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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on de Cyrene Dec 22. 2018

결혼의 이유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필요에 대하여

결혼이라는 사회적 약속

글의 톤을 바꾸겠다는 글을 쓰게 된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이 주제를 '작가의 서랍'에 임시 저장한 것의 영향이 가장 컸다. 난 글의 주제나 제목이 떠오르면 한 자리에 앉아서 짧으면 30분, 길어도 1시간 30분 이내로는 글 하나를 써 내려가는 편인데 아주 가끔 그렇게 하지 못하는 글들이 있다. 주제나 제목은 떠올랐는데 그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을 때 보통 그렇게 되는데, 그런 경우에도 생각이 정리가 되면 한 자리에 앉아서 글을 그대로 써 내려가는 편이다. 


'결혼의 이유'라는 주제의 글은 그러지 못했다. 생각은 정리됐는데, 그게 너무 차갑고 이성적이라서 내 생각에 대해 스스로 거부감을 갖게 되더라. 그러고 나서 지난 내 글들을 읽어보니,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중에 내 글들은 점점 이성적이고 차가워지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건 아무래도 박사학위 논문 작업을 하는 과정의 영향을 받은 것일 테다. 물론 그런 글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만, 몇몇 글들은 내가 읽기에도 숨이 막힐 정도로 이성적이고 차갑게 느껴졌다. 그래서 몇 날 며칠을 고민했다. 이렇게 사랑, 연애, 결혼에 대한 글을 써나가는 것이 맞을지에 대해서. 톤을 바꾸겠단 글은, 그런 배경에서 쓰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스스로의 생각에 질리게 된 '결혼의 이유'가 난 여전히 유효하다고는 생각한다. '결혼'이라는 것은 두 사람이 우리가 살아가는 가장 작은 사회 단위인 '가정'을 꾸리고 서로 보호하면서 살아가는 '사회적인 약속'이다. 그리고 국가와 사회에게 '가정'의 안정은 굉장히 중요하다. 가정이 안정되어야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세금이 나올 수 있고, 가정이 안정되고 그 안에서 행복하거나 최소한 불행하지는 않은 사람들이 많을수록 사회가 전반적으로 안정되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적 필요'가 아니라면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는 것은 동거와 크게 다를 게 없다. 


사실 '국가를 위해 애를 낳아라'라는 식의 말도 안 되는 주장은 위에서 설명한 가정의 사회적인 의미에서 본말을 전도했기 때문에 나오는 주장이다. 물론, 국가가 존립하기 위해서는 인구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유지될 필요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국가가 개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개인이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개인이 국가를 위해서 희생을 하는 것은 자신의 희생으로 인해 자신도, 자신의 가정도 더 행복하고 안정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개인이 가질 때 일어나는 현상이지 국가가 그것을 강요할 수는 없다. 70-80년대에 우리나라에서 개인이 국가를 위해 희생한 것 또한 그렇게 하면 우리나라 경제가 발전될 것이, 본인과 가족이 더 잘 살게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경제는 이미 고도로 발전했고, 시대가 바뀌어서 개인의 희생이 국가의 경제를 발전시키지 못한다. 이는 우리 사회와 시대에서는 개인이 자신을 희생한다고 해서 반드시 더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란 것을 의미한다. 이제는 사회적, 시대적 상황이 바뀌어서 개인이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줘야, 기본적인 먹고사는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해줘야 그 안에서 창의성을 발휘해서 국가의 경제에 도움이 되는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는 것은 그러한 생계를 해결할 수 있는, 보호가 필요한 미성년자들이 잘 성장할 수 있는 보호막 혹은 울타리를 형성하는 것으로써의 의미를 가져야 한다. 현실은 그렇지 못하지만. 


여기까지 생각이 정리되고 나니, 숨이 막혔다.  


서로의 편이라는 약속. 

하지만 결혼이라는 제도는 그러한 사회적인 의미 말고도 개인적인 의미도 갖는다. 결혼은 '항상 내 편인 사람을 옆에 두게 되는 것'을 보장해주는, 아니 최소한 보장해줘야 하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연애의 이유가 누구나 일상에서 내 편인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면, 결혼이라는 것은 서로 그런 사람이 되겠다고 '사회적으로 약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평생' 함께 하겠다는 약속이라고 해석하지만 사실 그건 '이혼하게 되면 그 과정에서 상처도 받게 되고, 그 후유증이 있으니까 어지간하면 평생 살아라'라는 의미일 수는 있지만 사실 결혼을 하는 것 자체가 평생 함께 하겠다는 약속이라고는 할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이혼이라는 제도가 존재할 수 없지 않을까? 


결혼이라는 사회적인 제도는 그렇게 두 사람이 서로에게 구속되기로 약속하는 것이다. 함께 살아가기로. 그리고 그건 어쩌면 인간은 그렇게 사회적으로 구속되지 않으면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과정을 참을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이 만든 제도 인지도 모른다. 사실 주위에서 가정을 꾸린 친구들을 보면 그들은 '결혼했기 때문에 참고 버티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그에 대해 불평하며 결혼하지 말라고 조언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들의 삶을 지켜보고 있으면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참고 버틸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들이 누리게 되는 것 또한 굉장히 많다. 그렇게 '강제로' 버티게 되지만 인간이라는 존재는 참으로 독특해서 시간이 지나고, 그들의 가정은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안정되어 가는 것을 나는 꽤나 자주 본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 '강제로' 맞춰지기 때문에 그들은 평생 함께 삶을 공유하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가더라.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 안에 있는, 자신들도 몰랐던 모습들을 발견하고 새로운 종류의 행복을 경험하더라. 시간이 지나면서. 


