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에 적정한 수준의 연애를 하고, 그 사이에 적정하거나 조금 긴 공백기도 가지면서 살아왔다. 그 과정에서 상대를 정말 힘들게 한 적도 있고, 상대로 인해 힘든 적도 있다. 반대로 상대를 정말 기쁘게 한 적도 있고, 내가 엄청나게 감동했던 적도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러했던 적이 있다는 사실만 기억날 뿐이지 그런 기억들은 누군가 바로 옆에서 상기시켜주거나 그 장소를 지나가지 않는 이상 헤어진 이후에 그런 일들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다.
그런 내게도 뇌리에 박혀서 빼내려고 해도 빠지지 않는 기억이 딱 한 가지 있다. 그때 만난 친구의 부모님은 모두 장애가 있으셨고, 우린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서로가 보는 방향이 너무 비슷해서 결혼 얘기도 가끔씩 하는 상황이었고 그날도 너무 진지하지 않지만 가볍지도 않게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난 무심코 '내가 장애가 있으신 분들이랑 많이 생활해 본 게 아니라서, 만약에 우리가 결혼을 한다면 아무리 노력을 해도 실수하는 게 있을 거야. 그러면 내가 실수하지 않게 네가 좀 도와줬으면 좋겠어'라고 말했고, 그때 만나던 그 친구는 눈물을 펑펑 흘리며 울었다.
당황했다. 갑자기 왜 이렇게 펑펑 우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러냐며 눈물을 닦아주자 그 친구가 내게 진짜 모르는 거냐고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거냐고 물으며 '그게 진짜 계산한 말이 아니면 너무 감동이잖아'라고 하는 게 아닌가. 지금까지 본인이 만난 남자들은 하나 같이 본인 부모님에게 잘하겠다는 틀에 박힌 말은 했지만 누구도 그 상황을 상상해보고 그 무게를 진심으로 같이 지고 나가겠다는 마음이 느껴지도록 표현한 적은 없었다는 게 그 친구의 설명이었다.
그 친구와 헤어진 지 몇 년이 지났고, 그 친구에 대한 감정은 전혀 남아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억이 뇌리에 아직도 박혀 있는 것은 그때 그 친구가 그렇게 반응해 준 경험은 내가 나쁘지 않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 그 상황은 가장 이상적인 연애 장면이 아닐까 싶다. 이는 나도 상대에게 뭘 해준다는 의식 없이 한 말이 그 친구를 감동시켰고, 그 친구도 내게 긍정적인 자의식을 심어주려고 의도한 것은 아닌데 그 친구의 그런 반응이 내 안에 그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가장 이상적인 연인은 아마 그런 관계일 것이다. 내가 상대에게 뭔가를 해줬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난 그저 내 자신에게 솔직했을 뿐인데 상대는 뭔가를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는 관계 말이다. 그래서 가장 이상적인 연애는 두 사람이 서로 상대에게 뭘 해줬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두 사람은 서로 상대에게 진짜로 많이 받았다고 느끼는 연애가 아닐까? 서로 본인이 상대에게 이것저것, 저런 게 조런 거, 이런 거를 해줬다고 계산하고 기억하고 상대에게 따지는 연애보단, 그런 연애가 훨씬 낫지 않을까?
그런 연애가, 그런 연애를 하는 연인이 가장 아름다운 것은 두 사람이 그러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상대가 그러하게 반응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이 자신의 감정과 상대에게 진실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턴가 내가 상대에게 뭘 해줄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상대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을 내 머리로 생각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이는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내가 상대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 두 사람이 다투거나 둘 간의 갈등이 발생하면 나도 모르게 '내가 000까지도 해줬는데'라는 생각이 드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만날지 고민할 때, 만나고 싶단 생각을 할 때 이젠 내가 저 사람에게 뭘 해줄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상대가 나와 만남을 시작하기로 한다면 자신이 그 관계로 인해 긍정적인 영향을 받는다고 느끼기 때문일 테니까. 내 경험상 상대를 정말 사랑한다면 나도 모르게, 저 사람에게 뭘 해준다고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더라도 뭔가를 계속해주게 되더라. 그렇다면 그에 대해서 생각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대신 난 철저하게 내가 상대와 있을 때 어떤 영향력을 받는 지만 돌아보기로 했다. 상대와 있을 때 내가 어떤 상태인지, 상대와 함께 함으로써 난 어떤 사람이 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상대가 내게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면, 난 자연스럽게 그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상대에게 잘해주게 될 것이고, 그건 또 어느 순간 내게 선순환 고리로 돌아오지 않을까?
물론, 그런 선순환 고리만 반복되는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선순환 고리가 다른 관계보다 자주 발생하는 관계는 충분히 있을 법하고, 그런 사람과 함께라면 인생도 살아볼 만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