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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어디까지 의미 있을까?

by Simon de Cyrene

우리나라에서 언젠가부터 채용과정에서 출신학교를 가린다는 면에서 '블라인드 채용'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대기업들은 최소한 면접에서는 면접관들이 지원자들의 학력을 보지 못하도록 처리하고 있다.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서류에 있는 내용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편견을 갖게 될 수 있다는 면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면접을 진행하는 건 의미가 없진 않다. 브런치는 물론이고 브런치북 프로젝트를 통해서 출판한 책에도 나의 학력을 게재하지 않은 것 역시 사람들이 내가 졸업한 학교나 다녔던 회사를 바탕으로 내용에 대한 선입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출신학교가 마케팅 포인트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끝까지 고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출판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출신학교는 공개하지 않기로 했고, 그걸 받아준 출판사에는 지금까지 감사한 마음이 있다.


그렇다면 블라인드 채용을 하는 기업은 학력을 아예 보지 않을까? 그럴 리가 없다. 면접관들에게는 학력이 가려져 있을지 몰라도 인사를 총괄하는 HR에서는 학력을 1차적인 필터로 사용할 것이다. 그건 비단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미국과 유럽의 경우 블라인드 채용을 진행하는 기업들도 있지만 우리나라만큼 그 요구가 크거나 경쟁적으로 도입되고 있진 않다.


기업들이 학력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각 학교 별로 학생들의 여러 가지 능력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보따리장수(대학 강사)로 여러 학교에서 가르치면서 이 사실을 직접 경험했다. 나는 다양한 지역에 위치한 국립대에서 강의를 주로 했고, 한국에서 누구나 좋은 대학으로 인정할 학교에서도 수업을 맡은 적이 있었는데 수강생들 간에 차이는 분명히 존재했다. 모든 학교에는 일정 수준 이상으로 답안지를 잘 써내는 학생들이 있었지만, 상위권 학교일수록 그러한 학생들의 숫자가 많았고, 평균적인 답안 작성 수준에도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배치표에서 더 낮은 곳에 있는 학교를 졸업한 학생이라고 해서 능력이 부족한 한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입시제도에 잘 적응하는 학생이 있고, 그 입시제도가 맞지 않는 학생들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모든 것을 평균적인 수준으로는 해 내기를 요구하기 때문에 한 영역에 특별한 재능을 가진 학생들은 배치표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곳으로 위치한 학교로 가게 되기도 한다. 내 수업에서 작성한 답안이 다소 아쉬웠던 학생들이라고 해서 그 학생들의 전반적인 능력치가 떨어진다고도 할 수 없다. 내가 맡은 과목이 그들에게 맞지 않을 뿐이고, 그들이 다른 영역에서는 엄청난 능력치를 갖고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미국이나 유럽의 입시제도와 평가기준이 더 잘 맞아서 오히려 한국을 떠났을 때 랭킹이 더 높은 대학에 합격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업에서 채용을 할 때 학력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것은 모든 것은 결국 '평균'과 '확률'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업은 채용을 할 때도 효율을 고려해야 한다. 배치표에서 높은 곳에 위치한 대학 졸업생들이 모두 똑똑하거나 일을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확률적으로는 해당 대학 졸업자들 중에 그런 사람이 많을 가능성이 높다.


기업의 채용과 공정성에 대한 논란에서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또 다른 사실이 있다. 그건 기업들은 엄청난 능력을 가진 천재를 채용하는 게 목표가 아니라는 것이다. 기업은 회사에 오래 남아서, 일머리가 있으면서 말을 잘 들을 사람을 선호한다. 우리 아버지의 경우 대기업으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상대적으로 연봉이 높진 않은 회사에 다니셨는데 아버지께서는 면접에 들어가면 일정 수준 이상 대학을 졸업했거나 학점이 너무 높은 지원자들을 선택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채용을 해보니, 그들은 다른 기업에 합격해서 오지를 않거나 취업을 했다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이직을 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시더라.


이는 내가 잠시 일했던 지인의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지인이 대형종합광고대행사에서 나와 자신의 회사를 차렸고, 나는 그 회사 정직원이 10명이 되지 않을 때 파트타임으로 그 회사에서 일했다. 지금은 60-70명 규모로 회사가 성장했는데, 그 지인은 수년간의 경험과 통계를 통해 자신의 회사에 오랫동안 일하면서 일정 수준 이상의 능력치를 발휘하는 학력을 가진 사람에 대한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


채용은 이처럼 결국은 효율과 확률의 싸움이 되다 보니 채용을 하는 입장에서는 학력을 고려하지 않기가 힘들다. 이는 전 세계 어디나 마찬가지다. 구글, 페이스북(인스타그램)과 같은 거대기업의 본사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 과반수 이상은 모두 한국 사람들도 이름은 한 번쯤 들어봤을 미국의 명문대 출신이다.