결혼이라는 제도는 그래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결혼은 운동 같은, 보약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운동을 할 때 우리는 엄청나게 고통스럽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체력, 그리고 자존감을 가질 수 있게 해주는 몸을 만들 수 있지 않나? 그리고 보약은, 아니 모든 종류의 약은 맛은 없지만 우리 몸을 회복시켜주지 않나? 더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말이다. 그래서 결혼은 어쩌면 우리 마음의, 정서에, 일상에 그런 의미를 갖는지도 모른다. 가정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힘들지만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에게 필요한 안식처를, 쉼을, 정서적 안정을 선물받을 수 있는 가정을 만들어 나갈 수 있으니.


모든 가정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여기까지 읽은 사람들 중에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은 '결혼하다고 다 행복하냐'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맞는 생각이다. 결혼을 한다고 다 행복하고, 안식처와 쉼, 정서적 안정을 선물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두 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그 첫 번째는 자신이 너무 이기적인 사람인 경우다. 자신은 무엇을 줄지를 생각하지 않고 상대가 자신에게 모든 것을 맞춰주기를 기대하는 사람의 경우 어떤 상대를 만나도 그런 것들을 받을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연인 또는 배우자와 관계에서 문제가 있고 행복, 쉼, 안정보다 갈등과 문제가 더 많이 발생한다면 사실 우선 나 자신이 상대에게 무엇을 주고 있는지를 돌아봐야 한다.


두 번째 경우는 상대가 너무 이기적인 사람인 경우다. 그래서 자신을 돌아본 결과 본인은 정말 줄 수 있는 것을 최대한 다 줬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와 문제가 반복되거나 자신이 일방적으로 상대에게 줄 수밖에 없는 구조가 만들졌다면 그 관계는 끝내는 것이 맞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는 연애를 하는 것 자체가, 결혼을 하는 것 자체가 안식처를, 쉼을, 정서적 안정을 선물해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대가 그런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 사람은 엄청나게 큰 시련을 겪기 전에는 바뀔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에 난 아무리 생각해도 그 상황이 바뀌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면 두 사람은 갈. 


이혼이라는 제도가 존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가정 내의 불화로 인해 사회적으로 불행한 사람의 수가 증가하는 것은 오히려 그 사회의 안정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희생을 개인에게 강요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이혼한 사람들은 무책임하다고 하지만, 난 이혼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서는 이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게 무책임하기 때문에 그런 경우도 있지만, 이혼한 사람들이 모두 무책임한 것은 아니다. 상대의 부정한 행위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안식처가 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책임' 때문에 이혼하지 못하고 고통받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종종 보는데, 그런 그들의 삶은 자신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의 삶도 갉아먹더라. 


그런데 내 주위에서 이혼한 사람들을 보면 정도와 기간의 차이만 있을 뿐, 그들은 대부분 이혼 후에 엄청난 고통과 아픔을 경험하더라. 난 이혼한 이후에 정신과 치료를 받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이성에 대한, 심할 경우에는 사람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 사람들도 봤다. 거기다 우리나라에서는 '이혼한 사람'이라는 낙인까지 찍히니...


왜 결혼인가?

이런 현실을 고려하면 결혼은 또 일면 도박과 같은 성격을 갖는 것처럼 느껴질지 모른다. 대박 아니면 쪽박. 그런데 사실 우리 인생에서 내리는 결정들이 다 어느 정도는 그런 성격을 갖지 않나? 대학을, 전공을, 진로를 선택하는 것 모두 말이다. 그런 점을 고려했을 때 결혼 후에 가정생활은 우리가 내리는 다른 결정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도박으로써의 성격이 오히려 약할지도 모른다. 소박에서 대박을 만들어가는 가는 과정을 가질 수 있으니까.  


사실 내가 결혼을,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는 것에 대한 소망을 포기하지 못한 가장 현실적인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우리 부모님과 관련이 있다. 자연의 섭리에 의해서, 그리고 우리 부모님을 위해서라도 나는 우리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이후에 세상을 떠나야 한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나는 물론이고 어떤 인간도 혼자 사는 것이 행복하고 즐거울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이후에, 텅 빈 세상에 홀로 남겨진 고아로 남겨진 느낌으로 살고 싶지 않아서, 조금 더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 살 자신이 없어서, 그리고 이 세상에 누군가 한 명 정도는 내 덕분에 그런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있게 해주고 싶어서 나는 여전히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을 꿈꾼다. 그 가정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는 up and down이 있겠지만.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그리고 누군가의 인생에 내가 행복이 되어주기 위해서. 그것이 결혼의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에 가중치를 똑같이 두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 가정은 너무 길지 않은 시간 안에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이 글을 마치며 다짐했다. 이렇게까지 차갑고 이성적인 글은, 적어도 사랑에 대해서는 쓰지 않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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