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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on de Cyrene Apr 03. 2024

'널 위해 하는 말'이란 거짓말

변호사시험에 계속 불합격하는 과정에서 오롯이 시험준비만 한 건 딱 한 번, 두 번째 시험을 준비할 때뿐이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시험을 다시 치는 동기들과 나는 다른 방식으로 준비했다. 그 동기들은 학원을 다니면서 시험을 보기 위한 준비를 했는데, 나는 홀로 고립되어 당시에 작은 시골 마을에 사셨던 부모님 집에서 시험을 준비했다. 


왜 그랬냐고? 경제적인 이유가 가장 컸다. 집에 빚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 집이 엄청 여유가 있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대기업에 다니셨었지만 정년퇴직을 하시고 작은 중소기업에 다니고 계셨고, 우리 집은 서울에 집은 있지만 그 이상의 여윳돈은 없는 전형적인 회사원 집안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30대 초반에 부모님께 학원을 다니기 위해서 필요한 자취비용과 학원비를 지원해 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로스쿨 3학년 때 변호사시험은 당연히 합격할 줄 알고 다른 고민을 하며 방황을 했기에 시험을 위한 공부에만 집중을 하면 당연히 합격할 줄 알았다.


그 뒤에는 더더욱 부모님께 손을 벌릴 수가 없었다. 로스쿨에 다니면서 학비와 생활비도 회사 다니면서 모은 돈으로 해결했는데, 차마 시험에 떨어지고 나서 나이가 더 들어서 손을 벌리지는 못하겠더라. 그래서 나는 항상 8-9월까지는 시험공부는 2순위로 넣고 공부를 병행할 수 있는 일들을 했다. 박사과정에 다니면서 조교를 해서 학비면제와 장학금을 일부 받는 건 기본이고, 대학원을 다니면서는 자취를 해야 했다 보니 다른 일도 병행을 해야 생계를 해결할 수 있었기에 항상 다른 일도 하고 있었다. 


그럴 때면 지인들 중 일부가 항상 내게 말했다. 공부에, 시험에 집중하라고. 그러면서 이런저런 조언들을 내게 하는 사람들이 항상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 지금은 나와 인연이 끊어졌다. 이상할 정도로 그렇게 본인 나름대로 '나를 위해서' 조언을 했던 사람들은 내가 시험에 떨어지는 과정에서 하나, 둘씩 멀어져 가더라. 그들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렇게 쉽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던 사람들은 멀어져 가는 반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 번씩 연락을 먼저 주던 사람들은 계속 옆에 남아있더라. 왜 그럴까?


그렇게 시험에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알았다. 누군가의 말이 위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내가 브런치에서 "위로되지 않는 위로의 말들"이란 시리즈를 쓴 것도 그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 나름대로 상대를 위한답시고 어떤 말이든지 하는데, 굉장히 많은 사람들은 관성적으로 쓰이는 표현들로 위로나 조언을 하려고 하는데, 그게 절대로 위로가 되지 않더라. 내가 너무 힘들어서 지쳐 있을 때, 나의 몸과 마음을 스스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망가져 있을 때는 '힘내라'는 말에도 화가 났다. 이미 힘을 내고 있는데, 나는 더 이상 낼 힘이 없는데 힘을 내라니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기 때문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렇게 조언을 하거나 어설픈 위로를 해줬던 사람들 중 상당수는 사실 내게 큰 관심이 없었다. 조언을, 그것도 나를 위해서 말하는 것이라고 했던 말은 대부분의 경우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더라. 그 안에는 '쟤는 왜 저렇게 살지?'라는 생각이 무의식에라도 전제되어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그들은 나에 대한 그런 판단과 평가가 있었기 때문에 내 상황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쉽게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나마 조언이 아니라 위로의 말들을 하려고 했던 사람들은 그 정도의 마음은 없었지만, 그들 역시 내 상황을 온전히 알고 위로를 하는 경우는 없었다. 괜찮아질 거라고, 힘을 내라고 말은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낼 힘도 없고, 괜찮아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어찌할 바는 모르겠는데 뭔가 희망은 주고 싶다는 나름의 긍정적이고 나를 위해 주는 마음을 갖고 내게 다가왔었다. 


