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어디까지 의미가 있을까?

by Simon de Cyrene
친구가 이민을 갔다

고등학교 시절 가장 친했던 친구가 뉴질랜드로 이민을 갔다. 1년도 더 된 일이다. 그런데 난 그 소식을 몇 주 전에야 들었다. 그것도 같이 잘 어울리던 또 다른 친구에게서. 그 친구 역시 전해 들은 소식이라고 하더라. 솔직히 처음에는 섭섭했고, 화가 났지만 몇 분 지나지 않아서 그 친구에게도 뭔가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삼성물산에 다니다 삼성전자로 옮겨지는 등 한국의 기준으로 보면 나쁘지 않은 직장에 다니다가 갑자기 뉴질랜드로 간 배경에는 아마도, 추측컨대 본인의 가정을 위한 무엇인가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남미 담당이라서 가족과 떨어져서 살아야 했던 시간이 1년 중 꽤나 길었으니까.


조금 더 어렸을 때였다면, 난 지금까지도 그 친구에 대한 섭섭함과 분노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 소식을 듣자마자 카톡으로 연락을 해서 너무한 게 아니냐고 따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내가 그 친구의 소식을 이제야 들었다는 것은 역으로 말하면 나 또한 그 친구에게 그 기간 동안 한 번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아닌가? 누가 누구에게 너무한 것이란 말인가? 내가 친구를 그렇게 판단할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친구는 멀어지게 되어있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이런 일들은 생각보다 자주 일어난다. 일을 하고, 각자 삶의 영역에서 자신의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다 보면 사실 한 때 굉장히 친했던 사람들도 어느 순간 굉장히 멀어지고 만다. 사실 내가 대기업을 다닐 때야 그 친구와 공감하고 공유할게 많았지만, 내가 대학원에 진학한 이후에 나는 그 친구와 만날 때마다 우리가 많이 달라지고 있음을 느꼈었다. 각자의 환경이 달라지면서, 환경의 영향을 받는 인간인 우리는 그렇게 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만나서 공유할 수 있었던 것들은 겨우 고등학교 시절의 추억, 그리고 신앙에 대한 내용들 뿐이었다. 그 친구가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고 나서는 그런 것들을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해졌다.


그 친구가 결혼하지 않았다면 달랐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그 친구와 같은 직장, 비슷한 부서에 있지 않은 이상 우리가 달라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네 삶은 모두 그렇다. 사람들은, 친구라는 이름의 관계는 비슷한 환경에서 비슷한 고민을 할 때는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람처럼 가까워지지만, 두 사람이 다른 길을 가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커 보이지 않았던 차이가 각자의 인새에 나비효과 같은 효과를 내서 두 사람은 점점 달라진다. 누구 탓도 아니다. 환경이 사람을 그렇게 만들 뿐이다. 심지어 똑같은 회사원이라고 해도 연봉이나 회사의 상황에 따라서 정말 절친했던 두 사람이 다시 만나서 대화하는 것 자체가 불편해지기도 한다. 누구의 탓도 아니다. 갈림길에서의 한 걸음의 차이가 시간이 지나면서 관계를 그렇게 만들 뿐이다.


친구, 사랑, 연애, 가족

어떤 이들은 내가 너무 유별나게 브런치에서 연애와 사랑에 대한 글을 쓴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돈이 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까지 쓰는 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도 주위에 있다. 그 이면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고, 그 이유 중 한 가지는 한 때는 '친구냐 사랑이냐'의 질문에 잠시 망설여도 친구를 선택했던 내가 시간이 지날수록 가족이 아닌 친구로 엮인 관계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부족사회가 아닌, 개인이 개인과 경쟁하는 구도의 현대사회에서는 가족 외에는 깊고 친밀한 관계가 있을 수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그건 내가 친구가 없기 때문이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꼭 그렇지는 않다. 난 그래도 속을 다 터놓고 지낼 수 있는 사람이 3-4명 정도는 항상 있었고, 깊지는 않지만 넓게는 관계가 있는 사람도 지금은 삭제한 페이스북 계정을 기준으로 약 1300명 정도 되었었다. 20대에 워낙 다양한 활동을 했어서 내 주위에는 항상 사람이 버글거리는 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모든 관계들은 결국 희석될 수밖에 없더라. 그리고 그렇게 되는 것은 사실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 현상은 각자가 본인의 삶에 최선을 다할 때 부수적으로 나타나는 효과이기 때문에.


사실 가족이라고 해도 매일 얼굴을 보고, 대화하지 않는 이상 그 사이의 관계가 친밀하지 않은 경우도 엄청나게 많지 않나? 같은 공간에 살아도 말이다. 하물며 같은 공간에 살면서 일주일에 몇 번은 밥을 같이 먹고 자신의 인생의 기간만큼 알아온 가족 간에도 관계가 그렇게 될 수 있다면, 같은 공간에 살지도 않고 자주 봐도 1-2달에 한 번 보는 관계에 한계가 있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친구의 의미와 한계

물론 그렇다고 해서 친구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난 지금도 내가 정말 힘들 때 찾는 친구들이 있다. 더 이상 꼭 동갑은 아니지만. 그런데 그 친구들에게 연락할 때 나의 목적은 조금씩 다르다. 내가 의식하고 생각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얘기를 하고 싶을 때 찾게 되는 친구가 모두 다르더라. 나는 일 얘기를 하기 위해 연락하는 친구, 신앙 얘기를 위해 연락하는 친구, 개인적인 얘기를 하기 위해 연락하는 친구가 모두 다르다. 그건 그 사람들이 내 삶 중에 딱 그 정도에 대해서 공감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인생을 입체적으로, 그리고 전체적으로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줄어들고, 어느 순간에 가서는 거의 없어지다시피 하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의 삶이란 것이, 최소한 현대사회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부족 생활을 할 때, 한 마을 사람들이 같은 방식으로 생계를 해결할 때는 그 사람들끼리 공유할 수 있는 게,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게 많았겠지만 현대사회에서는 그러한 공동체적인 공감대가 형성되는 데는 구조적인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사실 사람들은 어떤 사람과 결혼을 해야 하는지, 어떤 사람을 만나야 하는지에 대한 썰을 많이 풀지만 결론은 이미 나와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단기적으로는 에로스적인 사랑이 필요하겠지만, 사실 궁극적으로 배우자는 그 사람과 평생 함께 갈 수 있는 좋은 친구여야 한다. 물론 그 사람도 나의 인생을 모두 다 이해하고 받아들여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같이 살고, 밥을 먹고, 매일 보거나 연락함으로써 두 사람 간의 삶의 접점이 늘어나고, 두 사람이 이해관계를 공유하면서 두 사람이 세상 누구보다 서로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는 것. 난 그게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려나가는 것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이런 글을 쓰면서 마음 한편은 쓰라리고, 아프며, 공허해지기도 하지만, 그게 어쩔 수 없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인 듯하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는 본인 중심적으로 사고하는 듯한 친구들을 너무 원망할 필요는 없다. 그 또한 그만의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는 나 또한 그런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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