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를 내내 실패하고 방황하며 살면서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 중에 한 가지는 돈이었다. 돌아보면 내가 돈이 없다는 '객관적인 상황'이 나를 힘들게 하는 측면도 있었지만, 상대적인 박탈감이 나를 더 힘들게 하지 않았나 싶다. 첫 직장이 연봉이 높고 복지가 좋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보니 회사 동기들은 30대에 모두 억대 연봉을 찍었고, 로스쿨 동기들도 대형로펌에 많이 가다 보니 애초에 시작이 억대 연봉이었으니 그런 박탈감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단순히 누군가가 또래 중에 상위 1%에 해당하는 돈을 번다는 사실만으로도 박탈감을 느낄 법도 한데 회사만 그만두지 않았다면, 변호사가 되었다면 내가 그 위치에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마치 내 것이었던 것을 빼앗긴 듯한 느낌도 가끔은 들었던 것 같다.
그들과 달리 내 상황은 계속 나빠져 갔다. 관리비를 포함해서 월세가 43만 원이었던 원룸에 살고 있었던 시점에 통장잔고가 67만 원까지 찍었으니 할 말은 다 한 게 아닐까? 부모님께 지원을 받을 수 없었냐고? 사람들은 계속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서도 취업을 알아보지 않고 대학원에 다니면서 시험을 준비하는 나를 보고 '집에 여유가 있는가 보다'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하지만 아버지는 평생 회사원이셨고, 내가 30대일 때는 이미 퇴사를 하시고 작은 기업에 다니시면서 부모님 생계만 챙길 수 있을 정도의 연봉을 받고 계셨다. 20대 후반에 이미 돈을 벌어봤기 때문인지 그런 상황에서 부모님께 손을 벌릴 수는 없었다.
힘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돈은 중요하지 않아'라고 말하지만, 그 사람들은 자신을 속이고 있거나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순진하고 순수한 사람들일 것이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어렸을 때는 나도 돈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회사에 다닐 때는 월급날을 잊어버리기도 할 정도로 나는 어렸을 때 돈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렇게 살아도 잔고는 계속 늘어나는 수준의 연봉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상황이 달라지더라. 지인들이 하나, 둘씩 결혼하면서 (물론 대부분 대출을 받지만) 차와 집을 사는 것을 보면서 생각이 조금씩 많아지다가 나이가 더 들면서 신체적 능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생각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택시비가 아까워서 걸어가던 거리를 이제는 그 택시비보다 내 체력을 아끼는 게 더 중요하게 되고, 예전에는 다른 걸 희생시키면서 내 힘과 노력을 들이는 던 것을 돈을 주고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서 내 시간과 에너지를 절약하는 게 더 효율적이게 되더라. 그러다 보니 돈이 점점 더 중요해져 갔다.
여기에 더해서 늘어나지 않는 잔고의 상황을 아시는 부모님의 잔소리도 나를 힘들게 했다. 부모님 친구들의 자녀, 즉 엄마 친구 딸(아들)들이 모두 어느 정도 사회에서 자리를 잡다 보니 부모님은 내 얼굴만 보면 '너는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를 남발(?)하시더라. 거기에서 멈추면 그나마 다행이다. 부모님께서 누구는 아들(딸)이 뭐를 해줬고, 뭐를 사줬다는 말씀을 하시며 내가 가고 싶은 길을 계속 가는 내게 '이기적이다'라고 하실 때면 가슴이 찢어질 듯하게 아프기도 하고, 내 자신을 혐오하게 되는 순간들도 있었다.
돈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돈은 그 자체로 인해 중요하다기보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있으면 할 수 있는 게 그만큼 많아지고, 나의 삶이 돈이 더 있는 만큼 더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명품이나 고가의 수입차를 사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만 돈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비싸지 않아도 사고 입고 싶은 옷을 사 입고, 귀가했을 때 평안함을 느낄 정도의 집에서 살 수 있으며, 내 입에 맛있는 음식을 자주는 아니어도 한 번씩 사먹을 수 있는 정도의 돈은 있는 게 우리의 삶을 분명 윤택하게 해준다.
그렇다고 해서 돈으로 모든 게 해결되는 것은 아니더라. 역설적이게도 내 주위에 또래들 중에는 많은 돈을 버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그게 더 선명하게 보였다. 억대 연봉을 이미 수년 째 벌고 있는 내 회사동기들과 로스쿨 동기들 중에는 또래들 중에 상당히 많은 연봉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이 있다. 그들이 모두 불행하단 것은 아니다. 그들 중에 행복하게, 만족하면서 사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비율로 따져보면 그들 중 상당수는 불행하지는 않아도 행복하지는 않은 삶을 살고 있음을 그들과 연락을 할 때마다 느낀다.
로스쿨 동기들이야 그렇다고 치자. 왜냐고? 대형로펌에 다니는 동기들은 주니어 때부터 퇴근 시간이 기본적으로 새벽인 경우가 많고, 이제는 파트너급이 된 그들은 영업에 대한 압박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들이 완전히 주니어일 때는 그들의 인스타에 "퇴근"이라는 사진이 오전 6시에 올라오기도 했고, "칼퇴"라는 사진은 저녁 12시 넘어서 올라오더라. 이름만 대면 모두가 아는 대형로펌에 다니던 한 지인은 유명한 외국계 회사로 옮기면서 내게 "나는 마트에 우유가 그렇게 여러 종류가 있는지 몰랐어"라고 했다. 항상 피로에 찌들어 있다보니 장을 보러가도 그냥 눈에 보이는 걸 들고 계산했었는데, 시간적으로 여유가 생기면서 장을 오랫동안 보면서 본인이 보지 못하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단 것이다.
