스러운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다. 변호사는 더 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의사나 한의사는 하루 종일 아픈 사람만 봐야 하고, 변호사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불안한 사람들만 만나지 않는가? 거기다 의사, 한의사나 변호사가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는 어느 순간서부 턴가는 영업을 하고 사람들 관리를 해야 하는데 책상머리에 앉아서 줄 세우는 공부에 재능이 있는 사람들 중에는 그런 능력치가 부족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이 개업을 하고 나면 얼마나 하루, 하루가 힘들고 고통스러울지는 상상도 가지 않는다.
이처럼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의 공교육제도 안에서는 자신을 발견하는 게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라도 여러 시도를 하고 좌충우돌하면서 자신이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를 알아갈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는 자신의 마음과 생각에 꽤나 예민하고 신중하게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데, 우리 사회에서는 그렇게 진중한 것을 '쓸데없이 진지하다'라고 폄하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 번 사는 인생 아닌가? 그 인생에서 중요한 지점에 대해서는 진지하고 진중한 게 당연한 게 아닐까?
우리 사회에서 평생직장이 보장되지 않았다는 건 그만큼 노동시장이 조금은 더 유연해졌단 의미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1-2년에 한 번씩 이직을 할 정도로 이제는 회사를 옮기거나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게 예전보다는 자연스러워졌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자신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생계는 확보할 수 있는 경로는 유지한 상태에서 다양한 시도를 해 봐야 한다. 그 과정은 고통스럽고 힘들 수는 있지만, 지금 당장 그 고통과 힘듦은 우리가 포기하지 않는 이상 우리에 대한 투자로 돌아와서 우리가 최소한 덜 불행할 수 있게는 해줄 것이다.
지난 10년은 내게 그런 투자의 시간이었다. 변호사시험에 불합격하면서 법조계를 떠날 생각도 했지만, 그러기에 난 내 박사전공을 너무 좋아했다.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후에도 마치 사람들이 내게 손가락질을 하는 듯해서 법조인들 사이에 있는 게 불편했지만, 학술대회에 나가서 토론이나 발표를 할 때면 가슴이 뜨거워지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보니 나는 법학을 떠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는 프리랜서로 여러 일을 하면서 내가 결국은 말과 글, 즉 언어로 내 생각을 표현하고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에서 보람과 의미 그리고 가치를 느낌과 동시에 그럴 수 있는 최소한의 재능은 있음을 발견했다. 말과 글로 밥벌이를 할 정도는 됐고, 기회가 계속 들어왔으니까. 나는 그래서 다양한 일을 해 왔고, 여전히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할 생각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나는 학부 때부터 이렇게 살았다. 오죽하면 내 친구는 '넌 시대를 잘 만나서 너답게 사는 것 같아'라고 했을까. 그렇다. 난 학부 때도 가르치고, 글 쓰고, 사진 찍고, 영상을 만들어서 생계를 해결했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항상 말과 글로 뭔가를 하고 있었더라. 나는 무의식 중에 그런 일들을 하고 있었는데, 그게 재능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했고 감히 말과 글로 밥벌이를 할 엄두가 나지 않았었다.
나와 비슷하게, 사실은 본인 안에 재능이 있는데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더 있을 것이다. 반대로 사실은 재능이 없는 데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걸 분별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 시도를 해 보는 것 밖에 없다. 그 과정은 분명 힘들고, 고통스럽겠지만 결과와 무관하게 그 과정은 그 사람에게 중요한 경험과 자산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 사람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조금이라도 더 발견할 있다면, 그 사람은 조금은 덜 불행하게 밥벌이를 하게 될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한 관점에서 봤을 때 실패는 낭비가 아니라 투자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실패를 자신이 어떻게 해석해서 소화하는지가 그 실패보다 더 중요하다. 우리나라의 자본주의는 꽤나 많이 발달된 상태여서, 그런 시도를 해도 우리는 분명 먹고 살 방법을 찾을 수 있고 그렇게 인내하며 투자한 시간은 언젠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선물을 가져다줄 수도 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중요한 건 '투자'를 내가 가진 모든 힘과 노력을 끌어서 해보는 것이다. 그렇게까지 해보고도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그것을 포기하는 건 생각보다 어렵진 않더라. 그리고 그렇게 노력해 본 경험이 나를 또 다른 곳으로 이끌어주고, 그 과정에서의 경험이 나 다운 것을 발견하게 해 주더라. 경험해 봤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