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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on de Cyrene Jul 29. 2018

결혼과 인생

어떤 것을 염두에 두고 결정할 것인가?

결혼을 할 것인가?

주위에서 기혼자들의 6할 정도는 결혼을 말리고, 2할 정도는 알아서 하라고 방관하며, 2할 정도는 반드시 하라고 조언한다. 그 조언은 철저히 자신들의 결혼생활에 기반을 두고 있다. 아내와 자녀에게 구속되어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결혼을 말리고, 방관하는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경우가 많으며, 반드시 하라는 사람은 가정에 온전히 충실하는 사람이더라. 누구나 자신의 경험 범위 내에서 조언을 한다. 그래서 결혼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말에 휘둘릴 필요가 없다.


그래서 사실 결혼을 할 것인지 여부는 사실 만나는 사람이 없는 사람은 연애부터 시작하고 고민하기 시작하는 것이 맞을 것이며, 만나는 사람이 있는 사람은 '이 사람이랑은 티격태격하면서도 내 편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인가?'를 기준으로 고민을 할 것이지 추상적으로 '결혼을 해야 할 것인가?' 자체를 놓고 고민할 성격의 것은 아니다. 결혼은 죽어도 안 하겠다던 사람이 갑자기 청첩장을 가지고 오는 경우를 꽤 많이 접했고, 이는 추상적으로 결혼 자체에 대한 고민을 하는 것이 얼마나 비생산적이고, 비효율적인지를 잘 보여준다.


즉, 지금 결혼을 미친 듯이 하고 싶다 하더라도, 다음에 만나게 되는 연인이 절대 평생을 함께할 수 없겠다고 생각이 들면 그 사람과 결혼은 하지 않을 것이며, 결혼을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있다가도 누군가가 자신의 마음을 바꿔 놓을 수도 있는 것이란 얘기다. 사람의 마음은 원래 바뀌게 되어 있다. 그래서 그걸 어느 지점에 고정해 놓을 필요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의 마음은 어차피 그렇게 다짐한다고 지켜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언젠가 혼자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래도 결혼 자체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입장을 취하는지가 지금 우리가 누군가를 찾기 위한 노력을 할지 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에 결혼을 하겠다는 의지가 어느 정도 있는지는 꽤나 중요하다. 나 역시 이에 대해서 고민을 계속해서 해왔고, 공부나 일이 재미있을 때는 이것만 하고도 살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을 했었지만, 내 인생이란 길을 같이 걸어가 주고, 나도 상대의 인생길을 같이 걸어가고 싶다는 생각은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과정에서 들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면 그건 나의 죽음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인간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감안하면, 부모님께서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시는 것이 순리이고 가족 안에서 이치에 맞는 일 일터인데, 부모님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나면 난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지게 되더라. 그 생각을 못했다. 죽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기까지는. 그런데 할아버지는 물론이고 주위 지인들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 그들이 떠오를 때면 그 시절을 같이 기억하고 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정말 많이 다르더라. 그렇다면 부모님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나면, 부모님 생각은 더 많이 그리고 더 자주 나지 않을까?


그때 같이 부모님을 추억할 수 있는 사람은 지금으로써는 동생밖에 없는데, 동생과 같이 산다고 해도 형제가 그렇게 자주 대화를 하는 것도 아니고, 또 동생이 결혼을 하면 난 부모님을 누구와 추억할 수 있을까? 그리고 부모님께서 본인의 부모님에 대해 추억하시는 걸 보면, 그게 언제가 되든지 난 아마 내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부모님을 주기적으로 추억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때, 부모님을 나 혼자 추억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아지더라.


친구라는 이름, 그리고 관계

그뿐인가? 아주 현실적으로 말해서, 친구들이 싱글일 때는 정말 친한 사이에는 일주일에도 몇 번씩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싱글로 남아있지 않은 이상, 아니 남아 있는다 해도 그 관계가 가족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고등학교 때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고, 재작년까지 교회도 같이 다녔던 친구가 이민을 갔다는 소식을 한 다리 건너서 들으면서 그 생각은 확신이 되어 버렸다. 그 친구가 원망스럽지 않았다. 누구나 자신의 가정을 꾸리면 그 가정이 중심이 되고, 그 가정 속에서 자신의 인생도 복잡하기 때문에 주위를 그렇게 챙기는 것이 쉽지 않다. 싱글인 친구들도 아예 같이 살면 조금 다를 수도 있지만, 아니 같이 산다고 해도 가족으로 엮이지 않은 이상 언제든지 다시 떨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한계가 분명 있다.


그렇게, 우리는 언젠가는 결국 혼자가 된다. 어떤 이들은 '결혼해도 상대가 먼저 죽으면 끝이 아닌가?'라고 할지 모르고, 그건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살아있는 동안 조금 더 행복한 방법'은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서로의 삶과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테두리를 형성하는 것이고, 그런 식으로 '만약'을 계속 붙이게 된다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할 수 있는 건 사실 아무것도 없다. 인생의 모든 것은 어느 정도의 모험과 불확실성을 수반한다. 세상에 20대80이나 30대70인 것은 거의 없고 40대60 또는 45대55의 확신만 가질 수 있어도 그건 해 볼만한 모험이다.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는 것에 대하여

이에 대해서는 '결혼한다고 다 그런 관계가 되냐? 너무 이상적인 것이 아니냐?'라고 반박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혼자면 갈등이 없지만, 결혼을 해서 행복한 면도 있지만 갈등도 많고 피곤하지 않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역시나 일리가 있는 비판이다.  그리고 혼자 있는 것이 '진심으로 항상 행복하면' 결혼을 꼭 할 필요는 없을지 모른다. 그런데 여기에서 내가 궁금한 것은 정말, 진심으로 혼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고 다른 행복한 가정의 모습을 봐도 전.혀. 부럽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결혼을 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나도 한 때 그랬고, 그렇게 얘기하고 다니는 사람들 중에는 사실 그렇지 않은데 그런 척을 하는 경우가 많아 보이는 게 사실이다.