변호사들은 원래 그렇다. 대부분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변호사 일은 사실 대부분 중노동이다. 적어도 수백, 아니 수천 장의 문서들을 보면서 직접 글을 수십장씩 쓰고, 의로인들에게 밉보이지 않기 위해 항상 친절하게 웃으면서 대하는 정신 및 감정노동자들인 변호사들을 나는 존중하는 것을 넘어서 때로는 존경하기도 한다. 대형로펌 변호사들은 수억을 호가하는 스포츠카를 사 놓고 탈 시간은 없어서 출퇴근 길에 '그래, 나는 이 차를 갖고 있지'라고 생각하며 스스로의 삶을 정당화 한다는 농담은 약간 과정된 면은 있을지 몰라도 변호사들의 삶이 어떤 지를 잘 보여준다. 변호사들은 정말 열심히 일을 해야 많은 돈을 번다.
내 회사 동기들은 조금 다르다. 내가 다녔던 회사는 워라벨이 좋기로 유명한 회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도 생각이 많더라. 왜냐고? 이제는 그들도 임원이 된 사람,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 팀장으로 끝날 사람, 팀장이 되기 힘든 사람으로 나눠졌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서 이제는 10년 넘게 한 회사에서 일을 했다보니 다른 업계로 이직하기도 힘든데, 그 회사는 사람이 굳이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돈을 벌어들이는 사업모델이 있다보니 그 안에서는 일을 위한 일이 계속 만들어진다. 그런 상황에서는 성과가 날 수가 없고, 그렇다보니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서 그 안에서 일하는 지에 대한 회의감을 갖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렇게 다람쥐 쳇바퀴 도는 삶을 살다 보면, 사람들은 어느 순간 결국 돌고 돌다보면 돈을 벌기 위해 돈을 벌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들의 삶의 경로는 이미 정해져 있고, 그 끝은 이미 보이기 시작한 경우가 많다. 그런 상황에서 이제 남은 건 조직 안에서 오래, 잘 버티면서 돈을 계속 버는 것일 뿐인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다. 그런 상황에 있는 동기들은 내게 어처구니가 없는 말을 하더라. '너가 부러워'라고. 이 무슨 말도 안되는 미친 소리인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를 놀리는 건가 싶어서 기분이 나빴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경험을 수차례 하면서 한 걸음 물러나 그들의 삶을 보니 이해가 안되진 않더라. 그들은 10년 넘게 한 회사에 다녔다 보니 이제 새로운 일을 개척할 인프라는 없고, 생물학적인 노화로 인해 새로운 일을 감당할 체력도 없는 경우가 많으며, 이제는 가진 것이 많다 보니 그 모든 걸 걸고 새로운 길을 갈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한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런데 그와 달리 나는 아직 터지지 않아서 그렇지 가능성이 있는 카드들을 손에 쥐고 있고, 여러가지 일을 하다보니 항상 새로움을 직면하면서 일을 하며, 무엇보다 내가 하는 일 자체를 좋아한단 사실이 그들에겐 부러움으로 작용하는 듯했다.
내가 일정 수준의 수입이 생길 때까지는 그들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니, 사실 이제는 내가 사고 싶은 것들을 소소한 것들을 사도 통장잔고가 줄어들지는 않는 정도의 수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 한 켠에는 '너희가 월급의 소중함을 몰라서 그래'라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당장 나는 올해 하반기와 내년에 수입구조와 규모가 어떻게 모르는 삶을 살고 있는데, 그게 어떻게 부럽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그들이 예전만큼 부럽지는 않다. 이는 내가 금전적인 여유를 잃은 대가로 얻은 게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원해서, 자발적으로 한 선택도 아니고 실패로 인해 등 떠밀려 가게 된 길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길 위에서 당장의 돈이나 안정 보다도 내 마음을 따라 했던 선택들이 내 삶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줬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2-3년 전부터는 힘들지만 행복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다. 당장 돈을 안정적으로 벌 수 있는 기회가 있었냐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아직 어리기도 했고, 돈과 안정을 쫓으면 처음에 다녔던 직장을 그만둔 것을 평생 후회할 것 같아서 나는 마음을 따라 가는 선택을 했고, 그 선택을 지금은 후회하지 않는다.
돈은 필요없다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돈은 분명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 그 이유도 분명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돈으로 자유를 살 수 있기 때문에 돈은 중요하다.
하지만 돈이 가져다 주는 행복과 안정감은 분명 한계가 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그 한계치가 다르다. 미니멀리스트는 아주 적은 돈을 갖고도 행복하게 살 수 있겠지만, 비싼 물건이나 음식 등을 특별히 좋아하지 않는 나도 그들보단 더 많은 돈이 있어야 안정감을 누릴 수 있을 듯하고 행복하기 위해서는 나보다 더 많은 물질적인 풍요로움이 필요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것만 가지면 정말 행복할 것 같다'고 생각하고 돈을 벌어 그 성취를 이룬 뒤에 그 행복이 며칠 가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않는단 것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