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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육이 제공해야 하는 것

by Simon de Cyrene

AI시대에 대학 교육이 필요하지 않다거나 특정 직역이 AI에 의해 지배될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전제하는 것이 있다. 그러한 주장들은 대학에서의 교육이 일정한 수준의 정보와 지식을 일정한 수준으로 축적하고 연결하는 것이라고 전제하고 있다.


20세기까지는 교육의 주된 목표가 그렇게 설정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반 사람들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의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게 되고, 오프라인에 존재하는 수많은 존재들이 데이터베이스화되기 전까지 교육은 실제로 정보와 지식의 전달과 축적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리고 그 시대의 교육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20세기에 학문을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논문을 썼을까? 실험을 하는 전공이 아니라 '이론학문'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인문사회과학' 전공자들은 일단 도서관에 가야만 했다. 그 안에 가서 논문들을 실제로 읽어보고, 뒤지면서 지식과 정보를 축적하는데만 수개월을 보내야 했을 것이다. 그렇다 보니 수업시간에 교사나 교수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정보를 잘 정리해서 학생들에게 전달하고, 학생들이 그것을 암기하는 것만으로도 '교육'은 의미가 있었다.


지금은 어떠한가? 오늘날 인문사회과학 전공자들 중에 도서관에 가서 책을 뒤적이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올해 안식년을 보내는 한 지인은 집에서 아이를 보는데 대부분 시간을 보낸다. 왜냐고? 이제는 대부분의 정보들이 온라인에 데이터베이스로 존재하기 때문에 집에서 인터넷에만 접속할 수 있으면 논문을 검색하고, 읽으면서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컴퓨터의 성능이 발전하면서 이제는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도 자료를 데이터화시키고, 양적인 분석을 하는 연구방법론도 발전하기 시작했다.


정보와 지식을 더 많이 알고 축적하는 것은 이제 교육의 영역에서 다루지 않아도 된다. 구글에서 찾으면, 아니 이젠 구글이 아니라 Chatgpt, perplexity, Liner와 같은 AI서비스를 사용하면 지식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주는데 정보와 지식의 양이 물리적으로 많이 축적하는 게 어떻게 교육적인 차원에서 의미가 있을 수가 있는가? 교수가 수업시간에 무엇인가를 잘못 설명하면 학생들은 그 앞에서 검색이 아니라 AI에게 물어보면 곧바로 알 수 있는 세상에 정보와 지식의 양을 축적하는 건 절대로 교육의 목표가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된다.


그렇다면 정보와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 의미가 없는가? 아니다. 우리는 특정 분야를 잘 이해하고, 그 지점에서 한 걸음 더 나가기 위해서는 그 분야의 큰 그림을 알아야 하고, 전공에 따라서는 오늘날 일정한 영역에 생성된 과정에 대해서도 알고 있어야 한다. 그 정보와 지식이 우리 머리 안에 체계적으로 자리 잡고 있어야 우리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가는 창의적인 생산물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영역의 기본과 기초를 형성하는 정보와 지식을 축적하는 건 분명히 필요하고, 그러한 작업은 고등교육과정과 학부 수준에서 이뤄질 필요가 있다.


그러한 기초를 잘 다져야 하는 건, 그런 기초가 있어야 우리가 AI를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법학을 전공했고, 연구하고 있는 내가 AI에게 하는 질문과 내 수업을 듣고 있는 학생들이 하는 질문의 차원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나는 법학의 영역에 대해 내 수업을 듣는 학생들보다 잘 이해하고 있고, 지식도 더 많기 때문에 다양한 영역에 대한 질문을 다각도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도 문제가 존재하는 영역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완전히 다른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 우리가 여전히 정보와 지식을 축적해서 기초를 단단히 해야 하는 건 이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기초는 단순히 정보와 지식을 무한정 축적한다고 해서 단단하게 다져지지 않는다. 그 기초가 단단하게 자리 잡고, 유용한 도구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그 정보와 지식이 우리 머릿속에 체계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고 그 정보와 지식이 상호 간에 어떻게 이어지고 관계가 맺어지는지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여러 정보와 지식을 다양한 각도로 돌려보고 맞춰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시스템을 '사고체계'라고 부른다.


과거의 교육은 이러한 사고체계에 대한 훈련을 하기 위한 충분한 지식과 정보를 축적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인터넷으로 지식과 정보를 찾을 수 있기에 최소한 대학에서의 교육은 그것을 뛰어넘는 무엇인가를 학생들에게 제공해야 한다.


그 제공되는 무엇인가는 결국 질문의 형태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는 질문을 해야 학생들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내기 위해서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돌려보면서 다양한 각도로 문제를 바라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고등교육, 최소한 대학에서의 교육은 학생들에게 그러한 과정을 제공해야 한다. 수업에서 주어지는 과제와 시험은 단순히 지식과 정보를 축적하는 과정이 아니라 그렇게 고민하면서 다양한 각도로 사고의 실험을 할 수 있도록 디자인되어야 한다.