그렇다면 학력이 어떤 능력치를 보여주길래 기업들은 이처럼 학력을 반드시 참고하는 것일까?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출신대학이 곧 그 사람의 객관적인 능력치를 보여주는 건 아니다. 이는 '능력'이라는 것 자체가 모호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업들이 학력을 참고하는 것은 학력은 그 사람이 '하기 싫은 것을 참고하는 능력치'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전 세계 어디에도 대학입시를 위한 공부를 즐기거나 좋아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말 머리가 좋은 사람들의 경우 자신을 일정한 틀 안에 가둬버리는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과정을 고통스러워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입시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성취를 낸 사람들은 자신이 하기 싫고, 힘든 것도 참아내는 능력과 일정 수준 이상의 기본적인 능력치는 확인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회사에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만 하는 건 불가능하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정말 보람, 의미와 가치를 느끼는 일을 하는 사람도 하루의 대부분 시간을 싫어하거나 귀찮은 일을 해야만 한다. 기업들이 채용과정에서 학력을 반드시 참고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처럼 채용과정에서 학력은 참고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나라에서 이뤄지는 채용문화가 바람직하거나 어쩔 수 없다는 것도, 우리나라와 미국, 유럽의 채용문화가 완전히 똑같다는 것도 아니다. 신입을 채용할 때는 우리나라와 미국, 유럽의 기준이 크게 다르지는 않을 수 있다. 문제는 경력직을 채용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차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학력이 평생 꼬리표처럼 붙어 다닌다. 이와 달리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일종의 배치표에서 높은 곳에 있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어도 그 뒤에 노력을 통해 다양한 경험을 축적한 사람들은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지기도 한다. 그러한 경향성은 한국, 미국과 유럽의 이력서 양식만 봐도 알 수 있다. 미국과 유럽의 경우 resume를 작성할 때 출신학교를 작성하긴 하지만, 경력직 resume의 대부분은 자신이 속한 조직과 그 조직에서 어떤 일을 어떻게 했는 지를 작성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이와 달리 한국의 전형적인 이력서들은 학력과 생년월일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고, 그 이후의 경력도 일했던 조직과 기간만 나열하는 방식으로 작성하게 되어있는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은 형식의 차이는 채용하는 과정에서 많은 차이를 야기한다. 미국과 유럽의 경력직 resume들은 자연스럽게 어떤 일을, 어디에서, 어떻게 했고, 그 과정에서 지원자가 어떤 기능과 역할을 했는지에 가장 먼저, 많이 눈이 가게 되어있다. 이와 달리 한국의 전형적인 이력서에는 그런 내용이 들어가 있지 않다 보니 단순히 출신학교와 일했던 기업이나 조직만 보게 되고 그 비중이 1/n을 차지하게 된다. 그러면 애초에 좋은 학력으로, 좋은 직장에 갔던 사람들이 이직과정에서도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학력과 미국과 유럽에서 보는 학력의 가장 큰 차이는, 우리나라에서는 학력이라는 꼬리표가 한 번 붙으면 평생을 따라다니는 것과 달리 미국과 유럽에서는 대학입시에서 실수나 실패를 했더라도 그 이후의 노력을 통해 역전할 기회가 있다는 데 있다. 많은 사회생활을 해보지 않은 신입을 채용할 때는 학력을 중요하게 고려하더라도, 수년 간 업무를 통해 능력치를 쌓았다면 경력직 채용과정에서는 당연히 실제로 일을 했던 경험이 당연히 우선적인 고려사항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경력직도 학력을 더 많이 보는 경향이 있는 게 현실이다.


학력이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는 건 거짓말이다. 학생으로서 학부와 대학원을 다른 두 학교에 다녀보고, 여러 학교에서 강사로 가르쳐 본 경험에 의하면 배치표에서 더 위에 있는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 전반적인 영역에서 평균적으로 성과를 내는 능력치는 더 뛰어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배치표에서 더 낮은 곳에 있는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 반드시 모든 영역에서 능력치가 부족하다고 할 수도 없고, 무엇보다 10대에는 나태했던 사람이 성인이 되어서 정신을 차리고 열심히 일해서 일을 통해 자신의 능력치를 끌어올렸을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경력을 가진 사람을 채용하는 과정에서는 그 경력을 쌓고, 그 과정에서 축적된 능력치가 단순히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쌓은 능력치보다 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채용하는 과정에서 학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낮아져야만 한다. 개인적인 경험과 주위 사례들에 비춰봤을 때 과거에 비해서는 우리나라도 학력보다 대학 졸업 후의 경험과 경력을 더 반영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긴 하지만, 우리 사회가 가야 할 길이 아직도 먼 것 또한 부인하기 힘든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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