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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가야 할 이유

by Simon de Cyrene

바야흐로 AI시대가 도래하며 대학에는 더 이상 갈 필요가 없단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젠 AI에게 물어보면서 학습하면 되기에 굳이 대학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단 것이 그 주요 논지였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런 말이 나온 건 처음이 아니다. 미국의 주요 대학들이 내부 강의를 공개하면서 '이제 굳이 대학에 갈 필요가 없는 것 아니야?'라는 말들이 몇 년 전에도 나왔었다.


이런 말들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대학의 가장 큰 목표가 만약 '지식의 습득'이라면 대학은 더 이상 과거만큼의 기능과 역할을 할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다. 2000년대만 하더라도 대학교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는 게 주요한 정보 검색과 지식의 습득 경로였지만, 이젠 대학교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물리적으로 실험을 하지 않는 연구자들은 집에 앉아서도 충분히 필요한 모든 연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시대에 대학교 수업에서 물리적으로 지식의 총량을 늘리는 것은 매우 비효율적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잘못된 것을 전제하고 있다. 대학교에서의 교육은 애초에 물리적인 지식의 총량을 교수가 늘려주는 것이 주된 목적이 아니다. 한 과목당 일주일에 세 시간, 시험기간을 빼면 한 학기에 39시간의 수업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지식을 습득할 수 있을까? 39시간 동안 다뤄질 수 있는 지식의 총량은 한계가 분명하다.


대학의 수업은 지식의 전달적인 측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사고의 체계와 방향성, 세상을 보는 시선을 키워줄 수 있어야 한다. 대학에서 지식의 습득은 원래 그러한 체계와 방향성 안에서 본인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하도록 되어 있었다.


대학교들은 왜 교수에게 박사학위나 그에 상응하는 경험과 이력을 요구할까? 많은 사람들은 박사학위를 받은 은 사람들은 엄청난 지식을 갖고 있기를 바라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박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박사학위는 '이 사람이 학문적으로 한 번 정도는 기본에서 시작해서 자신만의 생각을 표현하는 정도로 연구를 진행해 봤다'는 것을 인정해 줄 뿐이다. 이는 박사학위 소지자들은 지식이 많은 사람들이 아니라 사고체계를 학문적으로 할 수 있도록 훈련된 사람들임을 의미한다.


박사학위 소지자들은 자신의 전공에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고, 깊은 지식을 갖고 있지만 다른 영역에 대해서는 오히려 일반인보다도 모르는 경우가 있다. 이는 박사과정에서는 필연적으로 자신이 연구하는 분야에만 집중할 것을 요구받고, 그래야만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박사학위 소지자들 중에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박사학위에 상응하는 경험과 이력을 가진 사람들은 새로운 지식을 전달할 수 있는 사람들인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다양한 경험을 현장에서 하면서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거나 성과를 내온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몸으로 익힌 경험과 노하우를 전달해 줄 수는 있지만 책이나 논문, 영상에서 절대로 찾아볼 수 없는 지식을 전달할만한 능력을 갖고 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수업을 담당하는 경우가 있는 것은 전공에 따라 지식보다 경험과 노하우가 더 중요한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체계와 방향성, 시선은 AI가 제공할 수 없다. 이는 AI는 물리적으로 지식을 제공할 뿐이고 사고체계에 대한 제안이나 제언은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제안이나 제언을 하는 듯한 내용을 AI가 제시할 수는 있지만, AI는 질문을 하는 사람의 질문 범위 안에서만 제안이나 제언을 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한계도 분명하다. 똑같은 AI를 사용하더라도 이미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물어보는 질문과 방향성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고, 그러한 차이가 만들어지기까지는 내가 질문을 한 범위 안에서 답해주는 시스템이 아니라 누군가 일방적으로 정해진 콘텐츠를 제시하는 방식의 교육을 통한 축적이 필요하다.


만약 대학에서의 교육이 이 정도 기능과 역할을 하는 게 목표라면 어쩌면 대학보다 학원이 그러한 기능과 역할을 하는 게 효율적일 수도 있다. AI를 통해서 교육 커리큘럼을 만들어서 제시하는 것도 대안이 될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AI시대에 대학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대학은 학원이나 AI가 줄 수 없는 무엇인가를 줄 수 있어야만 한다.


