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하지 않은 건지, 못한 건지 모를 시간을 꽤나 길게 보내고 있다. 20대 이후로는 가장 길게. 썸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호기심이나 호감이 가는 사람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아주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호기심과 호감 사이 어딘가에 감정이 있는 상대는 있다.
과거에는 이 정도 호기심이 있을 때 상대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다. 혹자는 나이가 든 사람들이 재고 계산하는 것과 같은 패턴이 아니냐고 할지도 모른다. 그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내가 든 사람들 중에 일부, 혹은 상당수가 재고 계산하는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면 호기심과 호감 사이 어딘가의 감정이 든 상대를 지금쯤이면 관심 범위 밖에 놓거나 상대가 느끼고 부담을 느낄 수준의 호감을 일단 표시를 하고 봤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일단 상황을 관망하며 여전히 상대와 내 마음의 변화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
내가 이러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나 자신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는 상대 생각이 나고, 연락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그게 곧 호감이고 그 정도 상태에서 사귀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런 마음이 생기면 나는 상대의 마음을 '사기' 위한 노력을 하면서 상대에게 맞추면서 상대를 내 연인을 만들어 소유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때 그렇게 생각하고 다가갔단 것이 아니다. 당시에 나는 내가 순수한 마음으로, 상대를 좋아해서 마음을 표현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건 사랑도, 호감도 아니고 소유욕이었단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호감이 생기는 사람이 생겨도 여러 이유로 쉽사리 다가가지 못하면서 나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됐다. 처음에는 마냥 예쁘고, 착하고, 선하고, 지혜롭게 보였던 사람을 시간을 두고 관찰하다 보면 상대를 보는 내 시선이 달라지는 걸 느꼈단 것이다. 그렇게 예쁘게 보였던 상대의 외모가 나의 감정적 뜨거움이 식으면서 달라 보일 때도 있었고, 착하고 선하게 느껴졌던 사람의 다른 면들을 발견하면서 단 번에 감정이 식기도 했다. 그제서야 나는 내가 뜨거운 감정으로 인해 눈은 물론이고 다른 감각들도 마비되어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내 경험상 그런 뜨거운 감정은 오래가지 않아 식더라.
반면에 당장 외모가 눈에 들어오지 않고, 관심이 가지 않던 사람의 다른 모습을 알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상대를 처음에 애초에 객관적으로 보게 되기 때문에 감정이 뜨겁게 타오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상대의 좋은 면들을 발견하고, 상대의 다양한 표정과 생각을 접하게 되면서 상대가 아름다워 보이고 상대에게 매력을 느끼게 되는 경우도 있다. 마치 뚝배기가 뜨거워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리지만 온도가 올라가고 나면 일정시간 동안 상당한 수준의 온도를 유지하듯이, 이런 경우에는 상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과정에서 감정이 형성되다 보니 호감이 오래 유지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부터 호기심이 생겨도 상대가 그런 호기심이나 호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행동을 쉽게 하지 않는다. 사람, 특히 남자들은 목표지향적인 경향이 있어서 그렇게 다가가기 시작하면 상대가 어느 순간 목표물로 설정되어 상대를 소유하기 위한 노력을 하기 시작하는 걸 경험하고, 봤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상대를 지켜보다 직접 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확실하게 들면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상대에게 다가가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다만, 아직까지는 그 연장선에서 아직까지 서로가 잘 맞았던 사람이 없었기에 썸은 있었지만 굉장히 오랜만에 짧지 않은 시간을 싱글로 보내고 있다.
그 선택을 후회하지도 않고, 바꿀 생각도 없다. 돌이켜보면 예전엔 연애 자체가 목표였기에 마음이 급했지만, 이젠 결국은 평생을 갈 수 있는 한 사람을 만나는 게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다. 결혼이 무조건 목표라는 건 아니다. 오히려 어렸을 때는 항상 결혼을 생각해서 만남이 힘들었던 시절도 있었는데, 그렇게 생각하고 만난다고 해서 결혼까지 가는 건 아니더라. 같은 사람도 지인일 때, 연인일 때, 그리고 배우자로 생각할 때의 모습은 다르기 때문에 결혼까지 생각하려면 최소한 연인으로서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렇게 알아도 결혼하면 상대는 달라질 텐데 연애도 하기 전부터 상대와 결혼에 대해 생각하는 건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이다. 연애도 하기 전에 결혼도 확실히 아닌 사람과는 연애를 하지 않겠지만 나이가 들어도 결혼보단 일단은 연애가 우선이다.