사실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는지 여부는 결국 본인에게 달린 일이다. 이는 특정 관계에서 일정한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비율의 차이가 있을 뿐 양쪽이 모두 과실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두 사람이 대화하면서 서로 받아들이고 이해할 것을 찾아간다면, 그 과정을 연애기간 때부터 그런 과정을 갖는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두 사람 간의 갈등보다는 일상을 공유함으로써 느낄 수 있는 평안함의 비중이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게 해결이 안되는 것은 두 사람이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그게 안 되는 사람과 결혼을 했다면, 그건 본인이 배우자를 고를 때 잘못된 기준을 갖고 잘못된 판단을 했기 때문인바, 그걸 갖고 결혼 자체를 부정적으로 판단하거나 남의 탓인 것처럼 하는 것은 매우 유아적인 발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내 주위를 보면 그런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은 보통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해보지 않기 때문인 경우가 많은 듯한데, 연인을 선택하는 것과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의 무게감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거나, 상대의 스펙과 외모만을 보고 선택한 경우가 그 대표적인 예에 해당한다. 하지만 본인이 성인이라면, 본인이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본인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게 맞지 않나? 만약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는 게 그렇게 나쁜 것이라면 세상에 행복한 부부들은 다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현대사회에서, 최소한 대한민국에서는 결혼할 상대를 선택할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결혼하기 전에 그 사람을 어떻게 다 아느냐?'라고 반문할지 모르나, 사실 너무 감정과 본인이 둔 기준에만 매몰되지 않고 한걸음 물러서서 상대가 자란 환경,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 대화하는 방법, 사소한 습관들 등을 한 걸음 물러서서 살펴보면, 그 정도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은 모든 인간에게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은 완벽한 사람을 찾아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 인생길을 걸어가는 것보다 같이 걸어가는 게 더 행복한 사람'을 선택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세상 어디에도 [완벽한] 배우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결혼과 일

이 지점에서 최근 사회적 분위기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반박은 '난 가정을 꾸리는 것보다 일이 좋다'는 것이다. 물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그런데 여기에서도 우리는 조금 더 길게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가 언제까지 일할 수 있을까? 우리 아버지께서는 대기업에서 정년퇴직을 50대 후반에 하셨다. 아버지께서는 정말 운이 좋으셔서 그 이후에 아는 분이 하시는 아주 작은 회사에서 여전히 일을 하고 계시지만 아버지 친구 분들은 지금 대부분 백수로 지내신다. 대기업 CEO를 하셨던 분들도. 그뿐 아니라 이미 백수로 지내신 지 10년 가까이 되시는 분들이 대부분이시더라. 그리고 참고로, 우리 아버지 회사에서 정년까지 일을 하신 분은 우리 아버지께서 처음이셨다. 그만큼 정년퇴직을 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그렇다면 특별한 기술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길어야 60 정도까지 일을 한다는 계산이 나오고, 회사원은 임원이 되는 극소수의 사람들 외에는 대부분 50대 초중반에 회사생활을 마무리 짓게 된다. 기술을 가진 사람들은 그 나이가 되면 기력이 딸려서 일을 하고 싶지 않은 경우가 또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에 뭘 할 수 있을까? 죄송한 말씀이지만 회사는 사람을 부품으로 만든다. 그래서 사실 20-30년 정도 회사생활을 하던 사람은 사업을 할 능력이 없다. 회사 안이 전쟁터라면 사업은 지옥이기 때문에, 회사생활을 하던 이들은 사업을 해서 성공할 가능성이 매우 낮다. 그것도 50대 초중반에 시작해서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건 수많은 실패를 반복해서 전투력도 강하고 성공 노하우도 있는 사람들이 30대부터 50대까지 굉장히 많이 있기 때문이다.


이게 냉정한 현실이다. 그렇다면 그때 뭘 하고 살 것인가? 가족이 없다면? 아니 가정이 있었다 하더라도 같이 얼굴을 보고 일상을 많이 공유해 오지 않았다면 우리들의 노년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세상은, 언론은 나이가 들어서도 성공하고 활발하게 일하는 사람들 얘기를 주로 다루지만 현실은, 60-70대 이상의 연령대에서 가족이 없는 사람들은 매우 외롭게 힘들게 삶을 마무리하는 경우가 많단 것이다. 그리고 일에 매몰되어서 살았던 사람들은 다른 것을 할 줄 몰라서, 심지어 놀고 즐기는 법도 익숙하지 않아서 뭔가를 하려다가 모아놓은 돈을 다 날리면서 비참한 노년을 마치기도 한다.


인생은 점이 아니라 선이고, 목표가 아니라 과정이다. 우리가 살아내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하는 선택 중에 우리의 마지막에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그 결정들 중에 매우 크고 중요한 지점 중에 하나는 결혼, 그리고 가정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결혼을 할지 여부, 누구와 결혼할지 여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는 이런 인생의 큰 그림을 최소한 몇 번은 그려보는 게 맞지 않을까? 물론 현실은 우리가 지금 상상하는 것과 많이 다르게 구현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생각을 몇 번 해보면 최선은 아니더라도 정말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매 순간마다 그렇게 고민하고 생각하면서 선택을 한다면 말이다.


왜 그렇게 복잡하게 선택해야 하냐고? 우리 인생이니까. 한 번 사는 인생이니까. 그리고 지금 고민하면서 선택을 하면, 노년에는 덜 고민해도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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