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이 결혼을 했다. 사실 별 느낌이 없었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걱정이 되는 면들은 있었지만 '얘가 나보다 일찍 결혼을 하다니 부들부들' 같은 느낌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동생 결혼식에서 '동생이 먼저 결혼하는데 형이 밝아 보여서 너무 좋아 보였다. 아들 잘 키웠더라.'는 피드백들을 부모님께서 받으신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동생이 먼저 갈 수도 있는 거지, 그럼 동생은 나 때문에 가정을 꾸리지도 않아야 한단 말인가? 쿨한 게 아니라 그냥 그게 당연한 생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오히려 조금 묘한 느낌은, 지난 주말에 아버지 생신을 조금 늦게 축하하기 위해 가족들이 모였을 때 나더라. 나 혼자 혼자인 느낌이었다. 동생이 제수씨와 본인을 묶어서 '우리'라는 표현을 썼을 때도 그렇고, 다섯 명이 앉아있는데 나 혼자 홀로 있는 듯한 그 느낌이 나를 많이 외롭게 하더라. 동생이 결혼하기 전까지는 부모님과 자녀들이 모인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뭔가 나만 혼자인 상태로 부부모임에 온 느낌이 났다. 그전에 이미 한 2-3주 정도 슬럼프를 겪으면서 중요한 하반기를 앞두고 오랜만에 '하나님, 저는 이 과정을 혼자 버텨낼 만큼 강하지는 못합니다'라는 기도를 하고 있었던 시점이라 그게 더 그렇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배우자의 기도, 난 우상이라고 생각한다. 배우자를 위해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아니다. 배우자를 위한 기도도 다른 것을 위한 기도와 같은 원리로, 기도의 연장선에서 이뤄져야 하는 것이지 그 자체로 다른 공식이나 교리가 있는 건 아니란 것이다. 배우자의 기도가 특별한 지위를 가져서는 안 되는데, 우리나라의 교회 문화에서 배우자를 위한 기도는 그 고유의 지위를 갖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가장 성경적인 배우자의 기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그럴 수밖에, 워낙 오랫동안 싱글이었으니까. 어떤 사람과 가정을 꾸려야 할 지에 대한 고민도 당연히 많았다. 이상형, 외모, 성격 등등 사람들이 말하는 다양한 공식이 있고 그 공식들이 다 이유가 있고 말이 안 되진 않지만 난 개인적으로 기독교인의 배우자의 기도는 '상대와 가정을 꾸렸을 때 내가 하나님을 더 바라볼 수 있고,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게 하는 사람, 세상 한가운데서 살아갈 때도 두 사람이 서로 의지하며 신앙과 믿음을 지킬 수 있게 해주는 사람'을 알아볼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기독교인에게 가정이라는 공동체가 갖는 의미여야 하니까.
오해하지 말자. 그게 반드시 형식적으로 교회 다니는 사람과 만나야만 한단 것은 아니다. 물론, 교회를 다니는 사람을 만나서 가정을 꾸리면 당장 예배를 드리고 일상에서 몇몇 지점에서는 조금 더 '편한' 지점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두 사람의 신앙적 색이나 성향까지 같은 것은 아니지 않나? 그 지점에서 두 사람이 다르면 그 결혼생활은 오히려 더 힘들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상대를 사랑하고, 품어주는 것이 그 사람이 더 하나님을 찾고, 예수님을 닮아가게 되는 방법일 수도 있다. 그런 사람은 교회 다니는 사람과 결혼해서 긴장감 없이 늘어지고 풀어져서 하나님을 찾지 않게 되는 것보다는 가정이 선교지가 되는 게 더 큰 축복이고 은혜일 수도 있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자를 창녀와 결혼하도록 하신 경우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이혼과 관련된 생각도 당연히 엄청 많았는데, 이혼에 대해서도 다른 영역과 마찬가지 원리가 적용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일단 결혼에 대해 생각해 보자. 20대나 30대 초중반에 상대적으로 어렵지 않게 가정을 꾸린 사람들은 이 말에 의아해 할 수도 있는데, 노총각인 내 입장에서 누군가와 결혼을 하겠다고 다짐하는 건 기적이다. 상대의 장단점과 한계를 알고 계산을 하면 결혼은 절대로 할 수가 없다. 예측가능성이 결여되어 있고, 결혼한 뒤에는 뭘 상상하든지 상대의 다른 모습을 볼 것이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시야를 일부 가려주셨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에게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은 일들은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신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그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은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거기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게 절대로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은 아니기 때문에 그걸 허락하셨을 것이다. 결혼도 마찬가지. 누군가와 결혼을 했다면 하나님은 두 사람이 그 안에서 만들어갈 수 있는 게 있다고 여기시기에 결혼을 허락하셨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안에서 두 사람은, 아니 최소한 기독교인은 그 이유를 찾아 건강한 가정을 꾸리기 위한 노력을 최선을 다해서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안에 갈등과 어려움이 있을 때 그냥 덜컥 이혼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고 묻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깨달아 알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에 대해 인간이 마음대로 판단해서 결정해선 안된단 것이다.
그 뒤에 이혼을 하거나 하지 않는 건 사실 그렇게까지 중요하진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성경에서도 이혼을 허락하는 예외사유들이 있지 않았나. 이혼을 하는지 여부보다 더 중요한 건 '내가 가정을 지켜내고, 두 사람이 만나서 공동체를 꾸리도록 허락하신 이유와 계획을 내가 살아내기 위한 노력을 하나님 앞에서 다 했는가?'이다.
왜 그렇게까지 고민하고 기도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우리가 스스로를 기독교인으로 여긴다면 이는 우리가 신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그렇기 때문에 내게 더 필요하고 좋은 것을 주실 것이란 것을 믿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내게 더 필요하고 더 좋은 것은 반드시 일반적이거나 평균적인 기준으로 좋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남에겐 최선이 아니더라도 내겐 최선이면 그건 내게 좋은 것이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신이, 하나님이 내게 무엇인가가 일어나도록 허락했다면, 그건 일반적으로 세상의 기준을 쫓는 인간의 기준에서는 최선이 아닌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나도 모르는 내 진짜 모습에겐 그게 최선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혼의 문제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결혼을 하는 과정을 허락하셨다면 그 이유를 알기 위해 그분을 찾고, 묻고 기도해야 하고 말씀을 읽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율법에는 이유가 있다. 하지만 율법의 내용만 강조하는 사람은 율법주의자가 될 것이다. 율법의 이유를 알고, 그 원리에 따라 최선을 다하는 게 기독교인의 가장 중요한 태도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