내가 가장 큰 위로를 받았던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나는 교회 찬양팀을 5년 동안 했는데, 내가 4번째 시험에 떨어졌을 때 나의 불합격 과정을 모두 봤던 찬양팀 형, 누나들은 시험 발표가 나 고난 뒤 첫 주말에 누구도 내게 위로의 말을 하지 못했다. 그들은 나의 등을 토닥이고 지나가거나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리고 나를 안아주듯이 자신에게 끌어당기더라. 그들이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내 마음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었다. 내게 어떤 말을 해도 위로가 되지도 않을 것을 알기에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스쳐 지나가듯 나를 바라보거나 토닥여줬는데 그때 받았던 위로를 나는 지금까지도 기억한다.


누군가에게 '네가 얼마나 힘든지 나도 잘 알아'라는 말은 거짓말이다. 자신이 과거에 유사한 경험을 했다고 해서 지금 그 경험을 한 사람의 아픔과 고통을 '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올해 변호사시험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을 내가 정확히 알까? 아니다. 나는 변호사시험을 아주 오래전에 떨어졌고, 그 기억은 이제 희석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그 상황을 지나는 사람의 마음과 감정을 나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리고 개인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고, 성향이 다르기 때문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과 슬픔을 100% 이해하거나 알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부터 누군가에게 위로를 해주고 싶을 때 굳이 무슨 말이라도 해주고 싶다면, '내가 너의 마음이나 고통을 완전히 이해하거나 알 수는 없어'를 깔아놓고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란 말도 쉽게 하지 못한다. 그런 희망을 갖고 지금은 잠시 괜찮아졌다가 만약 모든 것이 잘 되지 않았지만 그 고통이 몇 배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그런 말을 하지 못한다.


그런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유일하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버티라는 것이다. 버티다 보면, 일단 버티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있는 힘, 없는 힘을 다 끌어다 쓰면서 하다 보면 내 인생이 어딘가에는 가 있고, 때로는 내가 원했던 길이 내게는 최선이 아니었단 걸 알게 되더라'는 말 밖에 나는 해줄 수 없다. 그래서인지 나는 언젠가부터 '버텨봐'란 말을 입에 거의 달고 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 관심 있는 척, 위해주는 척하는 사람들은 항상 있지만 그들은 당신을 마주하지 않고 있을 때 당신 생각을 1시간 하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 연인이나 가족 정도가 당신과 연락을 하거나 만나고 있지 않을 때도 당신을 떠올리고, 걱정하고, 생각해 주겠지만 그런 관계가 아닌 사람들은 보통 다른 사람 생각이나 걱정을 잘하지 않는다.


그들이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그들의 삶도 바쁘고 힘들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도 힘들고, 걱정이 있고, 평탄치 않은 상황에서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거나 상대의 상황이 내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이상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생각할 수가 없다. 그리고 우리 인생은 100%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이뤄질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누구나 본인 나름의 걱정과 고민과 고통을 안고 산다. 100억을 가지면 그런 걱정이 없을까? 아니다. 그런 사람들은 워낙 많은 것을 가졌다 보니 다른 사람이 보기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오히려 엄청나게 큰 고통과 고민의 원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을 너무 의식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처한 상황과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의 말은 그나마 들어보고 마음과 머리에 남겨둘 것인지를 고민은 할 만 하지만, 완전히 동일하고 동질적인 경험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과 머리에 평생 남겨둘 만한 조언은 보통 존재하지 않는다. 성장배경, 성격, 가치관, 나이, 성별 등 인간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이 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상황과 마음을 완벽하게 이해하겠나? 그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여기에 더해서 누군가가 상대를 위한 말이라고 말하면서 하는 말은 사실 그 안에 '네가 지금 잘못하고 있어'라는 평가와 판단이 깔려있지 않은가? 그런 말은 절대로 당신을 위해 하는 말일 수 없다. 물론, 당신이 잘못하고 있는 게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설사 그렇다고 해도 당신을 정말 위하는 사람들은 당신에 대한 판단과 평가를 깔고 말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위하는 사람은 상대의 상황과 마음을 살피고, 해주고 싶은 말을 기다리다 상대가 준비가 되었다 싶을 때 타이밍을 보고 매우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조언보다 마음이 우선이기 때문에. 


때로는 수천 마디 말보다 작은 행동과 눈빛 하나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위로해 주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준다. 이는 그 안에 그 사람의 진심이 담겨 있고, 그 진심은 '내가 이 세상에 혼자가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선물해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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