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 설정할 것인가?
유진오라는 사람이 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 최초의 법제처장이자, 박정희 정권은 민주주의적인 가치를 짓밟고 있다는 이유로 수차례나 공직에 나설 것을 제안받고도 거절한 사람이다. 그리고 헌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그는 당시에 주도권을 갖고 있었던 이승만 전 대통령이 헌법을 날치기로 통과시키기 전까지 몇 가지 사항에 대해서 반대를 할 정도로 강단이 있는, 사실 해방이 된 시점에서 가장 뛰어난 헌법학자였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이 사람은 굉장히 훌륭해 보이지만, 유진오라는 사람은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분류되어 있다. 그가 처음부터 친일파였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일제의 통제가 강해지고, 그가 대학에서 강의하기 위해서는 일제가 요구하는 친일적인 선동행위를 해야만 했다. 당시에 일제는 승승장구하며 영토를 확장해 나가고 있었고 현실적으로 독립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며, 다른 적극적인 친일파들과 달리 해방되기 몇 해 전부터 유진오 박사는 교단에서도 내려오고 적극적인 친일행위를 하지는 않는다.
유진오 박사는 어떻게 평가되어야 할까? 혹자는 유진오 박사는 누가 뭐라고 해도 친일파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유진오 박사를 획일적으로 평가하지 못하는 것은 그가 다른 친일파들과 달리 친일 행적을 통해서 큰 유익을 봤거나, 해방 이후에 어떻게든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헌법학자로서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모습도 보여줬다. 우리나라가 민주화될 수 있었던 것은 그와 같이 그 자리에서 버텼던 법학자들이 있었던 영향이 분명 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내게 유진오 박사는 평가하기가 가장 힘든 인물이다. 어느 기준으로 그를 평가하느냐에 따라 그는 친일파일 수도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를 지켜낸 사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한 사람을 어떠한 기준으로 평가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기준은 단순히 '어디에 두는지' 여부가 아니라 '언제의 기준'으로 두느냐에 따라서 다르게 평가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30-40년 전만 해도 무릎 위로 올라오는 치마를 입은 것이 불경스럽게 받아들여졌을 수 있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는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지 않겠나? 그뿐 아니라 도덕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과거에는 용인되지 않던 것이 시간이 지나 용인되는 것도 있을 것이고, 과거에는 용인되던 것이 시간이 지나서 용인되지 않게 되는 것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어떤 기준을 적용시켜서 특정한 행위나 상황을 평가할 것인지는 같은 현상에 대한 완전히 다른 해석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평가하는 기준을 제대로 세우는 것은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이처럼 기준에 따라 다르게 평가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을 이유로 '미투'를 선언하는 이들에 대해서 '당시에는 그게 다 용인되던 것이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의 말은 분명 사실이다. 과거에는 성적인 것에 대해서 걸쭉한 농담을 하고 웃어넘기듯이 스킨십을 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은 분명 사실이다. 당시에는 커피를 마셔도 다방에서 아가씨를 불러서 마시지 않았나?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던 게 아무렇지도 않았던, 교수님들이 담배를 피우면서 강의를 하던 시절이 아닌가? 그런 시대에, 특정 업계나 특정한 자리에서 그런 것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이뤄졌던 것은 사실이기에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말이 일면 일리가 있어 보인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지금보다 더 남성 중심적인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있었기 때문에 그게 자연스럽게 느껴졌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아니다. '그 당시에 그런 문화가 있었다'는 이유로 그게 맞는 것이 되거나 그에 대해서 면죄부를 준단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미투'와 관련해서, 그 당시의 이야기를 지금 입 밖으로 꺼낸 사람들은 그 당시에 수치심을 느끼거나 상처를 받았고, 그때의 기억들을 지금도 생생하게 갖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건 '사람'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단순히 '그때와 지금의 기준이 달랐다'면서 가해자를 옹호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단 것이다. 그런 기준으로 따진다면 노예제도도, 유색인종을 동물원에 감금하고 전시하던 것도, 일제가 군 위안부를 운영한 것도, 친일파들이 일제에 붙어서 재산을 불린 것도 모두 정당화될 수 있지 않겠나? '당시에는 기준이 달랐으니까' 말이다. 일제에서 해방이 될 줄 몰랐으니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기준에 따라서, 시대적인 상황에 따라서 당시에는 당연했던 것들이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들이 물론 존재한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 중에서는 당시에 시류가 그랬기 때문에 넘어가지는 것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모든 것들이 그로 인해 용서받을 수 있거나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니다. 그 당시에 그런 문화가, 분위기가 만연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은 가부장적인 문화로 인해 남녀 간의 불평등이 심각한 수준이었던 영향이 크다. 그리고 그러한 문화 속에서 여성들이 그걸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로 인해 힘들어하거나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훨씬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사람'이 상처를 받았고, 그에 대한 기억이 20년도 더 넘게 남아있다면 그건 가해자가 용서를 구할 성격의 것이지 당당하게 '당시에는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었다'라고 해서는 안된다.
그 당시 문화와 사회적 분위기가 얼마나 달랐는지는 연령대별로 사과하는 방식이 다르다는데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가해자들 중에 30대만 해도 곧바로 사과를 하고 나오는 반면 40-60대 이상의 사람들은 이게 사과인지 변명인지 모를 듯한 성명을 내놓는다. 억울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에는 다른 사람들도 아무렇지도 않게 그러했다는 이유 때문에 말이다. 그때는 다 그랬다고 생각하니까... 그들은 '시대가 흐름에 따라서 문화가 달라졌기 때문에' 지금 다르게 평가받을 뿐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문화가 많이 변한 것은 사실이다. 21세기에도 내가 군대 가기 전에는 동아리에서 MT를 가면 술을 마시다 남녀가 한 방에서 섞여서 잠들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서부턴가 MT를 가도 남녀 숙소 또는 최소한 남녀 취침 방은 따로 잡는 문화가 생겼을 정도로 우리 사회의 문화는 꽤나 빠르게 달라졌으니까. 하지만 '문화가 바뀌었다는 사실'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것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그리고 가해자들은 대부분이 자신들이 젊은 시절에 익숙했던 문화 속에서 했던 행위들을 21세기에도, 문화가 달라진 시대에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지 않나? 그렇다면 그들은 '우리는 그 시대 사람이니까 그때 기준을 갖고 현재를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그런 주장이야말로 말이 안 되는 것 아닌가.
어떠한 기준을 가지고 사람의 행위를 평가하는지에 대한 것은 신중하게 이뤄져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어떠한 기준에서든지 특정한 행위가 사람에게 심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상처를 줬다면, 그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다. 실수로 그러했다면, 구차하게 다른 말을 할 필요 없이 그 사람한테 사과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 당시에 그게 아무렇지 않은 행위나 언행이었다 하더라도 상대가 그로 인해 상처를 받고 20-30년까지 그 기억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면, 본인이 그러한 사실에 대해서는 변명하지 않고 사과하는 것이 맞다. 다른 게 억울할지 몰라도 그 사실 하나만큼은 분명하게 본인의 잘못이 아닌가? 누군가의 인생을 20-30년 동안 구속하고 있는 상처를 준 것이 말이다.
그러니 굳이 연애감정, 격려와 같은 표현을 써가며 치사하고, 비겁하며 소름 끼치게 하지 말고 남자답게 본인이 미숙했고, 본인이 잘못했음을 인정하고 사과했으면 좋겠다. 같은 남자로서 변명 같은 발표문들을 연달아 접하게 되는 것이 창피하고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