대학은 그와 같은 차별점을 분명히 갖는다. 그런데 그건 아이러니하게도 교육 그 자체가 아니다. 대학이라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다양한 상호작용을 통해서 학생들이 하는 직간접적인 경험은 어떤 학원이나 AI도 제공할 수 없다. 단순히 수업을 듣고, 지식을 축적하고, 새로운 시선을 체계화하는 것 정도는 학원이나 AI를 통해서 구현될 수도 있지만, 거기에 더해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본인이 선택하고, 또래들과 사회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경험과 감정을 공유하고 갈등도 겪어보는 경험은 대학에서 가장 자유롭고 포괄적으로 일어난다. 책상 앞에, AI와의 교류만을 통해서 그러한 경험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학원도 그러한 기능까지 하는 건 불가능하게 현실이다. 대학들이 그러한 환경을 조성할 수 있는 건 후원하는 기업이 있고, 정부의 지원을 받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대학생들이 자신이 낸 학비의 수혜를 최대한 많이 받기 위해서는 대학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에 참여하고, 그 안에서 다른 어느 곳에서도 할 수 없는 경험들을 해야 한다. 그 안에서는 심지어 자신보다 뛰어난 학생들과 경쟁해서 실패해 보는 것도 교육이 된다. 이는 그러한 실패는 단순히 실패가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잘하거나 못한다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이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경험할 수많은 힘든 상황들을 버텨낼 수 있는 마음의 근육을 기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대학에서의 교육은 강의실 안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대학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이뤄지는 모든 활동과 주어지는 기회들이 경험들이 교육적인 의미를 갖는단 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대학은 교육적인 측면에서 여전히 존재의 이유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매우, 현실적으로 대학에 여전히 가야 할 필요가 있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대학은 여전히 사회에서 다른 경험들이 축적되기 전에 사람을 평가할 그나마 가장 객관적인 기준을 만들어 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대부분 대학들은 그 사회에서 가장 오래되고, 정교하게 체계화된 평가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혹자는 '학점이 어떻게 객관적이고, 체계화되어있다고 할 수 있느냐?'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대부분 기업들은 최소한 그 기업이 존재했거나 그 기업의 인사담당자가 경험을 축적해 온 햇수만큼의 데이터가 있다. 그 데이터는 특정 대학의 졸업생들 중에 학점과 다른 이력이 어느 정도 수준인 사람들이 자신들의 시스템 안에 들어왔을 때 어떠한 패턴을 보이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기업들은 이를 바탕으로 의사결정을 한다.


이걸 대체할 수 있는 시스템이 무엇이 있을까? 학원이나 AI가 제시하는 인증서는 데이터가 충분히 쌓이지 않았기 때문에 큰 의미가 있을 수가 없다. 자격증을 많이 갖고 있는 것 또한 마찬가지. 똑같은 자격증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실제 현장에 투입되었을 때 실력은 천차만별이 아닌가? 어떠한 자격증을 갖고 있다고 해서 그게 곧 그 사람의 실력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누군가를 정직원으로 들일 때, 더군다나 우리나라처럼 해고가 어렵게 되어있는 구조에서는 자격증만으로 누군가를 채용하긴 쉽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일단 실력이 되는 것으로 판단되는 사람들을 일단 받아보고, 시행착오를 각오하는 것도 기업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채용 프로세스 자체가 돈이자 시간이고, 여기에서 시간은 또다시 돈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업들은 가장 실패확률이 낮은 방향으로 채용을 해야 한다. 모든 것을 결국 '확률'의 싸움이다. 그렇다면 기업들은 자신들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데이터들을 최대한 활용해서 사람을 채용해야 한다. 대기업들이 수천 명에 대한 인적성 검사를 하고, 면접을 하는 것은 채용에서 실패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비용이 그런 절차에 사용되는 비용보다 적기 때문일 것이다.


당신이 정말 엄청난 능력의 개발자라고 해보자. 그래서 기업이 채용을 할 때 내는 문제들을 모두 완벽하게 풀어냈다면, 기업은 무조건 당신을 채용할까? 아니다. 기업에서 어쩌면 사회적인 요소가 가장 적은 편인 엔지니어조차도 시니어가 되어갈수록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고 잘 지내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연차가 낮을 때는 개발능력이 가장 중요할 수도 있지만, 연차가 쌓일수록 개발과 직접 관련되지 않은 마케팅, 기획, 전략적인 지식도 필요하게 될 수 있다. 그런 시기가 되었을 때는 지금 당장 물리적으로 개발능력은 조금 부족해도 새로운 것을 학습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사람들과 잘 지내는 사람을 채용하는 게 장기적으로 나을 것이다.


대학과 같은 커뮤니티를 경험하지 않고도 그런 능력이 탁월한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을 채용하는 사람은 당신의 그런 능력에 대해 알 수가 없다. 당신은 자신이 다른 능력도 탁월하다고 주장하겠지만, 모든 채용후보자들이 그렇게 말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채용하는 입장에서는 당신이 단순히 개발하는 능력 이상의 무엇인가를 갖고 있을 확률이 높다는 것을 신뢰할 수 있는 근거가 필요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어느 대학에서 어느 정도 학점을 받았고, 어떤 이력이 있는지는 누적된 통계가 분명히 있다. 그렇기 때문에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성공할 확률을 높이는 채용을 하기 위해서 기업들은 출신대학과 학점과 다른 이력들을 볼 수밖에 없다. 이는 한국기업들만의 특징이 아니다. 전 세계 모든 기업들이 1차적으로 이러한 필터를 활용한다. Apple, Google, Facebook의 상당수 직원들이 미국의 아이비리그와 같은 명문대학 출신이라는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처럼 대학을 다니고, 졸업하는 것은 사회적, 관계적으로 분명히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출신학교를 의미하는 학력은 현실에서 얼마나 의미를 갖고, 또 어느 정도의 의미를 갖는 게 바람직할까? 그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다루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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