그런 디자인은, 각 영역의 전문가들만 할 수 있다. 학생들보다 더 많은 지식과 정보를 숙지하고, 자신도 그러한 사고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이 받은 트레이닝과 연구의 경험을 바탕으로 학생들이 사고체계를 개발할 수 있는 교과과정을 디자인하는 게 대학교수의 역할이고, 그런 교과과정과 교육은 일정 수준 이상의 훈련을 받은 사람들만 제공할 수 있다.


'박사'가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박사학위를 갖고 있고, 법학을 공부하고 연구하면서 가르치고 있지만 박사들은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다. '척척박사'와 같은 뻔한 거짓말은 세상에 얼마 없을 것이다. 이는 박사들은 절대로 절대적인 지식의 양이 많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박사학위 소지자들은 자식의 폭이 넓지 않고, 넓을 수도 없다. 이는 박사학위가 부여되었다는 것은 한 분야를 깊게 파서, 자신의 영역에서 자신만의 주관을 그 학문의 체계 안에서 한 번 잘 정리했다는 의미만 갖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박사들은 한 분야에 대해 이해가 깊긴 하지만, 다른 영역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사회학자의 연구를 시작점으로 삼은 대 박사학위 논문에 대해 심사를 하셨던 한 시니어 교수님께서 '000가 정말 이렇게 주장했나?'라고 물어보신 것은 이 사실을 잘 보여준다.


박사학위 소지자들은 자신의 전공영역에서 요구하는 사고체계를 훈련받고, 그것을 학위논문으로 증명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박사들은 그러한 기초를 가지고 자신의 영역에서 연구를 해 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박사들은 엄연히 말하면 자신의 전공영역에서 필요한 사고체계의 전문가이지, 지식과 정보의 양이 압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아니다. 교수들도 수업을 하기 전에 강의안을 보면서 가볍게라도 공부를 해야지 일주일에 3시간을 강의할 수 있다. 그건 수업에서 다루는 모든 내용이 항상 머리 안에 들어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교수들이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건 '사고하는 훈련'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수업, 시험, 과제들은 그러한 사고하는 훈련을 하는 데 사용되는 도구이다. 그리고 대학에서는 학생들이 다양한 영역을 전공한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교육과정을 들으면서 여러 종류의 사고체계를 유기적으로 엮는 훈련을 하면서 다양한 현상과 문제, 쟁점을 자신만의 관점으로 바라보게 될 수 있다.


이러한 훈련은 대학 외에 어느 기관에서도 제공할 수 없다. 기업에서도 교육을 제공하지만, 대부분 기업들은 철저히 궁극적으로 이윤을 창출하는데 필요한 기술을 익히는데 필요한 교육만을 제공하기에 기업에서 제공하는 교육은 사고체계를 넓히고 깊이 있게 만드는데 한계가 있다. 무엇보다 대학처럼 학생들이 자신이 원하는 영역의 수업을 선택해서 수강할 수 있는 인프라는 영리를 추구하는 기관에서는 구축할 수 없는데, 이는 자본주의적인 관점에서 그러한 인프라를 구축하는 건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업이 성장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관점과 사고체계를 가진 사람들이 필요하다. 이는 절대로 해결될 수 없어 보이는 문제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면 쉽게 해결되는 경우가 있고, 때로는 완벽해 보이는 solution이 다른 영역에서 문제를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기업이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를 혁신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기술을 기반으로 한 상품을 엔지니어와 프로덕트 매니저들이 만들 수는 있지만, 그들은 그로 인해 발생하는 다른 영역의 문제점들을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데 상품을 시장에 내놓기 전에 그 문제점들을 해결하지 못할 경우, 그 상품이 출시된 이후에 시장에서 비판을 받거나 팔리지 않게 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성공적인 상품이 시장에 출시되기 전까지 다양한 각도에서 분석이 이뤄져야만 한다.


그러한 필요성을 느끼는 기업들은 당연히 존재한다. 그래서 그런 기업들은 전공을 불문하고 직원들이 대학원에 진학하면 학비를 지원하고, 업무에서도 배려를 하기도 한다. 그건 그 기업의 경영자들이 물리적인 정보와 지식뿐 아니라 공부를 통해 사고체계가 개발되는 게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고, 그들이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은 대학을 그러한 훈련을 받을 수 있는 검증된 기관으로 전제하기 때문이다.


교육은 단순히 정보와 지식을 축적하는 과정이 아니라 사고체계를 훈련시키고, 다듬고, 정교화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AI까지 가기도 전에, 온갖 정보와 지식에 대한 데이터베이스가 온라인에서 접근 가능해진 시대에 최소한 대학에서의 교육만큼은 그렇게 전환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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