지금, 이 상태가 맞다. 그리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런 상태에 도달해 있다. 그때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지금 돌아보면 나는 다양한 이유로 연애를 하거나 하고 싶어 했다. 겉으로, 심지어 나 자신에게도 연애에 대해 내세우는 이유는 항상 똑같았다. 결국은 결혼을 하고 싶기 때문에. 그런데 그게 사실이 아니었더라. 나는 때로는 외로워서 연애를 하고 싶었고, 가끔은 연애할 수 있는 상대가 있기 때문에 상대를 소유하고 싶은 마음에 만나고 싶었으며, 다른 사람들이 연애나 결혼을 하는데 나는 싱글이란 이유만으로 불안해서 연애를 하려고 했던 적도 있었다.
모두,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연애를 하면 안 되는 이유들이다. 내가 외로워서 한 연애는 나는 상대를 충분히 품어주지 못하면서 상대가 내게 맞춰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끝났고, 연애할 수 있는 상대가 나타나서 한 연애는 오래가지 못했으며,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한 연애는 좋게 끝나지 않더라. 그런 이유들로 시작한 연애는 절대로 건강할 수 없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한 연애 끝에 한 결혼도 행복하기가 힘들다. 물론, 처음부터 완벽한 연애는 있을 수 없다.
그러한 이유들로 연애를 시작해도 만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며 좋은 시너지가 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결혼해야 할 사람을 너무 일찍 만났어'라고 말하는 연애기간이 긴 부부들이 그 대표적인 예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예외이고, 외롭거나 주위나 상황을 의식해서 시작한 연애의 끝이 대부분 좋지 않다. 그로 인한 문제는 연애할 때가 아니더라도 어떠한 형태로든지 결혼한 뒤에라도 생기는 경우가 많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농담반, 진담반으로 싱글이 좋은 거고 결혼은 늦게 할수록 좋다고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연애는 두 사람이 대등한 위치에서 만나 의존적이지는 않지만 서로에게 의지하고, 공감하며, 삶을 공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상대와 만남으로 인해 내 삶은 긍정적인 영향을 받아야 한다. 상대와 만남으로 인해 내 일상이 망가지고, 자신이 나쁜 사람 같이 느껴지거나 마음이 고통스러워진다면 그 연애는 하지 않는 게 맞다.
그런 상황에서도 우리가 관계를 끊어내지 못하는 건 많은 경우 그가 사회적으로 좋게 평가받고 있는 요소를 갖고 있거나,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틀과 기준들 때문인 경우가 많다. 80-90년대까지는 그게 맞는 결정이었을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2000년대 초반까지도.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는 굉장히 경직되어 있었고, 나이가 결정하는 요소가 지금보다 훨씬 많았으니까. 하지만 지난 20여 년간 우리 사회는 급격하게 변해 왔다. 그리고 우리는 한반도에 살았던 어떤 사람들보다 개인과 자유가 중요해진 사회에 살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기준으로 우리 삶에서 어떠한 결정을 하는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건강한 연애는 주고받는 관계를 통해 만들어진다. 계산적으로 준 만큼 받아야 한다는 게 아니다. 두 사람이 모두 상대가 필요한 것을 주고 싶어 하고, 주기 위해 노력하면 두 사람은 모두 상대로부터 많은 것을 받게 되고 그 연장선에서 다시 상대에게 필요한 것을 주게 된다. 그 과정에서 각자의 삶을 공유하다 보면 두 사람의 삶은 각자 유지하지만 하나로 공유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 노력한다고 해서 모든 만남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똑같은 상태에서도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상대를 대하고, 그것을 흔히 '화학작용'이라고 하지 않나? 그런 화학작용의 방향성이 서로를 존중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오고, 그게 노력으로 맞춰지지 않는 관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어느 정도는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완벽하게 해내는 사람도 없고, 그렇기 때문에 완벽한 연애 같은 건 없다. 하지만 다름을 맞추고, 존중하기 위해 노력하게 되는 사람과는 그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지만 그럴 생각 없이 상대를 도구로 삼아 자신이 필요한 부분을 채우려는 사람과는 어떠한 관계도 쌓이고, 만들어질 수 없다.
상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도 무의식 중에 그런 생각을 갖고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상대나 자신 안에 그런 마음이 있다면, 그때는 연애를 하지 않는 게 맞다. 그리고 연애는, 상대와 자신 모두 그러지 않을 수 있을 때,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는 상태일 때 하는 게 맞다. 그렇지 않은 연애는 우리 안에 되돌이키기 힘든 흔적이나 상처를 남겨놓을 수 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