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입학해 동기들과 학관에서 수다를 떨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내 등을 툭 쳤다.
'야, 오랜만이다.'
고등학교 동기였다. 내가 호감을 가졌고, 고백했다 차인. 내가 재수를 했다 보니 그 친구는 이미 재학생이었고, 학기 초에 우연히 학관에서 날 본 그 친구가 인사를 한 것이다. 반갑게 인사를 했고, 잠시 대화를 나누다 우린 그렇게 헤어졌다. 그리고 무슨 인연인지 그 친구와는 수년 후에 로스쿨 면접장에서 또 다시 마주쳤다. 멀쩡하게 좋은 은행에 다니던 그 친구가 갑자기 로스쿨이라니. 그 인연으로 우리는 지금까지도 종종 연락을 주고 받는다. 1년에 한두번 정도, 서로 어떻게 사는 지가 궁금할 때.
그 이상을 기대하신 분들께는 죄송하지만, 우리 둘 사이에서는 어떤 이성적인 스파크도 그 이후에 생기지 않았다. 엄청나게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똑같이 법 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 중에 이해관계가 엮이지 않았기에 우린 그저 가끔씩 연락을 하는 고등학교 동기 사이다. 사실 결혼은 생각도 없던 그 친구는 은행에 취업하자마자 신입사원 연수에서 만난 나이 많은 동기와 연애를 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을 했다. 그 친구와 로스쿨 면접장에서 마주쳤을 때 그 친구는 이미 결혼한 상태였다.
그 친구 외에도 나는 고백을 했다 차인 사람과 가깝게 지냈던 기억이 있다. 결혼을 해서 얼마 전에 아이를 낳은 그 친구는 최근에도 인스타에서 DM으로 자신의 친구와 내가 어떻게 인스타에서 서로 팔로우를 하고 있는지를 물어왔다. 그게 몇 년만의 연락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우리가 엄청나게 친하진 않지만, 사소한 일로 내게 연락을 몇 년만에 할 수 있다는 건 최소한 그 친구가 나를 불편하게 생각하진 않는단 것을 보여준다. 그 친구는 심지어 내가 거절을 당한 이후 몇 년이 지나 연애상담을 해준적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굳이, 심지어 차인 사람들과 연락을 하고 지낼 필요가 있냐고 묻는다. 굳이, 일부로, 어떠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연락을 하는 게 아니다. 연락이 끊어졌을 수도 있는 관계고, 내가 호감을 가졌던 모든 사람들과 모두 연락하며 지내는 건 아니다. 자연스럽게 멀어진 사람들도 있고, 이들은 그 중에 연결고리를 굳이, 일부로 끊어내진 않은 관계일 뿐이다. 호감을 가졌거나 연인이었던 사람들 중에 내가 여전히 어떤 형식으로든 연락이 되는 건 이 두 사람 밖에 없다.
연락이 되지 않는 사람들 중에는 내가 연락을 끊은 사람도 있고, 상대가 나를 끊어버린 경우도 있다. 연인이었던 사람들과는 전혀 연락을 하지 않게 되는 건, 어떤 형태로든지 이별이 안전하고 평안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조금 더 어렸을 때 만났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내가 가해자였다. 나는 누군가를 만날 때는 그 사람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며, 상대를 바꾸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강박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상대에게 느낀 불편함을 하나도 표현하지 않다가 그 불편함이 일정 수준으로 누적되면 어느날, 갑자기 이별을 통보해버렸다. 어렸고, 미숙했다. 건강한 연애를 하기 위해서는 만나는 과정에서 나의 감정과 느낌을 지혜롭게, 잘 표현하며 서로 맞춰가야 했는데 나는 그렇게 내 감정과 느낌, 생각을 전하는 게 무조건 폭력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일방적으로, 갑자기 이별을 통보하는 게 얼마나 폭력적인지는 의식하지 못하면서.
그런 나의 부족함을 느끼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는 이별을 통보하기 전에 대화로 다름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덕분에 연애기간이 조금씩 길어졌다. 그런데 어느 정도 이상의 나이가 되니 이젠 상대가 갑자기 이별을 통보하거나 잠수를 타버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나이가 들면서 결혼을 생각하게 되고,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고 판단을 내려버리고 관계를 끝내버리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이다. 그들에 대한 나쁜 감정은 없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가해자가 되었는데, 내가 누구를 판단할 수 있겠나.
그때는 몰랐는데, 20대의 나는 이기적이었고 사랑을 몰랐다. 돌이켜보면 20대의 나는 상대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소유하려고 했다. 상대를 사랑했다면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를 관찰하고, 상대가 원하는 것을 최대한 하려고 노력하며, 상대도 나를 이해하고 함께 공감할 수 있게 내 속 이야기를 공유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소유욕을 사랑이라 착각했고, 상대를 물건처럼 생각했다 보니 상대가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상대와의 관계를 끝내 버렸다. 필요 없어진 물건을 버리는 것 처럼.
그런데 이별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우리나라 사람들 중 상당수는 버리고, 버림 받는 이별을 한다. 상대가 관계를 더 이상 이어가지 못하겠다고 해도 그 마음과 생각을 인정은 커녕 존중도 하지 않고 자신은 이별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이들도 있고, 이별 사유가 결국은 상대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인 경우는 더 많다. 연애할 때 두 사람은 함께 상대에게 맞추기 위해 노력하며 중간 지점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은 그런 노력 없이 상대가 자신에게 일방적으로 맞춰줄 것을 기대하다 이별을 통보해 버린다.
나이가 들어 사람은 바뀌지 않고, 이젠 결혼할 사람을 찾아야 하니 아니다 싶으면 빨리 결정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짧은 시간 안에 이별해 버리는 패턴들도 마찬가지. '나랑은 맞지 않겠네'라고 결론지어 버리고 이별을 통보해버리는 건 결국 자신이 원하는 물건인 줄 알고 샀다가 아니다 싶으니 고쳐쓰거나 용도를 찾기 위한 노력을 하기보다 폐기처분을 해버리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이 '잘' 헤어지지 못하고, 이별한 연인과의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건 쿨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미국에서도 연인들이 헤어진 직후에는 관계가 단절된다. 사랑을 시작할 때 보통 두 사람 중 한 사람의 마음이 더 큰 것처럼, 이별할 때도 한 사람은 마음이 떠났어도 상대는 그렇지 않은 경우 어떻게 이별이 완벽할 수 있을까? 하지만 '상대적으로' 미국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고, 감정이 정리된 뒤에는 상대와 지인으로는 지내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은 듯하다. 이성적으로 관계가 정리되었다는 걸 받아들였고, 상대가 한 때 자신의 인생에서 소중했던 사람임을 받아들이고 상대를 물건이 아니라 내 인생의 소중한 부분이었던 존재로 존중해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잘' 헤어지는 것은 이별하는 시점에 갈등 없이, 쿨하게, 드라마를 만들지 않고 이별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감정의 문제가 엮여 있는 이별을 그렇게 완벽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연애를 하는 동안 상대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존중했으며, 상대에게 받은 게 많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될 때야 비로소 우리는 마음에서 상대와 '잘' 헤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잘' 헤어지고 나면, 상대와 절친으로 지내거나 가깝게 지내지 않아도 마주쳤을 때 미소를 짓고, 상대에게 내 인생의 한 시점에 내 인생의 일부가 되어줘서 고맙단 말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사람들 중 상당수는 그런 이별을 잘 하지 못한다. 이별을 한 뒤에 자신의 전 애인을 비판도 아니고 비난하고, 상대를 세상에 둘도 없는 나쁜 ㄴ/ㄴ으로 만드는 사람들을 우리는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상대를 그렇게 비난하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밖에 되지 않는 사람과 만난, 그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사람이 된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고, 우리 모두 부족한 면들이 있으며, 맞춰가지 못할 정도의 다름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면 상대가 바람을 피웠거나 갈취, 폭행을 하는 등 범죄행위를 한 가해자가 아니라면, 우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한때 연인이었던 사람을 '나와 맞추기 힘든 수준의 다름이 있지만 좋은 사람'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잘' 헤어지는 게 필요한 가장 큰 이유는, 상대와의 연애를 그렇게 '잘' 끝내지 못한 상태에서는 상대가 여전히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과거에 연인이 했던 행동과 비슷한 행동을 지금의 연인이 하는 것에 패닉하고, 상대가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거나 전 연인을 기준으로 다르거나 비슷한 면을 가진 사람과 만나려고 하는 것은 모두 그 사람과의 만남이 여전히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우리는 과거의 연인과 '잘' 헤어질 때야 비로소 그 사람과의 만남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고, 좋은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의 연인과 '잘' 헤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 시작점은, 연애를 할 때 상대를 내 소유의 물건이 아니라 나와 평등하고 동등한 위치에서 만났던 '사람'으로 존중해 주는 것이다. 연애할 때 상대를 사람으로 생각해 줘야, 헤어지고 나서도 그 사람을 사람으로 인식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